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금 괴담] 괴담, 다음은 또 누구?


검찰-재계-정계 생존게임, 그룹 총수. 기업 아킬레스 고강도 압박
재계인사 사법처리 후 정치권 사정, 총선 앞두고 큰 폭 물갈이 꿈틀

때아닌 검풍(檢風) 한파에 기업들이 바짝 얼어붙었다. 늦은 밤까지 비상등을 켜가며 한기를 녹이고 있지만,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몰라 체감 한파는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특히 검찰이 11월 18일 LG 홈쇼핑을 전격 압수수색하고 그룹 총수에 대한 소환을 통보하자 재계는 “예상밖의 일”이라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검찰 수사가 단순히 불법 대선자금에 머물지 않고 기업 ‘비자금’을 파헤치는 식으로 진행되면서 검찰의 칼끝이 기업 총수를 직접 겨냥하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충격이 큰 만큼 재계와 검찰 주변에는 그 어느 때보다 검찰 수사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다. 한마디로 ‘비자금 괴담’이다.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불명확하지만, 그간의 검찰 수사에서 소문의 많은 부분이 사실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그냥 넘겨 버리기는 어렵다.


관련기업들 "묘안이 없네" 전전긍긍

최근 검찰 주변에 회자되는 괴담의 희생자는 A기업이다. 그룹 총수와 한나라당 핵심 인사인 H씨와 가까운 A기업은 대선 당시 한나라당에 100억원을, 민주당에는 대선을 전후해 250억원을 전달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청와대와 검찰로 닿는 라인을 총동원해 ‘총수 구하기’에 나섰다고 한다.

B그룹은 총수와 한나라당 중진 H씨가 동향이어서 그를 통해 100억원 이상의 대선자금을 지원한 것이 검찰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애기가 나왔다. 당연히 B기업은 연일 비상회의를 여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검찰에 주요 회계자료를 제출한 C그룹도 전전긍긍하기는 마찬가지다. 총수의 친척이 한나라당 중진인 데다 ‘대선 후’를 겨냥해 경기도 모처의 땅을 용도 변경해 생긴 수천억원의 수익금 중 100억원대의 자금을 모당에 건넨 것이 포착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총수를 중심으로 시내 모처에서 대책을 강구 중에 있다는 사실까지 입소문을 타고 있다.

다른 주요 기업들도 검찰 수사를 의식해 비자금 관련 자료를 없애고 최근에는 컴퓨터 일체를 교체하는 등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지만 검찰이 한발 앞서 조치를 취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안절부절하고 있다.

5대 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검찰이 기업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나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 놨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비자금보다도 이재용 상무 문제(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변칙 상속건)에 더 신경이 쓰여서 검찰이 요구하는 대로 협조했다”고 말했다. 이 상무는 이건희 회장의 장남.

현대자동차는 정의선 부사장 소유의 인터넷 벤처기업 주식을 그룹 차원서 매입한 것이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해 모든 것을 술술 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 부사장은 정몽구 회장의 아들. 현대자동차가 검찰 수사에 앞장서 협조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다는 게 재계 안팎의 해석이다.

롯데는 제2 롯데월드 추진 과정서 무리수를 둔 것이, 또 한화는 대한생명 인수과정에서 분식회계를 했다는 혐의가 약점으로 작용해 비자금의 단초가 될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검찰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비자금 괴담이 기승을 부리던 11월초. 주요 그룹의 고위 관계자 3명이 서울 모처에서 긴급 회동을 했다. 대검 중수부가 불법 대선 자금에 대한 전방위 수사를 천명하고, 이튿날 수사팀을 보강해 역대 최강의 ‘드림팀’을 만든 직후였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검찰과 기업 주변에 도는 비자금 수사 관련 소문들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대책 마련 방안을 강구했다. 한 참석자는 그러나 “대응 방안을 논의했지만 뚜렷한 묘안을 찾지 못했다”고 귀띔했다. 특히 “검찰이 (기업)총수를 겨냥하고 ‘약점’을 치고 들어 오면 대응이 어렵다”며 “(기업과 오너를 위해)누군가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업총수 XXX가 구속된다더라”, “A씨가 불구속 약속을 믿고 모든 걸 불었다더라”는 소문이 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지 모른다. 검찰 주변에서는 기업주를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카드의 하나로 검찰이 수사 진행 상황을 은밀히 흘리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으로 본다. 또 어떤 기업은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다른 기업의 비리나, 경쟁기업에 대한 정보를 ‘괴담’형식으로 전파하기도 한다.


정치권 물갈이 신호탄?

당분간 그룹 총수와 핵심 경영진에 대한 소환조사가 마무리되면 검찰의 사정은 정치권을 향할 것으로 보인다, SK비자금과 관련해서는 벌써부터 10여명의 정치권 인사들이 수사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중진인 HㆍCㆍK씨, 민주당의 중진인 HㆍKㆍYㆍJ씨 등 2000년 총선과 지난 대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다른 기업 비자금까지 검찰 수사가 확대 될 경우, 정치권 ‘물갈이’는 시간 문제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검찰의 기업 비자금에 대한 수사가 궁극적으로 자신들을 향할 것임을 알고 갖가지 방어막을 치고 있다. 야당의 한 중진 의원은 “노 대통령과 맞붙어 봐야 손해 보는 것은 이쪽”이라며 “특검이 어느 정도 효용을 발휘할 지 의문”이라고 말해 비자금 정국에서의 위기감을 나타냈다.

검찰은 재계와 정계가 불안해 하는 것과는 달리 “크리스마스쯤에는 반드시 휴가를 가겠다”며 정ㆍ재계에 대한 강도 높은 수사를 예고했다. 대검 중수부의 한 관계자는 “사실 수사의 중반은 넘었다. 장애물도 있었지만 고비는 넘긴 것 같다. 마무리를 잘 하는 게 문제”라고 말해 수사 종료가 멀지 않았음을 암시했다.

검풍의 단초가 된 지난 2월 SK 불법 분식회계 사건 당시만 해도 재계는 그 파장의 수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일반의 예상을 깨고 최태원 SK 회장이 사법처리 될 때만 해도 “운이 없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SK비자금 핵폭풍은 지난 8월 말, 금융감독원의 증권선물위원회가 SK해운의 2,000억원대의 분식 회계를 검찰에 고발하면서 재계와 정계를 엄습했다. 검찰이 SK해운의 분식 회계를 수사하던 중 의문의 뭉칫돈이 정치권으로 흘러간 단서를 포착한 것이다.

‘비자금 괴담’이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이 때부터. 실제로 손길승 SK그룹 회장을 소환 조사하는 과정에 한나라당이 대선 때 최돈웅 의원을 통해 SK로부터 10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원한 집사’라는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도 손 회장으로부터 11억원을 수수한 사실도 드러나 정가를 뒤숭숭하게 했다.

검찰의 SK비자금 수사는 더욱 빠른 속도로 진행됐고, 비자금 수사가 몰고올 파장을 누구보다 먼저 인지한 쪽은 정보와 인맥을 자랑하는 기업들이었다고 한다. 재계 주변에서는 모 기업이 검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구조조정본부장이 10월 말 시내 모처에서 사전 예비조사 형식으로 검찰 고위관계자를 만났고, 청와대 고위관계자와의 접촉도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또 LG홈쇼핑의 압수수색과 구본무 회장의 소환 조사 가능성을 두고, 재계 일각에서는 “LG 그룹이 소극적으로 수사에 협조했기 때문에 ‘괘씸죄’에 걸려 희생양이 됐다”고도 해석한다. 실제로 대검 중수부는 SK비자금 수사와 관련, 기업들에게 회계자료 제출 등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성과 현대자동차그룹 등과는 달리 LG그룹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SK비자금에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검찰 수사는 11월 10일 한국일보의 ‘민주당 노무현 후보 캠프측 대선자금 내역’ 특종 보도로 기업 전반으로 확대됐다. 5대 그룹을 포함한 주요 기업들이 대선 당시 계열사를 동원해 각 당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보도된 바, 실제 대선자금 내역에 따르면 삼성은 계열사인 블루텍ㆍ삼성벤처투자ㆍ크레듀 등을 통해 10억원을, LG는 LG전자ㆍLG마이크론ㆍLG엔시스 등 계열사가 20억원을, SK는 SK제약ㆍSK텔레시스ㆍSK임업 등 계열사를 통해 최대액수인 25억원의 대선 지원금을 건네는 등 5대 그룹이 계열사와 임직원 명의로 대선자금을 전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도는 다른 기업들도 SK와 같은 비자금 창구가 있다는 개연성을 높여줬고, 실제로 몇몇 주요 기업이 불법으로 자금을 전달한 단서가 포착돼 최고경영자(CEO)가 검찰에 소환 조사를 받았다.


"특검법 때문에 기업만 죽을 맛"

검찰이 주요 기업 총수들을 소환하면서 재계와 검찰주변에서 흘러다니는 수사 소문에 대한 단속에 들어갔다. 그 후 소위 증권가에 도는 ‘찌라시(풍문)’는 사라지고 비자금 괴담은 현저히 줄어 들었다. 그렇다고 수사가 중단되지 않는 한 소문이 완전히 騙沮?수는 없다.

검찰은 야3당이 통과시킨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법’을 의식해 더욱 수사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그래서 검찰 수사에 오른 기업들은 ‘특검법 때문에 기업만 더 죽게 됐다”, “검찰 수사의 뒤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문에 죽을 맛이다”며 볼멘 소리를 하고 있다.

검찰의 사정 칼날은 언제 어디쯤에서 멈출까? 정치권과 재계의 ‘생존게임’이 치열한 가운데 12월 크리스마스 이전에 ‘검풍’은 매듭 지워 질 것이라는 소식도 있다. 비자금 괴담도 함께 끝나리라는 관측이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3-11-25 17:44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