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와 한판 승부 벌이는 수사의 달인들밤샘 수사에 쪽잠 다반사, 정치권 '특검' 주장엔 수치심도
[대검 중수부 24時] 살아있는 권력을 치는 檢 정·재계와 한판 승부 벌이는 수사의 달인들 밤샘 수사에 쪽잠 다반사, 정치권 '특검' 주장엔 수치심도
정권 초기에 늘상 봐왔던 검찰의 사정이지만 이번은 다르다. 검찰 홈페이지에 국민의 지지와 격려가 쏟아진다. 다음 카페의 ‘뉴검찰(cafe.daum.net/newgumchal)’ 등 검찰 팬 클럽도 낯설지 않은 세상이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의 7층, 10층, 11층이 그 진원지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중수부)다. 검찰 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불이 켜져 있는 곳으로 진작부터 유명했던 이곳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정치 검찰’이란 비난의 진원지였다. 그러나 지난 3월 안대희 중수부장이 취임하면서 저간의 부정적 이미지는 발붙일 곳을 잃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세력이 연루된 나라종금 로비의혹 사건을 비롯, 현대비자금 사건, SK비자금 사건 등 일련의 메가톤급 사건에서 이 시대의 검찰은 거듭났음을 입증했다. ‘원칙과 소신’을 내건 안 부장식 수사가 빛을 발한 셈이다. 이처럼 검찰이, 중수부가 제자리를 잡는 데는 수뇌부 못지않게 수사 일선에서 몸을 아끼지 않은 평검사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대비자금 사건에 관여한 A검사는 지난 7월부터 최근까지 정상적인 퇴근을 한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다. 현대비자금에 대한 수사는 송두율 대북송금 특검팀이 자료를 건넨 7월초부터 본격화됐지만 사실상 훨씬 이전부터 비밀리에 진행됐다고 한다. 중수부 안팎의 시각으로 보자면 특검이란 검찰의 수치다. 그래서 ‘공이 검찰로 넘어올 경우 다시는 정치권에서 “특검”이란 말을 꺼내지 못하게 뭔가 보여주자’는 결의가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검팀이 7월 4일 자료를 정식으로 검찰로 건네기 전에도 현대 비자금에 대한 조사는 상당 부분 진척돼 있었다고 한다. 핵심은 특검이 밝힌 150억원 외의 ‘+a’였다. 이후 중수부 검사들의 24시간은 ‘+a’라는 미로를 찾는 데 저당 잡혔다. 비자금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다 가곤 했다. 이때처럼 아이들 얼굴과 집에서 지은 밥이 그리울 때도 없었다는 게 A검사의 말이다. 사채업자 조사를 통해 미로의 출구가 어렴풋이 보이고 재미동포 무기중개상 김영환씨가 이 사건의 최대 변수라는 사실을 밝혀냈을 쯤엔 거의 매일 밤을 세웠다. 사무실 간이 침대에서 잠깐씩 눈을 붙이는 쪽잠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형 사건을 수사할 때 어려운 점은 ‘수사 보안’이다. 안 중수부장의 취임 일성도 ‘철저 수사’와 ‘보안’이었다. 중수부측이 얼마나 그 원칙에 충실했던가는 대검찰청 앞 한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드러났다. 평상시와 다름없던 7월초였다. 대검 수사관계자와 법조 출입 기자들이 저녁 식사를 하다 의례대로 폭탄주 몇 잔이 돌던 이날, 대검 고위 관계자가 실수로 ‘천기’를 누설한 것이다. 현대비자금 총액이 1,000억원에 이르는데, 이를 한나라당 의원 5명이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합석한 후배 검사가 신속히 입막음을 하고 고위 검사도 “없던 일로 하자”고 해 큰 문제없이 지나갔지만 1,000억대 비자금설이 그때부터 나돌기 시작했다. 입 한번 뻥끗 잘못했다가 혼이 난 사례도 있다. 지난 8월 수도권 지청으로 좌천된 모 수사관의 경우다. 김영완씨와 관련해 자금 관리자가 추가 출금됐다는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안 중수부장은 기사 유출자인 A수사관을 확인해 일벌백계한 것이다. A수사관은 당시 법조를 출입하는 국정원 직원에게 그 사실을 귀띔했는데, 그가 다시 기자에게 전달해 문제가 불거졌던 것이다.
수사 보안은 기자를 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자칫 마주치기라도 하면 물고 늘어지는 기자들의 속성을 잘 아는 중수부 검사들은 잠시 틈을 내 집에서 옷을 갈아 입고 오는 경우에도 기자들의 눈을 의식해야 했다. ‘출근 멘트’라는 새로운 풍속도가 생긴 것도 그래서였다. 기자들이 송광수 검찰 총장과 안대희 중수부장이 출근하는 오전 9시 대검찰청 1층에서 수사 상황에 대해 질문하고 ‘멘트’를 받는 데서 나온 말이다. B검사는 8월초 김영완씨가 미국에서 진술 조서를 보내오고 고 정몽헌 회장이 순순히 자백,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현대로부터 각각 200억원과 15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힐 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흘 연속 밤샘을 해 거의 녹초가 된 상태에서 두 사람에 대한 구속의 단서를 확보했지만, 정몽헌 회장의 예기치 않은 자살로 충격을 받았다는 것. 특히 언론이 검찰 수사와 고 정 회장의 죽음 사이에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지적할 때가 가장 난감했다고 한다. 고 정 회장은 권노갑씨나 박지원씨와는 달리 수사에 협조적이고 순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자살을 하자 담당했던 검사와 수사관들은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게 검찰 안팎의 이야기다. 또 민주당 함승희 의원이 고 정 회장에 대한 강압수사 의혹을 제기했을 때는 남기춘 중수1과장이 “검찰 전체의 명예를 훼손하는 문제”라며 함 의원을 명예 훼손으로 고소하려고 고소장 작성까지 마쳤지만, 송 검찰총장이 강력히 만류해 그만두었다는 후문이다. 수사를 하다 보면 우연히 단서를 잡는 경우도 있다. 김대중(DJ)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의원이 나라종금 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기소할때의 일이다. 당시 중수부내에서는 전직 대통령 아들이란 점 때문에 논란이 있었지만 일단 수사를 하기로 한 이상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때 거동이 불편한 김 의원이 별다른 소일거리 대신 고스톱을 즐겼다는 사실을 알고, 고스톱 멤버를 집중 추궁해 증거를 확보했다고 한다. 김 의원과 정학모 전 부회장, 안상태 전 나라종금 사장 등이 서울의 N호텔에서 자주 만나 고스톱을 쳤고, 같은 호텔에서 안 전 사장으로부터 인사청탁과 함께 1억5,000만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중수부가 대어(?)를 낚는 개가를 올린 데는 철저한 수사 못지않게 효율적인 수사팀 운영도 한몫 했다는 게 중론이다. 유재만 중수2과장이 특검팀서 넘겨받은 현대비자금 수사를 할 때 중수1과팀의 지원이 따랐고, 남기춘 중수1과가 SK비자금 수사에 전력할 때는 중수2과팀을 합류시키는 크로스 체크 전략을 취했다. 안 부장 특유의 운영 방식이 올린 성과다. SK비자금을 수사하는 한 검사는 “고 정몽헌 회장 자살후 밤샘 수사가 줄어들긴 했지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애로를 말한다. 최근에는 SK비자금이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민주당과 의원 개개인에게 흘러 들어간 단서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이를 확인하는 데만도 수일이 걸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이 SK로부터 100억원을 받은 사실을 시인하고, 이재현 전 한나라당 재정국장이 구속되기까지 10월 한달 가까이 제 시간에 퇴근한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서 얻은 별명이 ‘독립군’이다. 어쩌다 한번씩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가 군자금(옷 등)을 갖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일제하 독립군 같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아이가 아파서 병원 신세를 질 때도 눈만 마주치고 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더욱 중수부 검사들을 난처하게 하는 것은 바깥의 왜곡된 시각이다. 고 정몽헌 회장에 대한 강압수사가 대표적이다. 또 비자금 수사의 키를 쥔 김영환씨의 소환이 어렵게 되자 수백원대로 추정되는 김씨 소유의 국내 재산을 가압류 하는 등 ‘플리바겐’(plea bargain : 수사에 도움을 주는 대가로 형을 면하거나 감해주는 것)을 시도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수사 대상이 주로 재벌과 정치권 양쪽에 걸쳐 있다 보니 압력성, 또는 청탁성 요구가 빈발하는 것도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당과 기업에서 직접 만나자고 요청하거나 전화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학교 선배나 지인들을 동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검찰의 수사가 SK에 그치지 않고 5대 그룹으로 확산되고, 그외의 기업들에 대해서도 ‘단서’가 있으면 수사를 한다는 방침이 정해지면서 기업들의 문의(?) 전화가 부쩍 늘어난 상태라고 한다. 불법 대선자금에 대해 검찰이 전면 수사를 천명하고 최정예 요원을 보강한 터라, 일단 수사에 숨통은 트였다. 그러나 정재계와 검찰의 ‘한판’ 승부가 예고돼 있어 중수부의 앞으로도 조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입력시간 : 2003-11-12 13:59
|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