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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문화주류] 4050세대, 추억의 긴 잠에서 깨어나다
낭만의 시대를 산 중년들, 문화 소비의 주체로 새롭게 부상

“32년을 숨겨온 진실… 이제는 말한다!”

지난해 말 영화 ‘실미도’가 중년 관객들을 향해 함축적인 이 메시지를 던졌을 때 우리 문화계는 이미 과거로 향한 혁명을 기꺼이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70,80년대 격동의 세월을 지나온 중년들이 당시 ‘카더라’ 통신을 통해 어슴푸레 엿들었던 역사의 진실을 영화에서 확인하려고 했고, 국가란 이름 아래 짓눌렸던 자유와 낭만을 떠올렸을 때 말이다. 그 암흑의 시간을 함께 했다는 동질감으로 극장으로 발길을 돌린 세대에게 영화는 과거로의 여행이나 다름없다.

최근 영화판을 뒤흔들고 있는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관객 폭발 뒤에는 4050세대의 힘이 숨어 있다. 암흑의 시대를 거친 뒤 우리 문화계에서 ‘슬리핑 그룹’(Sleeping Group)으로 일컬어졌던 4050세대가 이제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 중년의 거침없는 문화적 욕구 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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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7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 앞. 영화 ‘실미도’가 끝나고 삼삼오오 쏟아져 나오는 젊은 인파들 사이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동갑내기 부부 박길택(53ㆍ개인사업)씨와 김순자씨가 섞여 있었다. “감추고 싶었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보며 감동과 분노, 비애가 어우러진 눈물이 흘렀습니다.” 박씨는 스스로 실미도 부대원들의 정신적인 동지라고 소개한 뒤 “실미도 부대원들이 역사의 질곡 속에서 발버둥쳤던 세상은 바로 우리가 가정을 일구고 기반을 닦은 이곳이 아니겠느냐”며 “이 땅에 살아남은 동지로서 영화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실미도의 정신적 동지는 박씨 부부만이 아니다. 영화 예매사이트 맥스무비의 연령별 분석에 따르면 영화 실미도는 40대 관객층의 평균 예매율 4%보다 월등히 높은 12%에 이르렀다. 40대 이상이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 극장을 찾은 40대 이상 중년 관객은 족히 30%를 넘어설 것으로 영화계는 분석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결속감은 그토록 끈끈한 것일까. 한물간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들이 줄줄이 대박 행렬에 들어섰다.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태극기 휘날리며’, 70년대 후반 고교생 폭력문화를 다룬 ‘말죽거리 잔혹사’는 과거의 추억을 무기로 중년의 문화 상품 목록에 최우선 순위에 올라섰다.

“젊은 관객들을 위한 가벼운 코미디나 말랑말랑한 멜로 영화만 쏟아졌던 것이 기존 영화계의 실상입니다. 비슷비슷한 젊은 취향의 영화에 등을 돌렸던 중년 관객들은 오랜만에 등장한 묵직한 자신들의 얘기에 후한 점수를 줄 수 밖에 없습니다.” 실미도 공동제작자인 한맥영화의 김형준 대표가 밝히는 중년 영화의 힘이다. 그 동안 영화관에 가기를 쑥스러워 했던 중년들이 극장 나들이에 나선 심정을 그 말 속에서 헤아릴 수 있다.



중년 문화의 힘은 영화계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실미도를 필두로 암울했던 과거를 배경으로 한 복고풍 영화가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는 사이,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스웨덴 그룹 아바(ABBA)의 옛 노래로 만든 뮤지컬 ‘맘마미아’(4월 18일까지)가 공연계를 뒤흔들고 있다.

1월25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막을 올린 ‘맘마미아’는 전체 관람객 중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40,50대 중년들의 전폭적인 참여로 공연 한 달만에 10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염을 토했다. 또 서울 회현동 팝콘홀에서 공연 중인 창작뮤지컬 ‘와이키키 브라더스’(3월 14일까지)도 고단한 세월을 지나온 중년들이 잔잔한 시선으로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설정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전체 관람객 중 30대 이상 중장년 관객이 60%이다.

뮤지컬 ‘맘마미아’를 기획한 신시뮤지컬컴퍼니의 박명성 사장은 “젊은 관객을 사로잡기 위해 화려한 볼거리에만 정성을 쏟았던 기존 뮤지컬의 흐름은 이제 중장년이 공감할 만한 탄탄한 스토리와 그들의 심금을 울리는 향수 어린 음악 중심으로 옮겨갔다”며 “‘중년관객을 겨냥한 뮤지컬은 망한다’는 기존 관념은 이제 깨졌다”고 자신했다.

“주부 계모임 부대나 그간 공연장에 한 번도 오지 않았던 중년 부부들의 동반 관람이 대거 이루어진 것은 옛날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죠. 외식 한 번 하는 돈으로 뮤지컬을 관람하는 분위기가 새롭게 싹튼 거죠. 중년들의 뮤지컬 관람이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일상적인 문화생활의 일부로 정착될 가능성을 예고한 셈입니다.”

- 문화=삶 등식 정립



버거운 일상에서 문화생활을 어쩌다 한번 접하는 특별한 선물로 여겼던 중년 세대들이 ‘문화=삶’ 이라는 등식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한 변화다. 힘 있는 새로운 문화세대의 대두이기 때문이다. 10,20대 젊은이들의 성역처럼 여겨졌던 대중 가요계에서도 중년을 위한 추억의 노래 무대가 등장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지난 설날 연휴에 방송된 KBS 1TV 열린 음악회 ‘7080 추억의 그룹사운드’ 편은 옥슨 80의 ‘불놀이야’,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등 추억이 담긴 노래로 중년의 팬들을 열광케 했다. 또 10,20세대의 열렬한 환호를 받는 신세대 가수 이수영도 선배 가수 심수봉의 ‘그 때 그 사람’, 양희은의 ‘사랑 그 쓸씀함에 대하여’, 배인숙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등 70~90년대의 히트곡 11곡을 담은 리메이크 음반 ‘CLASSIC’(서울 음반)을 냈다. 4050세대가 추억에 덧칠한 이수영의 젊은 감수성에 환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중년의 문화 찾기가 최근 한계에 다다른 10,20대 중심의 문화시장을 보다 넓혀 불황을 타개하려는 문화계 마케팅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수영의 소속사인 이가기획의 이한우 기획실장은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는 음반업계에서는 과거 10,20대이던 핵심 공략층을 20~40대로 넓히고 있다”며 “10대가 모바일 등 다운로드 문화에 익숙하고 중장년층이 음반의 실구매자로 떠오르자 핵심 고객이 더 높은 연령층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4050세대의 문화혁명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좀체 문화생활을 위해 지갑을 열지 않았던 중년의 변화에 대해 문화평론가 김동식씨는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여태껏 문화에서 소외되어 쌓아온 응축된 욕망이 최근의 복고 열기에 실려 분출되고 있는 것 같다. 즐거움을 쫓는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뒤돌아볼 수 있는 실존적 경험을 반추하는 것이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


입력시간 : 2004-03-02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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