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정치적 카드 남발, 野 탄핵 자충수"총선 승부수" "거대야당의 오만" 양비론

[탄핵 그리고 총선] 혼돈의 룰렛게임
盧정치적 카드 남발, 野 탄핵 자충수
"총선 승부수" "거대야당의 오만" 양비론


탄핵(彈劾)에서의 ‘탄(彈)’은 ‘총알’을 의미한다. 지난 12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는 날, 수많은 국민이 ‘탄’을 맞았다. 노무현 대통령과 야당이 벌인 ‘러시안 룰렛’ 게임에서 쓰러진 노 대통령 너머로 국민의 신음소리가 흘렀다. 가슴을 꿰뚫은 ‘탄’이 남긴 흔적이었다.

국민은 원치 않는 국회 활극을 보며 꾹꾹 참았으나 예상치 못한 유탄을 맞고 말았다. 대통령이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하는 순간, ‘러시안 룰렛 게임’ 관전을 포기하고 환불받고 싶었지만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뒤였다. 노 대통령은 바로 전날 기자회견에서 모든 국민을 향해 ‘룰렛 게임’초대장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총선 결과를 존중해서 총선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뜻을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상응하는 정치적 결단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재신임을 총선과 연계시키겠다는 노 대통령의 폭탄선언이었다. 대통령의 부적절한 선거 관련 발언에 대한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으로 기대했던 국민은 뒤통수를 얻어맞았고, 얼떨결에 ‘국회 활극’의 피해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 국회 활극, 21세기 갑신정변

국민의 가슴에 남겨진 ‘피살의 추억’은 또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SK로부터 불법자금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자 불쑥 ‘재신임’ 카드를 꺼냈다. “수사가 끝나면 그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이 문제를 포함해 그 동안에 축적된 여러 가지 국민들의 불신에 대해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다. 야당은 노 대통령의 재신임 언급에 쾌재를 부르며 국민투표를 요구했고, 불안한 국민은 노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었다. ‘재신임’ 카드를 꺼낸 지 이틀 만에 ‘재신임’ 지지율이 ‘불신임’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정가에서는 노 대통령의 ‘재신임’ 카드를 놓고 ‘무모한 대도박’ ‘승부사 기질’등 상반된 해석이 난무했다. 전자는 “정국을 반전시키기 위한 쇼”라는 비난과 “‘대통령직 못 해 먹겠다’의 실행 버전 같다”는 비아냥으로 흘렀고, 후자는 “노무현 다운 도덕적 결벽증” “집권층의 무너진 도덕성을 바로 세우고 한국정치를 구하기 위한 ‘고독한 결단’”이란 칭송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5개월만에 다시 꺼낸 ‘재신임’ 카드는 결과적으로 엄청난 결과를 불러왔다. 두번의 재신임 카드는 5개월여의 시간 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관된 노 대통령의 노림수가 숨겨져 있었다는 지적을 정치권 안팎에서 받고 있다. 바로 4ㆍ15 총선 승리다. 지난해 10월의 재신임 카드가 친노 신당(열린우리당)의 동력을 강화하고 노 대통령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준 것이라면, 11일의 재신임 카드는 5개월간 준비해온 역량을 모두 4ㆍ15 총선에 쏟아 붇는 ‘올인(all-in)’ 승부를 선언했다는 해석이다.

첫 재신임 카드는 민주당 분당에 따른 후유증으로 친노 신당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총선 승리의 전망도 그리 크지 않을 때 나왔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의 확실한 표밭이었던 호남권의 외면이 신당 창당에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할 때였다. 그러나 재신임 카드가 나오자 상황은 일변했다. 민주당 잔류와 탈당 사이를 고민하던 정대철 전 대표가 노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다음날인 10월 14일 신당 동참을 선언했고, 민주당 전국구 의원 6명의 탈당이 잇따랐다. 호남 유권자들은 전국 평균치를 훨씬 웃도는 70% 안팎의 '재신임' 찬성 의견을 보여 일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노 대통령의 재신임 이면에 총선을 '한나라 대 신당'구도로 재편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는 의혹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민주당 부설 국가전략연구소는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의 성격을 Δ측근들의 비리를 덮기 위한 술수 Δ통치 위기에 대한 대국민 자백 Δ신당 띄우기 총선 전략 등 3가지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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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재신임 카드는 총선을 불과 한달여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나왔다. 재작년 대선 직후 민주당 연찬회에서 “총선에서 이기지 못하면 ‘반통령(半統領)’이다. 꼭 이겨야 한다”고 독려한 노 대통령은 대선 승리 1주년을 맞아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의도의 ‘노사모’ 집회 ‘리멤버 1219’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대선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승복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며 4월 총선을 위한 ‘시민혁명’을 강조했다.

- 계산된 혼란? 성공한 게임?

정가 일각에서는 뜻밖의 탄핵정국 조성이 총선을 앞두고 노 대통령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된 결과가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야당과 타협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고, 여론이 기대한 대로 ‘사과’를 통해 탄핵정국을 예방할 수 있었으나 강경 기조를 그대로 밀고 나간데 대한 의문이다. 탄핵 발의후 정동영 우리당 의장과 박관용 국회의장이 노 대통령에게 4자회담을 제의했으나 거부당했다는 이야기도 정치권 주변에서는 흘러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의 ‘소신’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정치 전문가들은 ‘설마 탄핵이야 되겠느냐’ ‘탄핵이 그렇게 쉽게 이뤄지겠느냐’는 노 대통령의 안일한 판단이 탄핵을 부른 것으로 보고 있다. 노 대통령을 10년 가까이 보좌해온 한 386 참모는 “대통령을 잘 모르면서 공학적으로 접근하면 굴절된 견해가 나오기 쉽다. 대통령은 형식과 눈치에 연연하지 않는다. 원칙이 있으면 좌고우면 하지 않고 가는 게 노 대통령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11일의 기자회견과 그 이후의 대응은 노 대통령의 스타일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뜻이다. YS 주도의 3당 합당에 반대하고 통합민주당 간판으로 1992년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나 2000년 총선에서 비교적 수월한 서울 종로를 포기하고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해 패배한 것이 그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설사 그렇더라도 결과적으로 탄핵이후 우리당 지지율이 급등하면서 노 대통령에게 유리한 총선 국면이 형성되자 반노 진영에서는 대통령의 탄핵 유도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일부 여론 전문가들도 “그간의 흐름과 결과를 놓고 보면 노 대통령이 탄핵이란 파국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방치한 의혹을 살만하다”며 그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다.

최근 각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듯 탄핵 가결 이후 총선 지형은 우리당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의도했든, 아니든 11일의 기자회견에서 던진 재신임 카드는 상당한 효력을 발휘해 우리당의 총선 제1당 가능성을 높여준 것이다.

하지만 파국의 위기를 불러온 두차례의 ‘재신임’카드에는 종래의 ‘노무현 다운’순수한 승부사 기질이 퇴색했다는 지적이 많다. 국민은 재신임 카드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불안한 룰렛게임에 불려나가는 것도 모두 원치 않고 있다. 그가 이제는 대권을 노리는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의 안위를 보위하는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4-03-16 22:15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