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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의 위기] "잘못된 선택이었다"
자괴감으로 가득한 젊은 과학도들, 의욕상실 역력

“ 전공을 바꾸지 않고 석사 진학해서 계속 연구를 했다면, 연구하는 과정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었겠죠. 어떤 법칙을 발견해서 사회적 기여를 할 수도 있고…. 그러나 그건 막연한 거예요. 반면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의학 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꾼 후 의사가 된다면 훨씬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죠. 연봉 액수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신분이 더 낫구요. 어디 연구원이라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 주나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올 2월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학사과정을 졸업한 P씨(22)는 현재 서울의 의학계열 입시 전문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입영을 미루면서 의학 대학원의 입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학원에서 둥지를 틀고 비지땀을 흘린다. 그는 카이스트 학부 과정에서는 화학을 전공했다. 과학고 2학년 재학 당시 전국수학과학경시대회 화학분야에서 2등을 차지한 소위 ‘천재’다.



- 고급인재 양성의지 있는건가?



카이스트가 무너지고 있다. 최근 언론에서 ‘이공계 위기’라는 보도를 잇달아 내보낼 때도 예외였던 카이스트. 대전의 대덕 밸리 초입에 위치한 이 학교에 대해서는 사람들 모두 논외로 하는 분위기였다. ‘설마 카이스트까지….’

SBS드라마 ‘카이스트’의 주인공들은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밤을 새워서라도 하나하나 풀어 나갔고, 공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정부의 지원금을 배경으로 쾌적한 환경에서 우리나라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젊은 과학도들. 학비도 면제고 식비 보조금까지 나오는 등 국가에서 용돈 받아가며 공부하는 학생들. 한국 과학기술인력의 중추라는 통념에 어깨가 으쓱할 만도 하다. 그러나 카이스트에 다니는 학생들 본인들은 그러한 생각부터가 환상이라고 잘라 말한다.

석사 2년차 김준영(23ㆍ항공우주전공)씨는 “내가 순진했다“며 한숨 지었다. 공부 잘 해서 과학고 들어갔고, 2년 만에 과학고를 조기 졸업한 후 카이스트를 선택한 게 잘못이었다는 것. 현재 국비 장학생 신분인 김씨에게 주어진 혜택은 학비 면제와 한 달에 20여 만원 정도의 조교 수당뿐. 그러나 그 정도로는 기본적인 생계도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그래도 다른 학교의 석사 과정 학생과 비교해 볼 때 20여 만원이라도 받는 게 낫지 않느냐”며 기자는 다소 의뭉스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카이스트가 대전으로 이사를 온 건 박정희 정권 때였다. 박정희 정권 때 석사 과정 수당은 17만원 선이었다. 그 때의 17만원이란 거의 공무원 월급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지금 공무원 월급이 얼마인가. 20여 만원이란 말인가. ” 격앙돼 가던 김씨가 본론을 날렸다. “이건 국가에서 고급인재를 양성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이제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들어 보였다.

그의 반응은 산학협동 프로젝트가 오히려 주요 관심사가 돼 버린 카이스트의 현재를 웅변한다. 순수 과학탐구의 산실이어야 할 각 연구실이 산학협동 프로젝트에 매달리는 현실이다. 산학협동 프로젝트는 담당 교수가 기업체로부터 프로젝트를 따오고 그 프로젝트를 해결하는 데 인건비가 지원되는 방식. 그러나 그 프로젝트 수행이 주된 업무가 되면 연구생이 정작 마음에 품은 연구는 뒷전 신세를 면하기 힘들다. 연구에 투자할 시간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다보니, 본 연구의 질적 저하는 불을 보듯 뻔하다.

김씨는 “ 설령 산업체의 프로젝트를 따도 1인 당 10만~20만원 선의 수당밖에 받지 못한다“며 “예외적으로 아주 돈을 많이 주는 프로젝트라 해도 1인 당 40만~50만원 이상의 수당은 받지 못한다”고 전했다. 결국 산학 협동이란 기업이 싼 값에 고급 인력을 쓰게 하는 구조적 협잡이라는 것. 그는 “ 학생 입장으로 보자면 그 돈도 아쉬운 터라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고 설명했다.


- “소모성 연구원일뿐” 자조

사정이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해묵은 사연이 있다. 바로 일반인의 허튼 상상을 불허하는 과학ㆍ기술계의 소외감이 그것. 아무리 이공계가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데 공을 들여 봤자, 일반인에게는 체감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국의 기초 과학은 빈사 상태다. 같은 이유로 일반인들은 그 문제에 무관심할 수 밖에 없다는 악순환만이 계속된다. 또 부가 가치를 창출해도 시스템적으로 보상 체계가 없다는 것도 문제. “신기술을 개발한다고 해도 올라가는 건 주식이다. 연구원의 연봉이 파격적으로 뛰지는 않잖아요.”

일주일에 3~4일 밤 새워 연구해도 보람이 없다. 그러다보니 하고 싶은 연구를 못 하는 건 물론, 눈에 보이는 단기?성과에 급급하게 된다. “ 그렇게 일해 봤자 회사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해주는 줄 아세요? IMF때도 이공계부터 감원됐죠. 단 물 빨아먹고 버리자는 거잖아요.” 갓 졸업한 값싼 인력으로 얼마든지 충원된다는 배짱 때문이다.

과학도들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는 의욕감의 상실이다.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올 때까지 하고 싶은 연구를 끈기 있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것이 석ㆍ박사 과정 학생들의 고민거리다. 연구에 대한 자율성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 그래도 카이스트만 나오면 대기업에 취업이라도 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도 말자. ‘소모성 연구원’일 뿐이라는 대답만이 돌아 올 뿐이니.

병역 문제도 또 하나의 큰 산이다. 현재 카이스트에는 석ㆍ박사 병역 특례 제도가 있다. 석사의 경우, 석사 학위 취득 후 4년이다. 한편 박사 병역 특례의 햇수는 박사 3년차부터 4년. 학사 4년, 석사 2년, 박사 3년, 그리고 병역 특 4년인데 19살에 카이스트에 들어오면 31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발이 묶이는 셈이다. 병역 특례의 대가로 취직이나 유학을 포기해야 하므로 “발이 묶인다”는 자조적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 상대적 박탈감에 자부심마저 붕괴

또 보수도 공들인 시간에 비하면 홀대가 따로 없다. 박사 과정이 끝나고 국가 출연 연구소 연구원으로 취직하는 경우, 초봉은 3,000만~4,000만원 대이다. 국민, 하나, 신한 은행 등 금융 기관의 대졸 초임 연봉인 3,500만 원대와 비슷하다는 얘기다. 고급인력이라는 자부심, 국가 산업에 보탬이 된다는 보람이 있어도 얄팍한 연봉은 이들의 어깨를 처지게 한다.

다시 고교생이 된다면 그래도 이 길을 선택하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사과정의 한 연구원은 씁쓸한 웃음부터 보였다. “이런 상황인 줄 알았더라면 안 오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카이스트 졸업생으로 현재 의학대학원 진학 희망자인 K씨는 “석박사 졸업한 후의 대우가 지금의 의사 대우라면 진로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공계 위기라는 전반적인 국내 상황에 비추어 이공계의 선두 주자로 뛰어야 하는 카이스트. 그러나 석ㆍ박사 과정 연구생들의 상대적 박탈감 사이에 놓인 카이스트가 어떻게 환골탈태를 해낼지 주목된다.



박소현 인턴기자 peste@naver.com


입력시간 : 2004-06-02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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