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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 2003] 트렌드로 본 세상풍경
삼팔선에 충격먹고 누드 곁눈질하며 로또로 꿈에 젖다 강남에 절망하다
현실 풍자한 가상문화에 카타르시스도


연초부터 몰아친 인생 역전을 꿈꾸는 로또 광풍과 상업성으로 물든 누드 열풍은 2003년 파격의 시작이었다. 한창 일할 나이인 30대가 ‘삼팔선’ 고개를 넘지 못하고 거리로 쫓겨났고, 강남 부동산 가격 폭등 속에 상대적 박탈감에 젖은 서민들에게 서울 강남은 공공의 적이 돼 버렸다.

가상 공간 속 네티즌들은 이런 현실을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그들만의 문화를 창조해 나가며 현실 공간을 주도했다. 사회 현상으로 본 ‘파격 2003’을 정리해 봤다.


눈물의 '삼팔선' 고개







평생 직장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도 수백명, 아니 수천명 씩 거리로 내몰렸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당시의 기억이 그리 멀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40대 중반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오륙도’(56세까지 회사에 남아 있으면 도둑)니 ‘사오정’(45세 정년)이니 하는 얘기들은 20, 30대 혈기왕성한 직장인들에게는 먼 훗날의 일일 뿐이었다.

불황의 골이 유난히 깊었던 2003년은 그런 기대를 무참히 짓밟았다. 6년 만에 다시 찾아온 구조조정 한파는 40, 50대는 물론이고 30대 직장인들까지 거리로 내몰기 시작했다.

한국투신증권의 올 상반기 퇴직자 144명 중 40%에 육박하는 54명이 30대 직원들이었고, 하반기에 사상 최대 규모(5,505명)의 명예퇴직을 단행한 KT에서도 무려 532명의 30대 명퇴자들이 양산됐다. 10월말 30대 실업자가 19만6,000명으로 30개월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통계는 더 이상 30대 조기 퇴직이 어느 한 두 기업의 얘기가 아님을 보여줬다.

한 취업 포털 사이트는 직장인들에게 체감 정년이 몇 살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전체 평균 36.5세, 그리고 남성 직장인들의 경우 38.1세였다. 불혹도 지나기 전인 38세 쯤이 되면 명퇴를 선택해야 한다는, 혹은 명퇴를 선선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오륙도’ ‘사오정’을 넘어 ‘삼팔선’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조기 퇴직을 종용 받는 2003년 힘 없는 직장인들의 가슴 아픈 현실의 투영이다. 남아 있는 직장인들은 언제 쫓겨날 지 모를 불안감에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다.

삼팔선을 넘어 서지 못하고 거리로 내몰린 이들은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외환 위기 당시 40, 50대 명퇴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포자기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이제 고작 사회 생활 10년 안팎이고, 아직 아이들은 열 살 남짓이다. “아직 우린 젊기에, 괜찮은 미래가 있기에….”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컴백홈’의 가사를 읊조리며 창업으로, 전직으로, 혹은 이민으로 또 다른 삶을 준비하고 있다. 냉혹한 사회는 여전히 그들을 외면하고 있지만.


더 보여줄 것이 없다면 벗어라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이분법적 논란은 너무 진부하다. 어떤 것이든 그들에겐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누드는 그들이 보여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모습일 뿐. 자신의 상품 가치를 극대화할 수만 있다면 수치심 따위에 벗지 못할 이유는 없다.

“젊은 날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서”라는 그럴듯한 구실도 있다. 2003년 연예인 누드 열풍은 그렇게 거세게 몰아쳤다. 어느 누가 옷을 벗는다 해도 파격이 아닌 사회 현실이 오히려 파격적이었다.

지난해 말 인터넷 유료 사이트를 통해 선보인 탤런트 성현아의 전라 누드는 올해 누드 열풍을 잇는 징검다리였다. 10억원의 거금을 투자한 성현아의 누드가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사전 유출?인해 적자를 면치 못한 반면, 바통을 이어 받은 배우 권민중의 누드는 접속수가 500만 건에 달하며 70억원 이상의 수익을 올리는 ‘대박’을 터뜨렸다.

단순한 가능성을 넘어 누드가 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연예인들의 옷 벗기는 줄을 이었다. 다리의 각선미가 뛰어나다는 가수 겸 탤런트 이혜영, 한 때 섹시 가수의 대명사였던 김완선, 농염한 이미지의 고소영, 그리고 최근의 이지현, 함소원까지. 남자 연예인들도 누드 열풍에 동참했다. 그룹 신화와 핸드볼 국가대표 최현호,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김동성 등은 울퉁불퉁한 근육을 뽐내며 남성의 누드도 상품화할 수 있음을 과시했다.

2003년의 누드 열풍에 대해 엄숙주의에 대한 도발이라든지, 관음적 이중성을 벗어 던졌다든지 하는 고상한 평가는 격에 맞지 않는 듯하다. “남자 친구까지 허락했다”는 당당한 자기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누드는 ‘OOO가 벗는다’는 화제성에 철저히 기댔다.

만삭의 누드를 선보인 데미 무어는 모성의 아름다움을 외치는 데 성공했고, 근육질 몸매를 드러낸 마돈나는 여성성에 대한 통념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그렇다면 올해 우리나라의 숱한 누드 스타들은 그들의 벗은 몸을 통해 대중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를 좀 주목해 달라”고, “돈 좀 벌게 해 달라”고 외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로또에 웃고 울었다



814만분의 1. 벼락에 맞을 확률보다도 낮다고 했지만, 이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1등에 당첨된 이들이 1년간 200명을 넘었다. 광풍(狂風)이라고 표현했듯 로또 복권에 대한 열기는 그만큼 뜨거웠다.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서 로또가 1년 내내 줄곧 1위 자리를 고수했다.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것은 10회차 추첨을 앞둔 2월 초였다. 3주간이나 1등 당첨금이 이월되면서 1등 당첨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전국 로또 판매점은 대박의 꿈을 좇는 이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1주일간 판매액은 아직도 넘어서지 못한 2,608억원. 1등 당첨금도 당초 예상치인 700억원을 훨씬 넘어 836억원까지 치솟았다.

결과는 허탈했다. 무려 13명의 공동 1등이 나오면서 당첨금은 64억원 씩으로 쪼개졌고, 1,000만명이 넘는 로또 구매자들은 광풍의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카드 대출금을, 또 전셋값을 몽땅 로또에 쏟아 부었다 낭패를 봤다는 얘기도 속속 전해졌다.

당첨금 이월회수가 5회에서 2회로 줄어들면서 이후 열기가 다소 진정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로또는 인생 역전을 노리는 서민들의 꿈과 희망이었다.

4월 19회차에서 한 경찰관은 사상 최고액인 407억원의 돈벼락을 맞기도 했고, 로또 당첨 확률을 높여준다는 책이나 소프트웨어 혹은 운세풀이가 히트 상품으로 각광 받기도 했다. 그렇게 1년 동안 국민들은 무려 3조6,000억원을 로또에 쏟아 부었다. 국민 전체가 도박꾼으로 전락한다는 비판도 그저 딴죽 걸기에 불과했다.

하루 아침에 돈 방석에 앉은 이들은 혹시 신원이 노출될까 전전긍긍하며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도, 또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서민들의 동경은 그치지 않는다. 불황의 그늘 속에 허전한 연말이어서 그런지 더더욱. 그리고는 결의에 찬 모습으로 45개의 번호 중 6개를 맞추는 무모한 확률 게임에 다시 몰두한다.


선망이 적대감으로, 공공의 적 강남 특구






부자 동네의 대명사인 서울 강남이 선망의 대상에서 적대감의 표적이 된 한 해였다. 연초부터 강남은 온갖 흉악 범죄의 온상이었다. 밤늦게 귀가하는 강남 부녀자들을 승용차로 납치한 뒤 금품을 뺏고 성폭행을 일삼는 떼강도단에 의한 연쇄 강도ㆍ강간 사건이 10여차례 연달아 발생해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귀가 길 아이들을 유괴한 뒤 금품을 요구하는 사건도 줄을 이었다.

폭파 협박도 잇따랐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가 없다.” “밤 골목이 무섭다.” “강남에 살기가 겁난다.” 주민들의 원성은 빗발쳤고, 골목길 폐쇄회로TV 설치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적개심의 진원지는 갈수록 커져 가는 비강남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었다. ‘10ㆍ29 부동산 대책’이 나오기 전까지 1년 내내 재건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강남 부동산 가격은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거듭했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1,000만~2,000만원씩 뛰었고, 1주일 새 1억원 이상 가격이 상승하기도 했다. 서민들은 1년 365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도 손에 쥘 수 없는 돈이었다.

강남 특구 주민들은 샤넬, 루이뷔통 등 명품으로 휘감는 것도 부족해 1년 치 물값이 1,500만원이 넘는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시가 6억원 짜리 강남 30평형대 아파트보다 시가 3억원 안팎의 강북 40평형대 아파트가 3~4배 많은 세금을 물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강남 주민들도 할 말은 있었다. “몇몇 부유층의 호화로운 생활 때문에 강남 주민 모두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평생 모은 돈으로 겨우 집 한 채 가지고 아등바등 살고 있는데 공공의 적으로 취급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아파트 값 폭등도, 강남 주민들에 대한 살의에 찬 적대감도, 또 “우리도 서민”이라는 일부 강남 주민의 항변도 모두 비정상적이었다.


가상 문화가 현실을 조롱하다



‘얼愛㉲?B네욥, 뎌 강㉵쥐 社뜨?D.’ 호환이 되지 않는 워드프로세서로 문서를 읽어 들인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헌데 이것도 엄연히 의미가 있는 언어다. 이 괴상한 표현을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오랜만이네요, 저 강아지 샀어요”란다. 그들은 이 를 ‘외계어’라고 부른다.

기호의 조합으로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이나 ‘안냐세요(안녕하세요)’ ‘방가 방가(반가워 반가워)’ 등 축약형 표기에 기성 세대들도 어느 정도 적응을 하는가 싶었더니, 올해는 언어 파괴가 한층 더 진전된 외계어가 가상 공간을 지배했다.

단어를 한자나 외국어로 쓰고 음으로 읽거나 특수 문자 등을 활용해 새로운 상형 문자를 만드는가 하면, 맞춤법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기성 세대는 도저히 해독이 불가능하다.

“인터넷 공간의 주도층인 10대들이 가상 공간에서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해 보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긍정적 해석의 반대 편에는, “국어 교육을 경시하는 풍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재미 추구 이상의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네티즌들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은 인터넷 소설이 오프라인 공간을 침투한 것도 주목할 만했다. 자유분방한 문법의 인터넷 소설은 서점가와 영화계를 강타하며 기성 문학과 영화를 마음껏 비웃었다. ‘그 놈은 멋있었다’ ‘내 사랑 싸가지’ 등의 인터넷 작가 귀여니(18ㆍ본명 이윤세)는 최고 스타로 각광을 받았다.

시청률 면에서는 그저 그런 평범한 성적을 냈던 퓨전 사극 드라마 ‘다모’가 올해 최고의 화제작으로 주목받은 것도 가상 공간의 힘이었다. 다모를 지지하는 네티즌들은 스스로를 ‘다모 폐인’이라 지칭하며 인터넷 게시판에 100만건이 넘는 글을 올리는 위력을 과시했다.

명품만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한 냉소가 담겨있는 패러디 명품 ‘디디바오’, 대선자금 수사를 풍자한 패러디 무협극화물 ‘대선자객’ 등 현실을 조롱하는 풍자는 우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카타르시스였다. 가상 공간이 현실 공간을 압도한 한 해였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 2003-12-18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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