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기피현상으로 학사경쟁률 하락, 빛 바랜 '비전 2010'침체된 학내 연구 분위기, 국가 차원의 교육환경 조성과 투자 절실

[카이스트의 위기] 과학 백년대계가 흔들린다
이공계 기피현상으로 학사경쟁률 하락, 빛 바랜 '비전 2010'
침체된 학내 연구 분위기, 국가 차원의 교육환경 조성과 투자 절실


4월2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성동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ㆍKAIST) 창의학습관의 터만 홀. 800여명의 학생들이 학내 리더십 강좌의 초청 강사인 오명 과학기술부 장관의 강연을 듣기 위해 운집해 있었다.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한 언론의 집중 조명이 있은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였을까, 우리나라의 과학 기술 정책을 이끌고 있는 오명 장관이 제시할 정부의 청사진과 대응 전략에 관심의 촉각이 곤두 서 있었다.

오 장관은 이날 우리나라 이공계 교육 실상에 드러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향후 과학 기술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오 장관은 “ 언론의 문제 지적이 지나치게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며 “ 오히려 이 같은 지적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언론의 긁어부스럼식 ‘ 이공계 위기론’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러나 오 장관은 이공계의 산실로 꼽히는 카이스트 현황에 대한 언급에 이르자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는 우선 카이스트 내부의 현실 인식에 문제점이 있다며 포문을 열었다. 오 장관은 “카이스트는 기존의 교육 제도에서 길러낼 수 없는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라며 “ 학생과 교수 모두 이 점을 잊지 말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쇄신해야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어조엔 우회적이지만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 변화의 자세가 없이 지금과 같이 (현 위상에 자족하는) 정체된 분위기가 계속될 경우, 정부가 또 다른 카이스트를 세워야 하는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는 점을 교수 등 학교 관계자들은 명심해야 한다”며 코앞의 ‘ 카이스트의 위기’를 경고했다.


- 도전의식이 사라졌다

이공계 기피 현상에 따른 위기 의식이 우리나라 이공계를 대표하는 ‘카이스트의 위기’로 전이(轉移)되고 있다. 1993년에 기획된 중ㆍ장기 발전 계획 ‘ 비전 2010’에 따른다면 앞으로 7년 후인 2010년에 카이스트는 세계 톱 10수준의 대학이다. 그러나 비전이 만들어진 지 10년이 흐른 오늘날 ‘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와 더불어 미래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매년 하락하는 학사 경쟁률뿐만 아니다. 갖가지 구조적 허점 덕에 특수 대학이란 명분이 무색하다. 결코 특수(?)하지 않는 안일한 학사 운영제, 교수ㆍ연구진과 학생들의 의욕 상실 등으로 ‘ 비전 2010’은 내부에서조차 빛 바랜 구호라는 상실감과 위기 의식으로 휩싸여 있다. ‘ 잃어버린 10년’과 향후 10년에 대한 위기감에 짓눌려 있는 것이다.

위기에 대한 인식은 내부에서 보다 외부에서, 원거리로부터 다가오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내부의 시각에선 내재된 위기 요인에 대해 외부의 돌출적 판단이라고 치부하고 묵과해 버리기가 일쑤다. 1997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외환 위기가 외부의 힘에서 보다는 내부의 안일함에서 비롯됐던 것처럼, 이공계 위기도 중국이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하면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위기가 내부로부터 감지되고 구성원들이 그 원인 파악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그 파급 효과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면 위기는 최소화될 터이다. 위기를 정확히 인식하고 구체적인 대응 전략이 강구된다면 위기는 기회로 거듭날 것이기 때문이다. 카이스트의 위기 의식은 이미 내부에서부터 일고 있다.

올해로 설립 33주년을 맞는 카이스트는 고급 과학 기술 인재의 양성과 국가적인 중ㆍ장기 연구 개발 및 과학 기술의 첨단화를 위해 설립된 이공계 전문 대학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1970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과학 기술 인력 양성의 중요성을 인식, 제대로 된 이공계 대학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대학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몰랐던 까닭에 미국 스탠포드대학의 공대 학장으로 있던 프레드릭 터만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오늘날 카이스트가 스탠포드대를 모델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연구책임자로서 터만 교수는 정근모 박사(현 과학기술한림원장)를 포함한 5명으로 구성된 연구진을 편성했다. 연구 보고서를 받아 본 박 전 대통령은 이를 청사진으로 삼아 오늘의 카이스트를 만들었다. 오명 장관이 리더십 강좌를 한 터만홀이 바로 스탠포드대 터만 교수의 이름을 딴 곳이다.


- ‘과학입국’ 초심 어디로

“인생의 불행은 두 가지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다. 후자의 경우가 현재 카이스트의 위기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카이스트?국내에서 이미 1위의 영예를 얻었고 성공했다는 자족감에 안주하고 있다. 도전 정신은 캠퍼스에서 사라졌다. 초심을 잃은 것이다. 더 높은 곳으로 나가야 하는데 의욕을 높일 만한 인센티브도 없고 ‘ 나눠먹기’식 구조 속에서 오히려 자괴감이 앞선다. 카이스트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위기의 실체다.” 전자 전산과 경종민(51)교수가 최근 내 놓은 진단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공계 위기라는 추세, 경쟁력 하락, 침체된 학내 연구 분위기, 행정 편의주의 등으로 그 뿌리마저 흔들리고 있는 카이스트에게 뼈아픈 반성의 계기가 됐다. 국가적 명운을 걸고 우리나라 과학ㆍ기술계를 이끌고 나간다는 초심(初心)은 종적을 찾을 길 없다.

카이스트의 위기감은 무엇보다 학사 경쟁률이 뚜렷하게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대목에서부터 감지된다. 우수한 인재의 확보가 우선이어야 할 학사 입시 과정에서부터 균열이 일고 있다. 카이스트에 따르면 학사 과정 입시 경쟁률은 2000년의 2.3:1, 2001년 2.16:1에 이어 2004년에는 2.08:1 수준으로 계속 하락 추세다. 학사 과정 1차 모집 당시 예년에는 평균 1,200명 정도가 지원했다면 요사이는 평균 900명 선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경쟁률 하락 수치가 미미한 데다, 이공계에 대한 전반적 기피 현상이 그 주요 원인이 아니냐며 그 같은 현상을 애써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전의 카이스트가 가졌던 매력이 반감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카이스트 입학자에 주어진 혜택일 수 있었던 병역 특례를 비롯, 조기 입학과 학비 면제 등은 최근 병역 특례의 범위가 줄어 든 데다 조기 입학할 수 있는 학교가 늘어나면서 그 매력을 상실하고 있다. 학부생인 이형수(21ㆍ전자과)씨는 “ 지금의 카이스트는 국립대 보다 학비가 싸다는 매력밖에는 없는 곳으로 추락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과학고 학생들에게 카이스트는 고교 졸업후 진학 가능한 이공계 대학 중 하나로 전락하고 있다.


- 재적 인원의 심각한 불균형

지난해 모 언론 기관이 발표한 전국대학평가에서 카이스트는 포항공대에 이어 2년 연속 2위에 그쳤다. 발표논문 수에서도 포항공대에 현격하게 밀렸다. 특히 사회 평판도 부분에서는 10위를 기록할 정도로 악화일로다. 학생들 사이에는 순수 학문이라면 포항공대 쪽에서 공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을 정도다. 또 2002년 정보통신대(ICU)가 개교하면서부터 과학고 출신 학생들은 고개를 돌려 선택의 폭을 넓히고 있다. 정보통신대의 경우 졸업 후 바로 현장 투입이 가능한 인재를 양성하면서, 상대적으로 전산전자 분야에 강하다고 여겨져 온 카이스트의 매력이 급격히 반감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대다수 기업과 산업체에서조차 수긍하는 분위기다. 누가 카이스트를 가리켜 0순위라 하겠는가.

떨어지는 것은 입학 경쟁률만이 아니다. 카이스트 각 과의 재적 인원은 심한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올해의 경우, 전기전자 전공에 100여 명이 몰린 반면, 재적 인원이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학과가 속출하는 상황이다. 현재 항공과와 바이오시스템학과의 4학년 재적 인원은 4명,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와 건설ㆍ환경공학과는 각각 5명이고 신소재공학과의 경우 3학년 재적 인원이 5명인 수준으로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울 정도다. 수강 인원이 5명 이하가 되면 아예 과목이 개설되지 않으므로 비 인기학과의 학생들은 제때 수강을 못하는 이중고를 겪는 셈이다.

이와 반대로, 재적 학생이 너무 많아 수업의 질이 떨어지는 과목도 생기고 있다. 특정 과목에 사람이 몰리는 것은 결국 취업 문제와 연관이 있다는 말. 이쯤 되면 일반 대학이 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해도 할말이 없다. 국가에서 이공계의 고급 과학 기술 인재를 양성하는 목표를 가지고 설립한 학교에서뗏?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와중에 학부생 가운데 이탈자도 속출하고 있다. 카이스트에서 마저도 소위 ‘ 의치한(의대ㆍ치대ㆍ한의대)’ 진학을 위해 자퇴하는 학생들이 줄을 섰다. 과학 기술 영재 두뇌마저도 ‘ 의치한’으로 선회중이라는 사실은 이제야말로 국가가 나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당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카이스트에 따르면 지난해 1학기 동안 78명(석·박사과정 포함)의 학생들이 자퇴했다. 이는 2002년 한 해 동안 석ㆍ박사 과정을 포함, 78명이 자퇴한 것에 비하면 2배 가까이로 늘어난 수치다. 지난해 1학기 동안 학부생 가운데 자퇴한 학생은 17명으로 2002년 한 해(13명)보다 4명 증가했다.


- 자퇴 등으로 학부생 이탈 속출

지난해 이 학교에 진학한 뒤 몇 달 만에 학교를 그만 두고 다시 입시를 준비한 끝에 올해 J의대에 입학한 박모(21)씨는 “의대에 대한 미련이 있었고 카이스트를 졸업해도 이공계 출신자들의 전망이 밝지 않아 재수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입학 한달 만에 휴학계를 내고 입학 시험을 다시 치러 E의대에 진학한 김모(21)씨는 “ 선배 등으로부터 ‘ 공대 출신은 졸업해도 정당한 대우를 받기가 힘들다’는 얘기를 듣고 4년 동안 이공계 관련 학과 공부를 계속하기 어려울 것 같아 일찍 포기했다”고 토로했다. 학적과 관계자는 “ 자퇴 학생 대부분이 ‘ 의치한’ 진학을 위해 재수를 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 앞으로 카이스트에도 적지 않은 학생들이 ‘ 의치한’ 진학을 준비할 것으로 보여 학부생 자퇴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교수와 연구진마저 의욕을 상실, 엎친데 덮친 격이다. 단적으로 말하자. 국가 특수 대학인 카이스트 교수들의 연봉은 평균적으로 연ㆍ고대 등 사립대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

한 때 교수별 차등평가에 의한 연봉제 도입 논의가 있었지만 결코 쉽게 현실화되지 못했다. 오명 장관의 말처럼 “ 기존의 교육제도에서 길러낼 수 없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학교”로 최고의 대우를 통해 의욕을 고취시켜도 세계 일류 대학과 경쟁하기에 힘든 판국이다. 그러나 형평성과 평준화라는 덫에 이들의 처우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 정도로 낙후돼 있다. 익명을 전제, 취재에 응한 교수들이 털어 놓은 바는 이렇다.

물리학과의 한 교수는 “ 카이스트의 목표가 대전 지방 대학이라면 이미 그 목표는 달성했다”며 “ 글로벌화를 통한 세계 일류대학이 목표라면 정부도 그 만한 교육환경의 조성과 연구진에 대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테크노경영대학원의 한 교수는 “ 카이스트의 당면 과제는 우선적으로 교내 행정의 분권화와 개방형 교육 체계의 구축에 있다”며 “이 같은 여건이 성숙되지 않는 상황에서 카이스트가 제2의 도약을 꿈꾸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또 기계공학과의 한 교수는 “ 산학연의 수준 등을 고려할 때 스탠포드대와 무늬만 비슷한 카이스트는 대만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며 “ 세계적 수준의 연구그룹과 교수, 학생이 없이는 ‘ 2010 비전’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전자전산과의 한 교수는 “ 현재 카이스트의 위기를 위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사안일주의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한다면 카이스트는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야 말 것”이라며 “도전 정신과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교육환경 조성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절대절명의 위기앞에서, 한국 이공계의 미래를 걸머 쥔 카이스트의 명석한 두뇌들은 또 다른 기회를 만들기 위해 부심중이다.

장학만기자


입력시간 : 2004-06-02 10:38


장학만기자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