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콘텐츠에 흐르는 분노·금기에대한 도전, 잔혹한 현실 대변

[엽기사회] 광기가 물결치는 문화 속 세상
문화콘텐츠에 흐르는 분노·금기에대한 도전, 잔혹한 현실 대변

서울시내 한 대형서점의 엽기태러디 관련서적 코너. 젊은층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진/ 박철중

“살인은 예술처럼 하라.”

영국 톱가수 스팅의 노래 ‘Murder By Number’의 가사 한 구절이다. 예술의 다양성이야 응당 존중 받아 마땅하지만, 살인까지도 예술의 일환으로 끌어올리는 일련의 시도는 그야말로 섬뜩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엽기 예술은 이미 우리 문화 곳곳에서 찾아보기 어렵지 않게 됐다.

영화, 서적, 미술 등을 둘러보면 변태적이고 기이한 내용을 근간으로 한 엽기 콘텐츠가 넘쳐 난다. 도끼로 찍고, 망치로 내려치고, 토막 내어 죽이는 살인마들이 영화와 소설을 넘나드는가 하면, 죽음을 예찬하고 범죄 충동을 불러일으킨다는 의혹을 살만한 음악과 미술 등도 날로 늘고 있다.

요즘 영화와 소설, 미술에서 보이는 엽기 문화의 공통점은 사람들의 음울한 내면을 제대로 들춰낼 수 있을 만큼 자극적이라는 것. 즉 분노와 광기가 범람하고, 오랜 시간 지켜온 인류의 금기를 파괴한다. 우리가 잔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으로 증명해내기라도 하듯이.

얼마 전 엽기 살인마 유영철의 집에서 발견됐다고 해 화제가 된 10여 장의 DVD 중 영화‘공공의 적’과 ‘베리 배드 씽’에는 실제 20여 명을 참살한 그의 범죄 양상과 유사한 내용들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유영철이 “특정 영화가 범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식의 진술을 하지 않은 만큼 논란의 중심에서 다소 벗어나긴 했지만, 그가 무의식 중 이들 영화를 참고했거나 범인의 캐릭터를 동경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기에는 충분했다.

범행의 동기나 상황 설정은 다르지만, 실제 유영철 사건 곳곳에서 영화의 흔적이 역력하다. 강우석 감독의 2002년 작품인 ‘공공의 적’에는 늙은 친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패륜 살인마가 등장했고, 피터 버그 감독의 코믹 잔혹극 ‘베리 배드 씽’(1999년)은 시체를 토막 내어 사막에 묻는 충격적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 충격적 내용과 영상으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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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엽기살인 행각을 다룬 영화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누가 더 악랄하고 소름 끼치도록 죽일 수 있나를 경쟁이라도 하듯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양상이다. 지난 7월 24일 막을 내린 제 8회 부천영화제에는 변태 중 변태로 취급받는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ㆍ시체애호증 혹은 시간증)을 그린 ‘네크로맨틱’(감독 부트게라이트)이 상영돼 관객들을 공포와 엽기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썩은 시체를 부여잡고 황홀경에 빠져드는 주인공들의 엽기적인 행각을 사랑으로 미화시켜 객석을 경악케 했다.

영화 속 엽기의 물결은 금기에 대한 도전으로도 치닫고 있다. 2004년 칸느된??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은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남매간-부녀간의 근친상간을 미스터리의 형식을 빌어 비극적으로 녹여냈고, 7월 30일 개봉하는 장현수 감독의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로맨틱 섹시 코미디라는 장르를 통해 세 자매와 한 남자의 ‘정사’라는 충격적인 금기를 ‘뻔뻔하게’ 대수롭지 않은 해프닝으로 풀어낸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이 걋?상상초월의 엽기가 범람하는 것은 현실에 실재하는 엽기성을 이미지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점점 자극에 반응하는 강도(역치ㆍ閾値)가 치솟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출판계에서 보이는 엽기 바람 역시, 의도적 왜곡을 통해 보다 강력한 엽기를 만들어 낸다는 공식을 따른다. 이러한 조작적 왜곡이 돋보이는 대표적 작품은 최근 미국 역사추리소설 붐의 선봉에 선 ‘단테클럽’(황금가지 펴냄)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혼돈에 싸인 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형벌을 흉내낸 엽기적 살인사건을 재현한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끔찍한 ‘살아있는 지옥’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엽기 범죄 탐구의 코드가 바뀐 점도 최근 출판계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과거 가난이나 사회 멸시에서 범죄 동기를 찾았던 것과 달리 ‘그냥’ 사람을 참살하거나 괴롭히는 ‘묻지마 범죄’가 주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무작위로 사람들을 살해한 뒤 살을 뜯어먹는 살인마를 그린 ‘양들의 침묵’(토머스 해리스 作)이나 광적인 집착으로 우연히 구해준 소설가를 감금ㆍ구타하는 ‘미저리’(스티븐 킹 作) 등은 부조리한 사회 고발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근원적인 악을 탐색하는데 집중한다. 이 같은 미스터리 소설을 주로 출간하는 ‘황금가지’의 장은수 편집부장은 “그간 끊임없는 사회 계도에도 엽기 범죄가 갈수록 활개를 침에 따라 이러한 현상을 탐색하는 코드는 인간 심층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미술의 엽기 양상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8월 1일까지 ‘7인의 파수꾼 1’이 열리는 서울 인사동 갤러리 ‘상’에는 공포와 어둠의 정서에 천착한 젊은 작가 7인의 엽기 작품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다. 두피를 벗겨 속살을 드러낸 흉물스런 얼굴이나 내장을 쏟아내는 인체를 표현한 작품 등이 섬뜩하기만 하다.


- "뒤틀린 욕망의 해소통로" 분석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엽기 문화는 실제 우리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모방 범죄 등의 가능성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려를 반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특수한 경우일 뿐, 엽기 문화가 범죄를 일으킨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장은수 편집부장은 “문화 속에서 범죄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엽기를 즐기는 차원이 아니다. 자기 내면의 음울한 충동을 들여다 보면서 어둠을 씻어 나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마음속에 잠재된 공격성이나 뒤틀린 욕망을 해소하는 통로가 될 수 있어 오히려 범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의 우려는 남는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현 시대에 범람하는 엽기물이 범죄자를 만드는 게 아니다”고 일축하면서도 “단, 범죄자를 좀 더 창의적인 범죄자로 만들 가능성은 있다”고 지적했다. 또 대전중앙신경정신과 김영진 원장은 “영화나 소설이 고도의 상상력으로 일반인들이 알지 못했던 범죄 정보를 줄 수 있다”며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혼동하는, 건강하지 못한 정신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간과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엽기물의 범람을 경계했다.

배현정 기자


입력시간 : 2004-07-29 14:10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