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 20억원 이상의 로열층, 자산격차 갈수록 심화

[우리시대의 부자들] 1%만의 천국… 부자들의 세상
자산 20억원 이상의 로열층, 자산격차 갈수록 심화

칼마르크스는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소 먹이는 일을 ,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토론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굳이 하나의 직업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사회가 일반적인 생산을 규제하고 생산력은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에 누구 하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정신적, 물질적으로 부자일 수 있다는 상상이었다. 하지만 그가 꿈꾸던 공산주의 사회는 실패한 실험이었다.

2003년 9월. 자본주의 국가의 첨병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일원인 한국. 이곳에서 지금 누구나 부자를 열망한다. 돈만을 좇는 속된 삶이 아니라도 돈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며. 그래서 "부~자 되세요"는 최고의 덕담이 됐다.

그렇다고 모두 부자일 수는 없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소수다. 국민 소득 1만달러를 넘어 2만 달러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지만 어찌 보면 자신들만의 배를 채우는 부자들이 서민들을 상대로 수치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허긴 그것이 가장 자본주의 다운 얼굴일 수 있다.

5만5,000명. '백만장자(Millionaire)= 부자'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면 우리나라 부자들의 수는 그렇다(메릴린치 보고소). 거주하고 있는 집을 제외환 보유 자신이 100만 달러(우리 돈 12억원 가량)라니 실제 자산은 20억원이 넘는 사람들일 테다.

1년 새 10%가 늘어났다지만 넉넉하게 4인 가족으로 잡아도 이들 가족의 구성원은 22만명 정도. 정작 그들은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0.5%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저런 설문 조사에서 사람들의 부자의 최소 기준으로 꼽는다는 '집을 포함한 자산 총액 10억원'을 잣대로 삼더라도 1~2% 언저리일 뿐이다.

100명중에 1명. 그들은 나머지 99명이 누리지 못하는 부의 혜택을 평생, 아니 대대로 즐기며 살아간다. 진짜 운이 좋은(물론 성실함과 노력의 대가이기도 하다) 몇몇이 1%의 대열에 합류하기도 하고, 정말 운이 나쁜 몇몇이 그 대열에서 탈락하기도 하지만.


심화하는 빈부격차

빈부 격차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통계 지표는 지니 계수다. 도시 근로자 소득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는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다는 것을, 반대로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환위기 초기 0.283(97년)에서 0.316(98년)으로 크게 치솟았던 지니 계수는 이후 0.317~0.320을 오가며 비교적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98년 고비로 부의 불평등 심화세는 잦아들고 있다"고 단정한다.

허나 문제는 소득 분배보다 자산 분배다. 똑같이 월 500만원의 수입을 올린다 해도 20억원짜리 부동산을 소유할 사람과 1억원 짜리 전세를 살고 있는 사람을 동등한 반열에 놓을 수는 없다. 살인적 고금리, 부동산 가격 폭등, 벤처 열풍 등 외환위기 전후 일련의 변화들은 자산의 불평등을 혹대했다. 가진것이 없는 서민들로서는 부동산에 투자할 수도, 벤처 주식을 살 수도, 또 은행에 돈을 넣어둘 수도 없었다.

직장인 정모(38)씨의 말에서는 상대적 박탈감이 강하게 묻어났다. "금리가 20%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은행에 돈을 넣어두면 돈이 늘어난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강남에 아파트 한채만 있으면 평생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잇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밑천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요."

자산 격차를 확인 할 수 있는 가장 최근의 분석은 지난해 국민은행 경제연구원이 실시한 설문조사다. 국내 1,500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금융자산·부채 현황' 설문조사에서 금융 자산이 많은 우리나라 상위 20%가구의 평균 금융 자산은 2억1,575만원으로, 하위 20%가 보유하고 있는 346만원에 비해 무려 62배에 달했다.

사우이 20%가 보유하고 있는 총자산은 672조원. 국내 개인금융자산 총액(862조원)의 71%였다. '20대 80의 원칙(상위 20%가 80%를 소유한다는 것)'의 실증적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는 실제 자산 격차의 한 단면에 불과할 뿐. 전문가들은 부동산 자산의 불평등은 훨씬 심각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난해 국토연구원이 개인 주택 자산을 토대로 분석한 ?액 지니계수는 0.51. 소득 지니계수에 비해 2배 》?불평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연구원 손경환 연구위원은 "주택 뿐 아니라 소유 집중도가 휠씬 높은 토지까지 계산에 넣었더라면 전체 부동산 불평등도는 이보다 휠씬 심각하게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득 있어도 세금은 없다

"우리가 무슨 사기를 쳐서 돈을 벌었습니까. 아니면 대단한 탈법 행위라도 했습니까." 인터뷰 과정에서 만난 어떤 이는 이시대부자들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강력히 항변했다. 고전 소설의 놀부라도 되는 양 비비꼬인 시각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부자들의 축재(蓄財)는 제도가 톡톡히 뒷받침한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겉으로는 부잗르을 억누르는 것 같은 각종 사회 제도들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다.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대원칙 아래 94년 세법 개정과 함께 도입된 금융소득종합과세. 외환 위기때 일시 유보됐다가 2001년 다시 도입된 이 제도의 골자는 이자나 배당소득 등 금융소득이 4,000만원을 초과할 경우 근로소득이나 사업소득 등 다른종합??그과 합산해 누진적으로 과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취지는 퇴색했다.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가 부부 합산 과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고, 예금 금리는 연 4%가량으로 주저 앉았다. 4%의 금리로 연 4,000만원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 필요한 금융 자산은 10억원. 부부가 명의를 분산하는 것을 감안하면 금융 자산이 20억원이 넘어야 종합 과세 대상에 포함된다는 얘기다.

게다가 장기 채권, 개인연금저축 등 마음만 먹으면 분리 과셀르 선택해 종합 과세를 피할 수 있는 상품도 도처에 깔려 있다. 금융연구원 한 관계자는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자가 이전에는 3만여명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1만명에도 미치지 못하 것"이라며 "부자들은 단지 세금 몇 푼을 절약하기 위해서 라기 보다는 종합 과세를 통해 재산이 공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종합 과세를 회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자들의 천국

"내가 소유한 네브래스카주 50만달러 짜리 집의 최근 재산세는 1만4,401달러엿지만, 캘리포니아주 400만달러 짜리 집의 재산세는 2,264달러에 불과하다. 캘리포니아주이 재산세 인상을 건의하겠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아놀드 슈워제너거 캠프에 합류한 '주식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최근 이렇게 말했다.

우선 우리 돈으로 6억원에 달하는 집의 재산세가 연 1,600만원에 달한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단순히 계산을 해봤을때 재산세율은 무려 2.88%. 더욱 놀라는 것은 사실 강남의 시가 7억원 짜리 아파트에 재산세와 종합토지세를 합쳐 10만원(굳이 비율로 계산하자면 0.014%)이 조금 넘는 보유세가 부과되는 우리나라 현실에 비하면 0.056%의 캘리포니아주의 재산세도 꽤 높은 편이라는 것이다.

최근 정부가 부동산 투기 대책의 일환으로 종합부동산세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강남 지역 거주자들의 경우 재산세 부담이 고작 60~70% 올라갈 뿐이다.

부자들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탈법, 혹은 편법을 통한 재산 증식의 길도 무궁무진하다. 모든 금융 거래를 반드시 실명으로 하도록 한 금융실명제법이 도입된지 꼭 10년.

서민들에게는 단 돈 몇푼을 거래할 때도 피해갈 수 없는 족쇄이지만, 부자들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허울좋은 법에 불과하다. 시중 A은행 이모(38)과장은 "가명 계좌는 드물지만 차명 계좌를 이용하는 것은 부자들에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오랜 기간 거래해 온 고객이 부탁을 해오면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들어주기 마련이다"고 했다.

출처를 묻지 않는다는 이른바 '묻지마 채권'은 아예 정부가 직접 나서서 부자들의 재산 증식이나 은밀한 거래를 도와준 꼴이기도 했다.

부자들은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돈을 모으기도 하고, 증여세 한 푼 물지 않고 자녀들에 부를 대물림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분명 부자들의 천국이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 2003-10-06 13:13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