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아름다운 사람들] 이들이 있어 세상은 살 만했다


척박한 한 해였다. 정치권은 공방의 연속이었고, 경제는 침체의 수렁이었다. 대통령 측근 비리에서부터 대선자금 비리까지 신문 사회면도 온통 흉흉한 뉴스들로만 채워졌다.

허나 진흙 속에서 피는 꽃은 더욱 아름다운 법. 그들이 있었기에 냉랭한 바닥 안쪽에서 전해 오는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고,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구나"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2003년을 빛낸 아름다운 이들의 그 때, 그리고 지금을 돌아봤다.


꿈은 이제부터다
- 장애아들에게 희망을 심어준 충주 성심학교 야구팀

1루, 2루, 그리고 3루를 돌아 한 번만이라도 홈을 밟아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경기 시작 전, 괴성에 가까운 그들의 함성은 어쩌면 이런 염원을 이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0-3으로 끌려가던 4회 초. 4번 타자 장완근이 중견수 앞쪽에 떨어지는 깨끗한 중전 안타를 쳐냈다. 과감한 도루에 이은 상대 성남서고 투수의 폭투까지. 홈 베이스 하나만 더 밟으면 됐다. 다음 타자 박종민이 휘두른 타구는 투수 앞에 떨어졌다. 불안했다.

하지만 3루에 있던 장완근은 온 힘을 다해 홈으로 쇄도했고 베이스를 힘껏 밟았다. 전국 무대에서의 첫 득점은 그렇게 이뤄졌다. 1회전에서 1-10, 7회 콜드게임으로 패한 성심학교 야구팀은 8월에 열린 제32회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의 당당한 주인공이었다.

“청각 장애아들에게 스포츠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지난해 9월 야구팀을 결성했지만,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00㏈ 이하의 소리는 듣지 못하는 2급 농아자 선수들은 눈을 감고 있다면 바로 옆에서 고함을 쳐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아이들이었다.

타구 음을 듣지 못해 수비수들이 평범한 타구조차 놓치기 일쑤였고, 야구의 복잡한 전술을 수화로 전달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1점’의 의미는 그래서 남달랐다.

이후 그들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중ㆍ고교를 합쳐 17명에 불과했던 야구팀은 23명으로 늘어났다. 평소 야구에 관심이 없던 학생 몇몇이 야구부에 새롭게 가입하고, 인근 농아학교에서 야구를 하던 청각 장애학생 2명이 가세를 한 덕이었다. 주변의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프로야구 한화 송진우 선수가 1,200만원의 거금을 전달했고, 연말이 다가 오면서 각종 시상식 초대도 잇따랐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여론의 주목이 이제는 부담스럽습니다. 우리는 이벤트로 야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장애인들과 정정당당하게 겨뤄 이기는 야구를 하는 것이 진짜 목표입니다.” 성심학교 야구팀 창단을 주도했던 조일연(50) 교감은 여기에서 만족할 기세가 아니었다. ‘1점’에 대한 환호는 청각 장애아들의 노력에 대한 일종의 동정표였을 뿐, 진짜 승부에서는 처참히 패배한 것이 틀림 없었다.

요즘 성심학교 아이들의 목표는 분명하다. 내년 후반기, 늦어도 내후년에는 반드시 1승을 거두겠다는 것이다. 오전 4교시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오후 4시간, 그리고 저녁 2시간의 훈련. 지나치게 빠듯한 일정이지만 누가 뭐라지 않아도 스스로 훈련에 적극적이다. 내년 2월에는 1주일 가량 제주 전지 훈련도 계획중이다.

하지만 아직 현실의 벽은 높다.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야구를 접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그래서 평택에 있는 국립재활복지대학이 야구부 설립을 추진 중이라는 소식에 잔뜩 희망을 건다. “아이들이 대학에 가서도 야구를 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조 교감의 확신은 수많은 청각 장애인들, 나아가 모든 장애인들의 희망이기도 했다.

"이젠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 17년 전 체납 요금 완납한 '시대의 양심' 박무희씨

3월19일 오후. 한 백발의 촌로가 KT 충남본부 조치원지점 영업 창구에서 여직원과 작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래도 영수증이 있지 않습니까. 돈을 받아 주십시오.” “할아버님, 그냥 돌아가셔도 돼요. 이미 결손 처리됐어요.” 알듯 말듯한 낯선 풍경이었다. 사연인 즉, 이랬다.

무려 17년여 전인 1985년8월. 박무희(68ㆍ충북 연기군 전동면 보덕리)씨 집에 전화요금 청구서 4장이 날라왔다. 자신의 집을 신축하고 있던 건축업자에게 아내 명의의 전화를 빌려줬는데 업자가 계약금을 받은 뒤 도망을 간 것이었다. 이후 연체 통지서가 집으로 날라왔지만 사기를 당한 마당에 전화 요금을 물어줄 능력이 없었다. 체납 요금까지 무려 129만3,800원이었다.

영수증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있던 박씨는 늘 찜찜한 마음이었다. 더구나 59년부터 18년간 우체부로 체신 공무원 생활을 했던 그로서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체납한 전화 요금을 갚아야 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은 2~3년 전. 인근 농공단지에서 경비원 생활을 해 온 박씨는 얼마 되지 않은 월급에서 꼬박꼬박 일정 금액을 모았고, 결국 17년여만에 전화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체납 요금은 KT측이 이미 14년 전 결손 처리한 뒤였다. KT 직원들은 “이미 결손 처리한 요금을 받을 수 없다. 다른 곳에 유용하게 쓰시라”며 수납을 거부하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었다.

“요금을 받아주지 않으면 내가 마음이 편치 않다고 떼를 썼죠. 결국 KT측이 청구서를 재발급하고 돈을 받아 줍디다.” 그 후 8개월 가량이 지난 요즘, 박씨는 “이젠 정말 홀가분하게 두 발을 쭉 펴고 잠을 잘 수 있다”고 했다. 이후 KT 충남본부에서 박씨 부부를 초청해 금으로 된 행운의 열쇠와 여행권을 감사의 뜻으로 전달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마저도 받기를 거부했다.

“누가 사용했든 전화 요금을 체납한 것은 제 잘못인데 이를 갚았다고 선물까지 받는 것은 지나치잖아요. 그저 스스로 양심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이라고 치부했으면 좋겠습니다.” 양심을 잃어가고 있는 사회에 던지는 한 평범한 촌부의 메시지였다.


이젠 평화를 말할 수 있다
- 몸을 내던진 '인간 방패' 유은하씨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난다고 해도 해외로 몸을 피할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헌데 남의 나라 전장에 스스로 뛰어 들어 ‘인간 방패’를 자처한 이들이 있었다. 이라크 반전 평화팀의 일원이었던 배상현, 한상진, 그리고 유은하씨…. 특히 여성의 몸으로 무려 110일간 폭격과 약탈이 난무하는 이라크 현지에서 꿋꿋이 반전(反戰)을 외친 유은하(28)씨는 뭉클한 감동을 안겨 줬다.

유씨가 이라크 땅을 밟은 것은 3월6일. 처음부터 깊이 있는 고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화, 반전 등의 메시지는 정치인 등 명망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학생 때부터 기독교학생연합운동 등에서 일을 하면서 아랍권에 선교사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핍박 받는 나라, 분쟁의 나라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선교를 하고 싶었죠. 이라크에 가기를 자처한 것도 선교의 일환이었습니다.”

전장에서의 생활이 편하고 안전할 리 없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서 비행기가 폭파돼 추락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고, 총격과 약탈이 빈번한 거리를 지나기도 해야 했다. 유씨가 4월초 바그다드에서 국내에 보낸 이메일은 급박했던 현지 상황을 생생히 담고 있다.

“어젯밤에는 창문이 깨질 듯 쾅쾅 울리고 건물이 크게 진동하면서 전기가 확 나가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며칠간 시가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군에 의해 이곳도 점령되겠지요. 아마 이라크에서는 마지막 편지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

고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한 번쯤은 느껴봤을 법도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녀를 지탱해 준 힘은 신앙이었다. “힘들 때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면 지금 어디에 계실까 자문했어요. 분명히 고통 받는 이라크인들과 함께 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죠.”

8월초 귀국 후 유씨의 생각도 많이 성숙했다.

“단순한 선교를 넘어서 이제는 평화와 전쟁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경험을 쌓아야 겠다고, 또 더욱 책임 있게 살아가야 겠다고 다짐하게 됐어요.” 개인적인 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라크에서 보낸 편지들을 정성껏 재편집해 만든 책 ‘아이들에게 전쟁은 없다(가제)’가 곧 출간을 앞두고 있고,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에는 대학시절 만나 사랑을 싹 터온 연하의 ‘동지’와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평화는 거창한 것이 아니더군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리고 가정을 잘 이루는 것, 바로 그것이 평화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결혼은 이런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기는 첫걸음이었다.

이라크에서 한국인 사상자가 발생해 다시 파병 논란이 거세게 일자 요즘 유씨의 마음 또한 편치 않다. 바그다드 경험에서 나온 그녀의 의견은 이랬다. “이론적인 것은 잘 모르겠어요. 단지 확고한 생각은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다른 나라의 생명은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어떤 것도 생명과는 바꿀 수 없다는 확신이다. 그녀 자신은 생명을 담보로 삼으면서까지 전장에 뛰어들었으면서도.

"식구들이 더 늘었습니다"
- 복권 당첨금 1억 전액 기부 강도상씨

△ 강도상(왼쪽)씨가 자신이 돌보고 있는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있다.

“조금 잘못 알려졌어요. 아마 일반 복권이었다면 당첨금 전액을 기부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를 텐데….”

말하자면 양심선언 같은 것이었다. 한 모금 단체가 기금 마련을 위해 발행한 복권을 구입한 것이었고, 단 돈 몇 푼이라도 보태겠다는 생각으로 복권을 구입한 것이었으니 당첨금 역시 애초에 그들의 몫이었다는 얘기였다. 조금의 선행에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생색내고 싶어하는 속인(俗人)들과는 분명 달랐다.

2월 강씨는 우연히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발행하는 즉석식 엔젤 복권 ‘억마니’ 10장(1만원)을 인터넷에서 구입했다. 복권 구입액이 좋은 곳에 사용된다고 하기에. 무슨 사심이 있을 리 없었다. 1등 1억원. 처음엔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가 이 돈을 어떻게 쓸지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는 모금회가 추천하는 인근 장애시설 ‘사랑의 공동체 재활원’에 당첨금 전액을 기부했다.

사실 주변 사람들에게 그의 이런 행동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저능아였던 큰 형이 여러 번의 뇌수술 끝에 결국 목숨을 잃고, 80년대 초 동생이 대학생 시절 시위를 하다 뇌를 다치면서 정신질환을 앓게 된 이후 그는 장애인들을 위해 삶의 대부분을 바쳐 왔다. “초등학교 시절 정신병원 철창에 갇혀 있던 큰 형을 면회 갔는데 사람의 옷에 이가 그렇게 많은 것은 처음 봤습니다. 어린 나이에 장애인들에 대한 처우가 너무 형편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95년 부산의 뇌성마비복지회에 자신이 운영하는 제지 공장의 일부를 재활 치료 공간으로 제공한 것이 본격적인 장애 봉사 활동의 시작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공장이 부도 위기에 처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1억5,000만원을 들여 울산에 새로운 재활 공간을 마련해 줬고, 원장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후에는 오갈 데 없는 장애인 7명을 친구로부터 인수한 경남 의령의 유원지 쉼터관광농원으로 데려 왔다. 다시 문을 연 부산 제지공장에도 장애인과 미혼모 등 소외된 이들을 고용했다.

복권 당첨금을 전액 기부했다는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관광농원의 장애인 식구들은 더욱 늘었다. 여기저기서 “이 사람도 맡아줄 수 없겠느냐”는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 불과 9개월 새 늘어난 식구만도 20명. 관광농원에서 생기는 수익은 모두 이들의 생활비로 충당하고 있지만, 월 순수입이 500만원 남짓이어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헌데 최근 또 하나의 어려움이 생겼다. 관광농원으로 허가를 받은 곳에 장애인 재활 시설을 둘 수 없다는 지자체의 유권해석이 내려졌기 때문. 의령군은 최근 청문회를 연 뒤 15일간의 영업 정지를 내리겠다고 통보한 상태다. 그의 마음은 답답하다.

“법이 그렇다는 것은 알겠지만 무슨 죽을 죄를 진 것도 아니고 장애인을 데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업정지를 명령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렇다면 갈 곳 없는 이들을 그대로 내치라는 말입니까.” 법보다 사람이 우선한다고 믿는 그에게, 사회는 냉혹하게도 법만을 들이대고 있었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 2003-12-10 16:15


이영태기자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