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 새로 쓰며 원내 제3당으로 부상거대 여야 '민노당 배우기'에 나서

[민노당 쇼크] 정치권 개혁경쟁의 기폭제, 17대 국회 '태풍의 눈'
헌정사 새로 쓰며 원내 제3당으로 부상
거대 여야 '민노당 배우기'에 나서


김두관 전 행자부장관의 친동생인 김두수씨는 4월 15일 두 가지 ‘ 충격’을 경험했다. 하나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경기 고양일산을)해 한나라당 김영선 의원에게 아깝게 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다.

김씨는 1986년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인천제철의 용접공으로 노동운동을 시작, 2000년 초까지 현장과 정치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김씨는 민주노동당의 당명과 노선 문제로 갈등을 겪다 온건한 시민운동(참여연대 시민감시국 국장 등)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김씨가 결별한 지 4년만에 제 3당으로 당당히 원내 진입했다. 그 속도와 폭은 김씨에게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정치사에 획을 긋는 ‘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회 입법정보연구관인 서복경 박사는 지난 4월 17일 한국정치연구회가 주최한 ‘ 총선 평가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서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입함으로써 한국의 정당 시스템 자체가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지적했다. 비록 10석의 미니 정당이지만 기존 정당의 정치적 포지션과 의제(아젠다)를 교체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의미다.

- 기존 정치시스템과 관행에 도전장

민주노동당과 유사한 독일 녹색당의 경우 1983년 5.4%의 의석으로 원내에 진출했을 때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기존 정당들은 독일 의회의 문화, 의정 활동의 방식, 새로운 의제의 등장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도전을 받아야만 했고, 결국 의회 문화와 정당 시스템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민주노동당은 ‘ 의원 특권 폐지 운동’ 등 이미 거대 여야에 녹색당식 도전장을 냈다. 의정 활동 방식과 새로운 의제와 관련해서도 선점 역량과 적극성을 보여 줘 기존 정당의 고착화된 정치 시스템을 흔들어 놓았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 민주노동당 배우기’에 나선 것은 그러한 방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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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1일, 열린우리당의 ‘ 일하는 국회 준비위원회’ 회의에서는 민주노동당의 실재성이 뚜렷이 부각됐다. 중진인 이해찬 의원은 “ 민주노동당의 ?빠른 행보에 배울 것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과반이 넘는 여당이기 때문에 국민을 의식해 행동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임채정 의원은 한편 “17대 국회는 민주노동당의 등장으로 각 당이 정책을 놓고 정체성의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은 문제를 자유롭게 제기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 문제의 제기에 그치지 않고 해결점과 실천방안, 그것이 미칠 영향까지 곰곰이 따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며 민주노동당의 등장에 따른 여당의 ‘긴장’과 ‘고민’을 나타냈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벌어진 당 정체성 논란과 봇물처럼 쏟아진 각종 정책ㆍ개혁입법들도 같은 맥락이다. 열린우리당은 지난 4월26~28일까지 강원도에서 가진 당선자 워크숍에서 진보 정당의 원내 진입에 따라 당 정체성을 놓고 소장ㆍ개혁파와 당권파ㆍ중진들 간에 격론을 벌였다. 그 결과 ‘ 개혁적 실용주의’ 노선이 채택됐지만 상당수 당선자들은 ‘ 이념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불만을 털어 놨다. 정가 일각에서는 열린우리당이 ‘ 잡탕 정당’ 이라 불릴 만큼 당선자들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다양해 총선전에 불거졌던 ‘분당론’이 재발할 경우 노선 투쟁이 격화되고 상황에 따라 분당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 민주노동당은 좌파정당으로, 지지기반 확충이나 정책을 놓고 열린우리당의 일정 세력에게 노선 투쟁의 동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 정체성 논쟁에 불 당겨

개혁입법과 관련, 열린우리당은 정당법, 친일반민족청산법, 의원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 법률 제한, 국회 복수상임위제 추진, 공무원 노조허용 등을 내놓은 상태다. 한나라당 역시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이념과 정책정당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 한 핵심 당직자는 “ 한나라당은 ‘ 수적 우위’도 없고 ‘ 정권도 없는 야당’으로 ‘ 정책정당화’만이 살길”이라며 “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입성한 이상 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소장파 핵심인 원희룡 의원은 “ 민노당의 국회 진출은 한나라당이 수구보수로 몰릴 수 있는 위기인 동시에 중도보수로 나설 기회도 된다”며 “ 과거의 대결 구도가 아닌 정책 정당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당내 보수 세력은 “ 왼쪽으로 가는 것은 우리당의 포퓰리즘을 따르는 행태”(송영선 당선자), “안보와 이념에서 열린우리당보다 우측에 있어야 지지도 받을 수 있다”(김용갑 의원) 등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결국 한나라당은 당선자 연찬회를 통해 북한에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등 ‘개혁적 중도보수’로 노선을 정했지만, 내부적 입장차는 여전하고 정책에 대한 시각차도 상당하다.

정치권에 ‘개혁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자극제가 됐다. 열린우리당은 ‘국회개혁추진단’을 비롯한 4개 분과를 거느린 ‘일하는 국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집권여당으로서 ‘국가적 과제’들을 추진할 밑그림을 그리고 있고, 신설된 ‘새정치실천위원회’(위원장 신기남 의원)에서는 17대 국회에서 처리할 정치개혁 방안 전반을 다룰 예정이다.

한나라당은 정책위 산하에 ‘정책개발특별위원회와 공약점검단’을 구성하고 17대 국회를 정책국회, 민생 국회로 이끌어나가기 위한 정책 아젠다 발굴에 전념하고 있다. 또한 당의 3대 정책목표로 △경제살리기 △국민고통 최소화 △국민의 먹고 사는 문제 해결로 설정하고, 여의도연구소에 국고보조금의 30~40%를 투입해 정책 기능을 크게 높이기로 했다.

- 정치적 이슈 선점으로 거대여야 압박

민주노동당도 양당의 움직임에 대응해 제 2의 ‘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를 구성, 정치자금법, 선거법, 정당법 등 정치관계 3법을 전면적으로 손질해 17대 국회 초반에 입법을 추진하고 정치개혁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또한 총선 이후 ᇫ국회의원 특권 폐지 ᇫ이라크 파병 철회 ᇫ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해소 등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설정, 여야를 압박하는 등 정치적 이슈를 선점해 거대 여야의 틈바구니에서 당의 정치적 위상을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어떤 형태로든 민주노동당의 주장에 대해 입장을 밝혀야 할 처지인 만큼 여론에 따른 부담을 의식, 난감해 하고 있다.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로 기존 정당 시스템에 변화가 불가피하지만 민주노동당에도 고민은 있다. 현실적으로 정치의 주도권이 거대 여야에 있는데다 10석의 소수 정당으로 양당의 협조 없이는 법률안 하나도 통과시키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첫 금배지를 단 심상정 당선자와 85년 창립된 서울노동운동연합에서 함께 활동했던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은 “ 민주노동당이 제도권으로 들어온 이상 좌파적 투쟁으로는 당의 정책이나 법안을 현실화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 현실 정치와의 접목여부 등 시험대에

민주노동당은 내부적으로 노동자, 농민, 서민 등 다양한 계층의 주체가 혼재, 이들을 통합ㆍ대변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독일 녹색당이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와 기존 정당과의 공조를 강조한 현실주의자 간의 갈등으로 91년 총선에서 단 한석도 얻지 못한 경험은 민주노동당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열린우리당의 유시민 의원이 “ 민주노동당을 ‘ 진보’만으로 묶기엔 복잡한 부분이 있다”며 “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것도 잠재적 갈등을 적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ㆍ15 총선은 진보정당이 43년만에 원내에 진출하는 신기원을 이뤘다. 민주노동당이 ‘ 장밋빛 미래’의 꿈을 이룰 지 아니면 ‘ 잿빛 추락’으로 사라질 지, 17대 국회는 냉정한 시험의 무대가 될 것이다.

민노당 회의문건, '총선 이후 정세 전망과 대응 방향'
   
- "공세적 이슈 선점으로 원내 위상 강화해야"

진보의 깃발을 앞세워 원내에 진입한 민주노동당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일단 소수 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원내 위상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혔다. 본지가 4월 29일 입수한 ‘ 민주노동당 제7차 전국집행위원회’ 회의 문건에 따르면 현실 정치에서 더 공세적으로 나가고 원내에서 교섭력을 강화해 ‘ 거대한 소수 정당’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 총선 이후 정세 전망과 대응 방향’이란 회의 자료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이 양강구도에서 친(親)열린우리당 행보나 2중대론 등과 같은 억측으로 실질적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만큼 이를 불식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따라서 원내에 들어가서도 ‘ 과격 노선 유지 - 변화된 면모 못 보여’등의 ‘데마고그(선전)에 흔들리지 말고, 적극적이고 공세적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비정규직 문제 등에 있어서는 노동 관련 의제에 한정하지 말고, 사회적 약자의 보호차원에서 ‘ 공익적’ 이슈를 내세워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건은 의정의 제 1과제로 원내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17대 국회 개원 이전에 정치적 이슈를 중심으로 여론을 집중화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라크 파병반대, 선거법, 정당법, 국회법 개정 요구를 지속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당의 정치활동 기조를 ‘ 진짜 보수 대 진짜 진보’의 진검 승부 구도로 삼아 현재의 정국을 ‘ 양대 보수정당 대 유일 진보야당’이라는 구도로 전환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가운데 보수정당화에 성공한 쪽을 중심으로 정치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건에서는 열린우리당이 당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내홍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 친노(親盧)파를 중심으로 당내 교통 정리를 하겠지만, 통합력 발휘는 어려울 것”이라며 “ 불안정한 상황에 맞닥뜨릴 가능성이 큰 만큼 열성지지자들의 동원력에 바탕해 ‘ 위기의 정치’를 지속해 갈 것”으로 전망했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4-05-04 16:57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