들불처럼 번지는 반전열기, 국내는 '파병'갈등 속

[이라크 전쟁] 지구촌은 '전쟁과의 전쟁'
들불처럼 번지는 반전열기, 국내는 '파병'갈등 속

세계는 반전(反戰)의 깃발을 내걸었다. 삶 아니면 죽음 만이 있는 전쟁 앞에서 중용(中庸)의 미덕은 용납되지 않았다. 전쟁을 지지하든지 아니면 반대하든지, 양자 택일만 있을 뿐이었다.

속전속결의 예상과 달리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으로 접어들면서 반전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 부시 정부는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과 함께 반전 여론과도 맞서야 하는 사면초가의 처지로 내몰렸다.

국내 여론도 반전 대열에 적극 동참했다. ‘파병 공방’이라는 기름까지 부어졌다. “반전은 곧 파병 반대”라는 극단적인 여론까지 조성되면서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는 노무현 정부를 옥죄기 시작했다. 여기에 극우와 보수 세력들은 ‘파병 동의’를 외치고 나서면서 심각한 사회 갈등 양상으로까지 번졌다.

세계는 지금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에 반전 세력과 전쟁 찬성 세력과의 전쟁이 가세, 심각한 홍역을 겪고 있다.


전 세계 뒤덮은 반전 여론

미국의 이라크 공습이 시작된 20일 이후 세계 각지에서는 매일 수백만명의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아랍에서도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비난하고 전쟁 중단을 촉구하는 피켓이 물결을 이뤘다. 전쟁의 진원지인 미국 시민들도 반전 시위 행렬에 동참했다. 교수, 공무원, 초등학생, 종교계 인사, 국회의원, 영화인 등 반전 대열에는 신분과 남녀 노소가 따로 없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반전 시위도 갈수록 폭력성을 띠기 시작했다. 레바논 트리폴리에서는 26일 반전, 반미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던 3,000여명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차량을 부수고 불을 질렀고 한 미국계 패스트푸드점을 습격하기도 했다.

폭력 시위를 거의 않던 이라크 전 참전국 호주에서도 시위는 갈수록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같은 날 시드니에서는 1만여명의 학생들이 동맹 휴업을 한 채 거리로 나와 진압에 나선 경찰과 격렬히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60명이 연행됐다.

스페인에서는 22일 마드리드 시위에서 120명이 부상한 데 이어 26일에도 전역에 수만명이 반전 시위에 나서 투석전까지 벌어졌다. 미국에서 반전 여론이 가장 높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28일 기독교 목사, 가톨릭 신부, 유대교 라비 수십명이 연방 정부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체포됐다.

반전 시위와 함께 미국에 대한 반감과 분노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이탈리아 비첸차에서는 미군기지 근처에서 미군 소유 차량 3대가 잇따라 방화로 불에 타는 사건이 발생했고, 프랑스 보르도에서는 미국과의 동맹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 복제 동상이 불에 타고 9.11 테러를 애도하는 추모비마저 파괴됐다.

필리핀, 일본, 벨기에 등에서는 맥도널드, 코카콜라, 스타벅스 등 미국 기업 제품의 불매 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국내는 파병 반대 여론 확산

국내에서 반전은 곧 파병 반대 목소리로 나타났다. 개전 초기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전 지지 담화문을 발표했을 당시만 해도 국민 여론은 ‘현실론’이 주도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의도야 어떻든 간에, 명분이 있든 없든 간에 전쟁은 어차피 발발한 것이다. 북핵 문제라는 첨예한 내부 리스크를 안고 있는 나라로서 미국이 도움을 요청하며 내민 손을 뿌리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파병 현실론은 아마도 불가피한 선택에 대한 ‘이해’ 내지는 ‘암묵적 동의’였을 터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파병 반대 여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국제적으로 명분을 부여 받지 못한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따른 전세계적 반전 평과 기류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특히 국내적으로 북핵 문제와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 등을 거치면서 대미관계의 새로운 지향점을 찾아야 한다는 국민적 각성도 덧붙여졌다.

27일 국가인권위원회가 반전 성명을 채택한 것은 여론을 들끓게 한 기폭제가 됐다. “이라크에 대한 미ㆍ영 연합군의 무력 공격은 유엔 헌장이 금지하는 무력 사용이고,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우리 헌법에도 어긋난다.

파병의 근거로 내세우는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도 위법한 전쟁까지 지원하는 의무는 포함돼 있지 않다.” 정부 기관인 인권위가 반전과 파병 반대 여론을 대변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 지지 세력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도 내부 논란 끝에 이라크 전 지지 철회와 파병 철회를 공식 요구하는 성명을 채택했다.

반전, 파병 반대 시위도 갈수록 격렬해졌다. 전쟁이 시작된 지 열흘이 넘어선 휴일 전국 도심은 집회와 시위 인파로 몸살을 앓았다. 민주노총과 전농, 전국연합 등 46개 단체로 구성된 전국민중연대는 29일 오후 서울 종묘공원에서 집회를 갖고 전쟁 중단과 파병 저지를 외쳤다.

서울 광화문에서는 ‘미군 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 대책위’ 주최로 2,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이라크전 중단, 국회 파병동의안 저지 반전 평과 촛불 대행진’이 열렸고,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인근에서도 대학생 1,000여명이 ‘반전 문화제’를 개최했다. 수원, 부평, 춘천, 대전, 천안, 전주, 대구 등에서도 ‘전쟁과의 전쟁’ 열기는 불을 뿜었다.


파병 동의는 우익 세력의 몫?

‘파병 동의’는 미국의 이라크 공습을 지지하는 극우 보수 세력만의 몫이었다. 국회가 파병 동의안 표결에 나설 예정이었던 3월28일 서울 여의도 앞 수많은 시위 인파 중 해병전우회 소속 시위대 500여명이 유독 주목을 받았다.

‘NO WAR’ ‘학살을 중단하라’ ‘파병 반대’ 등의 반전 피켓이 물결을 이룬 속에서 이들은 ‘파병 찬성’의 피켓을 들어 올렸다. 한 참가자는 “전쟁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등 친북 좌경 세력의 전쟁 및 파병 반대 운동을 극심하게 벌이고 있어 파병 동의안 국회 통과가 불투명하게 전개되고 있다”며 “구국의 신념으로 해병대 전우회가 긴급히 나서기로 했다”고 목청을 높였다.

노동계와 진보적 시민단체들이 이라크 전 파병안에 찬성하는 국회의원을 상대로 낙선 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선 데 맞서 우익 단체들은 거꾸로 파병 반대 의원들을 상대로 낙선 운동을 하겠다고까지 선언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자유수호협의회, 자유시민연대 등 16개 보수 단체들은 29일 일간지 광고를 통해 “국익을 외면한 채 일부 반미 세력의 낙선 운동 협박에 굴해 파병에 반대한 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 낙선의 쓴 맛을 보게 될 것”이라며 “정부의 이라크전 파병은 국익을 위한 고려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피 흘려 도운 우방인 미국이 악전고투할 때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밝혔다.


곤경 처한 노무현 대통령

거센 반전 열기는 미국 부시 정부 못지않게 노무현 정부를 곤경에 빠뜨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지지 세력인 진보 세력과 등을 지고 그에게 반대표를 던졌던 보수우익 세력과 ‘같은 배’를 타야 하는 처지에까지 내몰렸다.

최근 행보에서도 이 같은 고심은 여실히 드러난다. 노 대통령은 매일 열리는 수석회의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라크 파병 결정에 대해 ‘전략적 선택’임을 강조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반전ㆍ평화 시위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해석했다.

21일 수석 보좌관 회의에서는 반전 시위자들에 대해 “경찰이 무리하게 진압하지 말 것”을 지시했고, 26일에는 “시민단체들의 적절한 의사 표현은 국민들의 권리와 자유”라고 말했다.

특히 27일 국가인권위원회의 반전 성명 발표에 대해서는 “인권위는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권위는 협의의 정부 소속 기관이 아닌 고도의 독립적 기구”라며 “(정부와) 견해가 다르더라도 그런 행위 자체는 인권위 고유 업무에 속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만약 대통령에 당선되지 않았다면 분명 반전 및 파병 반대 시위의 최전방에 서 있었을 노대통령으로서는 “본심과는 다르게 일국의 국가 원수로서 이 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달라”고 그의 지지 세력들에게 무언의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나라당이 “이중 처신을 하고 있다”며 공세를 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력 부재’에 대한 지적도 쏟아진다. 본심이 어떻든 대통령으로서 파병 결정을 내렸다면 어떻게 해서든 적극적으로 국민을 설득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갈등 양상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사모 한 회원(ID:freepath)은 “검사와의 대화에서는 적극적이던 분이 이렇게 국론이 분열돼 있을 때 아무 역할을 못하는 것을 보면 꼭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같아 보인다”고 꼬집었다.


국론 분열을 막아라

‘전쟁 반대 = 파병 반대’, ‘전쟁 지지 = 파병 지지’의 양극단의 대립과 갈등 구도가 형성되면서 합리적인 해결책 모색을 위한 대화는 상실됐다. 자칫 파병에 대해 섣불리 동의 의견을 밝혔다가는 이번 전쟁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갈등 구도만 더욱 확대 재생산되고 있을 뿐이다.

국회의원들은 국민 여론 눈치보기에 급급해 3월 25일에 이어 28일, 그리고 임시 국회 마지막 날인 31일에도 파병안을 처리하지 못하고 4월 2일 본회의로 결정을 미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국민 여론의 뭇매를 맞을 뿐 아니라 시민단체의 낙선 운동 대상에 걸려들 수 있는 상황에서 ‘개인의 소신’은 내팽개쳐졌다.

진보 성향의 민주당 정동영 상임고문이 31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라크 전 파병 지지를 공개 선언하며 “파병이 전쟁 지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속에 평화적 해결의 고뇌가 숨어있음을 이해해달라”고 밝힌 것은 결정에 대한 평가를 떠나 ‘파격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들에게도 ‘반전’은 그들의 상품성을 높이는 도구였다. 소신을 갖고 반전과 파병 반대를 외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고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연예인들 조차도 TV 카메라 앞에 서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전쟁과 파병에 반대한다”고 말할 정도가 돼 버렸다.

한 방송사 여론 조사는 현재의 극단적 갈등 양상이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를 보여준다. 조사에서 반전에 동의하는 국민은 75%에 달했지만, 파병 문제에 대해서는 지지와 반대 여론이 각각 47%로 팽팽히 맞선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전쟁에는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으로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국민이 결코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현실에서는 파병 반대론과 함께 파병 불가피론도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며 “낙선 운동 압력 등 극단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갈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국민 모두 다시 되짚어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영태 기자


입력시간 : 2003-10-01 14:07


이영태 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