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여권내부 분란의 연속,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정권, 방향타를 잃다] 배신 혹은 음모?
'좌충우돌' 여권내부 분란의 연속,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7월24일 오전 민주당 고위당직자 회의. 이상수 사무총장 등 참석자들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보도진과 어울려 날씨 등을 소재로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간간히 웃음도 터졌다. 하지만 정대철 대표가 수행원과 함께 회의장에 도착한 순간, 분위기는 싸늘하게 급변했다.

정 대표는 자리에 앉자마자 돌연 “집권 초기 당정간 협의와 협조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운을 뗀 뒤 “청와대에서도 당정협의에 어긋나는 일을 자제시키고 문책인사까지 해야 한다”고 청와대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정 대표의 굳은 얼굴에는 평소 보기 힘든 비장함마저 엿보였다. 회의장은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특히 신 주류 측 참석자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자신의 정치생명을 옭아매고 있는 ‘굿모닝 게이트’와 관련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정 대표의 ‘치받기’제 1탄은 그렇게 돌발적(?)으로 이뤄졌다.

다음날인 25일에는 민주당 정균환 원내총무가 작심한듯 나섰다. 노 대통령이 핵폐기물 처리장 설치 문제와 관련, 부안군수에게 격려전화를 걸어준 것에 대해 “참여정부가 일개 군수의 독단에만 호응해 핵폐기장 설치 결정을 강행, 국민참여에 기초한 국정운영이란 국정철학을 스스로 저버렸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근태 의원도 노 대통령이 대선자금과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언급한 내용을 빗대 “정치인의 고해성사를 웃음거리로 만든 일 자체가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집권 여당의 대표와 원내총무, 당 중진이 대통령을 향해 일제히 불만을 터뜨리면서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여기까지는 민주당과 청와대간의 갈등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속내를 들어다 보면 여권 내 갈등은 갈 데까지 간 느낌이다.

신당 문제를 둘러싼 신ㆍ구 주류의 해묵은 갈등은 이미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당직자들도 내편, 네편으로 나뉘어 신경전을 벌이고 정당의 ‘입’인 부대변인 사이에서도 시각이 다른 논평이 양산되는 처지다. 청와대 내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집권 초기에는 부산 인맥과 386 측근과의 힘겨루기 양상이 표출되더니 ‘굿모닝 게이트’가 터진 후에는 민주당 신 주류와 386 측근과의 음모론을 둘러싼 공방이 한창이다. 여기에 검찰은 검찰대로 유인태 정무수석의 검찰 비하 발언에 발끈해 언론 통해 따끔하게 응수하고 나섰다.

도무지 어디를 봐도 출범 6개월도 채 안된 집권 세력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모양새로 보기 힘들다. 청와대는 당과 다투고, 당은 두쪽으로 나뉘었고, 청와대 내부마저도 의견다툼이 치열하다. 이쯤 되면 방향타 없는 집권 세력 내부에서 벌어지는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나 다름없다.


정 대표, 청와대와 일전불사?

‘여여충돌(與與衝突)’의 발화점은 민주당 정대철 대표의 입이다. 당정간 협의 부재와 청와대 비서진 교체를 거론한 이튿날 그는 ‘순망치한(脣亡齒寒ㆍ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을 예로 들면서 청와대의 조치를 거듭 촉구했다. 문석호 대변인 등은 정 대표의 이 같은 발언이 원활한 당정협조를 위한 원칙적인 얘기라고 선을 긋고 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검찰 소환을 앞두고 터져 나온 정 대표의 청와대 비서진 교체 주장은 굿모닝 게이트와 관련, 민주류 중진들의 이름을 언론에 흘린 것으로 알려진 P비서관 등 노 대통령의 386출신 측근 비서진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이번 사건이 당내 신 주류 중진들의 물갈이를 겨냥한 이들의 음모라는 것이다.

정 대표의 한 측근은 “청와대 386 참모들이 검찰내 인맥을 통해 굿모닝 사건 수사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정황 증거도 상당부분 확보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는 안희정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恥?때는 동업자라며 감싸더니 이번 사건에는 ‘나 몰라라’ 하는 청와대 반응에 대한 불만도 섞여 있다.

정 대표는 문재인 민정수석과 유인태 정무수석, 신 주류 좌장인 김원기 고문 등을 잇따라 만나 거듭 청와대 측에 대해 ‘모종의 요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서 정 대표는 “시정잡배도 이렇게는 안 다룬다. 이건 음모다”며 “선대위원장을 한 사람에 대해 괴로워하는 기색도 없는 것은… 배신이야”라고 핏대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한결같이 정 대표의 바람과는 거리가 있었다. “요즘 검찰이 간덩이가 부어서…” 등이 고작이었다.

오히려 청와대 측에서는 정 대표가 자신만 검찰 소환만 받는다는데 대한 억울함은 이해하지만 당 대표가 대통령을 향해 날을 세우는 데 대해 적잖이 불쾌하다는 쪽이다. 더구나 고유 권한인 인사권을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반응이다.

이에 정 대표는 7월27일 국립묘지의 부모 묘소를 참배하면서 검찰 출두를 앞선 심경을 정리했다. 정 대표의 선친묘소 참배는 정치적 고비나 중대결단을 앞둔 ‘정치적 의식’이었다. 정면충돌 같은 불상사를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치자금 사건이 아니라 개인비리 사건’이라는 검찰의 기존 입장을 감안하면 정 대표가 검찰에 출두할 경우 주도권은 완전히 검찰에 넘어간다. 이 때문에 측근들은 “여기서 물러서면 끝장”이라는 강경론을 주문하고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청와대에 앉히려 했고 또 그로 인해 여당의 최고위 반열에 오른 정 대표가 정치적 동지 및 은인에서 원수 같은 관계로 변하고 있는 노 대통령을 향해 어떤 히든 카드를 껴내들 지 궁금하다.

노 대통령은 지금껏 정 대표의 회동 희망을 애써 외면하면서 정 대표의 희생을 원하고 있다.


민주당, '萬人間 싸움터' 방불

비단 정 대표 뿐이 아니라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최근 모습에는 연일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적군이 때론 노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청와대 386 참모들이 되기도 하고, 검찰을 향해 불만을 쏟다가도 구성원들끼리 서로 총을 겨누는 장면도 연출된다. 만인간(萬人間) 싸움터 수준이다.

먼저 정균환 원내총무가 지역구 현안을 앞세워 포문을 열었다. 정 총무는 전북 부안 위도의 핵폐기장 부지 선정과 관련해 전국 여론주도층 인사 1만5,000여명에게 서한을 보내 핵폐기장 설치 결정 강행을 비난했다. 정 총무는 또 “25일까지만 집권여당"이라고 언급해 갖가지 억측을 낳게 했다. 핵 폐기장 부지 문제를 기점으로 그간 구원이 쌓인 청와대와 사실상 결별을 시사한 것이냐는 추측이 제기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 총무의 공격에 대해 “국가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여당 총무가 청와대를 걸고 넘어지면서 반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지만 정 총무의 반응은 수그러들지 않을 태세다.

김근태 의원은 노 대통령의 발언내용을 문제삼았다. 용기 있는 정치인의 행동을 한낱 웃음거리로 폄하한 데 따른 불만이었다. 그는 경선자금 공판의 최후진술에서 “모두가 아는 비밀을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 지도자의 자리에 선다면 공동체는 황폐해진다”라는 말로 알 듯 모를 듯 노 대통령을 겨냥했다. 청와대 측은 즉각 진화에 나섰지만 김 의원의 불만은 좀체 가시지 않는 듯 하다. 김 의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한동안 지지자들의 격려 글들이 쏟아지곤 했다.

또 조순형 함승희 의원 등은 “노 대통령이 측근들을 물리치고 공무원을 넣어야 한다” “맹목적 충성하는 비서실을 교체하고 국가 철학을 가진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정 대표를 거들면서 청와대 압박에 가세했다.

신 주류 중진들 사이에서도 떨떠름하긴 마찬가지다. 아직은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지만 정 대표 측 주장대로 386 참모들이 당 중진을 겨냥한 물갈이를 꾀하고 있는 것이라면 당연히 정 대표와 보조를 함께 해야 할 입장에서다.

이 와중에 이상수 총장은 애꿎은 검찰을 겨냥하고 있다. 그는 “검찰이 집권당 대표에 대해 피의사실을 중간에 흘리고 소환장을 매일 보내 상처를 낸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올 정기국회에서 검찰총장 국회 출석제를 도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편 민주당 신당파는 구 주류 측의 연기 요청에도 불구하고 신당창당을 위한 토론회를 강행하는 등 ‘압박’작전을 모색하고 있다. 신당파는 자체 홈페이지 개통과 함께 사실상 당보격인 홍보지 5만부도 발간했다. 신당파가 구 주류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처럼 신당프로그램을 수순대로 가동한 것은 분당에 따른 ‘홀로서기’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상층부의 요란한 다툼 속에서도 신 주류를 중심으로 한 신당파들은 차분히 전선을 넓혀가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도 분란의 불씨 내재

청姑遊?민주당 등 외곽으로부터의 공세에 연일 시달리고 있지만 사실 내부적으로도 그리 평온한 상태는 아니다. 안희정씨 사건과 관련, 부산파와 386 참모간 불협화음이 외부로 노출된 이후 이들간의 긴장관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민주당 신 주류와 노 대통령 주변 386 간 신경전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안희정씨의 신당 사무총장 발언이 나오고 난 뒤 더욱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 같다.

이해찬 의원은 안씨 발언을 놓고 “386이 286보다는 낫지만 펜티엄 급보다는 못하다”고 비난했고 유용태 의원은 “앞으로 신당 논의도 안씨와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렸다. 다른 구 주류 의원은 대놓고 특정 비서관을 겨냥해 사퇴요구를 하기도 했다.

이에 청와대 일각에서는 당 쪽을 진정시키려면 일부 386 참모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의견까지 대두되고 있다. 음모론을 인정하는 꼴이 되더라도 당ㆍ청간 불협화음의 고리를 끊으면서 이들에게는 신당 참여라는 대안을 제시하면 된다는 해법이다.

물론 386 참모들 사이에서는 “노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화살을 386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전제한 뒤 “선배 세대들이 내년 총선의 위기감에 따라 과녁을 후배 386들을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386 핵심 측근과 통추세력, 부산인맥을 중심으로 당을 변화시키려 하는 와중에 발생하는 당ㆍ청과 당ㆍ정, 청와대 내부, 당과 당간의 각종 불협화음이란 생각이 든다”고 현 사태를 진단했다.

염영남 기자


입력시간 : 2003-10-05 15:17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