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결정에 '법적 효력'만 인정'반전카드 찾기' 장고에 들어가

[행정수도 이전 위헌 파문] 시련의 盧, 돌파구 뭔가?
헌재 결정에 '법적 효력'만 인정
'반전카드 찾기' 장고에 들어가


“관습헌법론은 처음 듣는 이론이다.”

헌법재판소가 21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위헌이라고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보인 첫 반응이다.

이후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노 대통령은 나흘 뒤인 25일 이해찬 총리가 대독한 국회 시정 연설에서 “헌재의 결정 이유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평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 결론의 법적 효력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이라고 밝혔다.

헌재 결정에 대해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수용 의사를 피력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헌재의 최종적 판단에 따른 법적인 효력 발생만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노 대통령의 불편한 속내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는 헌재의 ‘관습헌법’ 인용에 대해 “처음 듣는 이론”이라고 반론을 펼쳤던 것처럼 이론의 여지는 많지만 헌재의 권위를 존중, 일단 법적인 효력 부분을 수용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노 대통령은 또 “정부는 국가 균형발전을 변함없이 추진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국가 균형발전 전략의 취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적절한 계획을 세워 반드시 추진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그러나 국가 균형발전 전략은 “헌법재판소의 결론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는 단서를 달아 헌재의 법리 해석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 조기개헌 공론화 방안 모색 움직임

관련기사
헌재의 힘, 정권을 흔들다
위헌결정에 대한 헌법학자들의 견해
희비 엇갈린 박근혜·이명박·손학규
헌재발 후폭풍에 곳곳 '불난집'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일각에서 헌재의 관습헌법 인용과 수도의 개념 규정 부분에 대해 강력한 이의를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심지어 헌재의 지난친 보수성, 이념적으로 편향된 인적 구성 등을 거론하며 ‘헌재 무용론’까지 제기하면서 조기 개헌 공론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어 노 대통령의 다음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수도 이전은 노 대통령이 “정권의 명운을 걸겠다”고 했을 만큼 참여정부의 상징성을 띤 정책.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그 추진에 급제동이 걸린 것은 단순히 수도 이전이 무산됐다는 ‘정책 좌초’를 넘어 노 정권의 운명에도 치명타를 준 셈이다.

노 대통령이 헌재 결정에 대해 가장 고민스러워 하는 것은 돌파구를 좀처럼 찾기 어렵다는 데 있다. 노 대통령이 침묵을 유지하다 한발 물러나 헌재 결정을 일부 수용한 것은 그러한 고민이 반영된 결과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헌재 결정 중 ‘법적 효력’만을 받아들이겠다고 해 헌재에 대한 ‘도전’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노 대통령이 26일 국무회의에서 “국회 입법권이 헌재에 의해 무력화되는 일이 반복되면 헌정질서의 혼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러한 의중을 드러낸 일면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10월20일 충북 제천에서 열린 충북지역 혁신발전 5개년 계획 토론회에 참석,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일부 강경파들은 국민투표나 개헌을 통해서라도 ‘정면 돌파’를 하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청와대의 한 386 핵심 관계자는 “헌재 결정문에 관습헌법의 사멸을 위해서는 국민투표 등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이 고려될 여지가 있다는 규정이 있다”며 “지금은 행정수도 이전 반대 여론이 더 많지만 정부가 본격적으로 홍보전에 나설 경우 범 여권 세력이 결집해 여론이 반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그 결과가 대통령의 진퇴와 자연스럽게 연결돼 ‘제2의 탄핵 역풍’이 불 수 있다”고 전망했다.

노 대통령의 측근인 한 초선 의원은 “대통령이 임기 말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개헌 입장을 이미 밝힌 만큼 이번 기회에 권력구조 개편과 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개헌을 동시에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통령이 임기에 연연하지 않고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느냐는 명분을 중시하기 때문에 개헌 카드를 집어들 가능성이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외에도 여당 측에서는 헌재가 위헌 결정의 이론적 근거로 삼은 ‘관습헌법’의 문제점을 집중 거론하면서 올해 안에 통과시키기로 한 4대 법안(국가보안법 폐지안, 과거사 법안, 사립학교법안, 언론관련 법안)을 밀어붙이는 카드가 제시되고 있다. 4대 법안까지 야당에 밀릴 경우 노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권력누수 현상)이 올 수 있는 만큼 지지층 결집을 유도해 강력하게 대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투표는 나라가 사실상의 ‘내전’ 상태로 빠질 가능성이 있고, 개헌 카드는 재적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열린우리당의 의석은 151석으로 재적의원(299석) 3분의2 의석에서 49석이 부족해 국회 통과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21일 MBC 여론조사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할 경우 반대하겠다는 의견이 57.8%에 달했고, 노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30%대에 머무는 등 두 카드는 자멸의 ‘악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

- 국가 균형발전 정책에 힘 실릴 듯

따라서 헌재 결정 이후 노 대통령의 현실적인 대응카드는 헌재의 위헌 논거에 대해 법리 논쟁을 전개하면서 헌재의 결론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 국가 균형발전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집약될 수 있다. 노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국가균형발전 전략은 3대 균형발전법의 국회 통과로 이뤄진 국회의 대국민 공약으로 그 취지와 정신은 반드시 존중되고 실현돼야 한다”며 “신행정수도건설이 예정된 충청권과 함께 각 지역의 발전 방향과 연관된 정책 전체를 종합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한 것은 그러한 맥락이다.

이와 관련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아직 검토 단계이지만 충청권에 대한 지원책으로 일부 지역에 제2 행정특별시, 제2 행정수도, 행정전문 도시를 건설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해 수도 이전에 버금가는 대안 카드가 제시될 것이 예상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헌재 결정에 대해 일단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충청권 전략과 향후 정치적 행보에 장고(長考)를 거듭하는 것은 수도 이전이 갖는 정치적 다의성에 기인한다. 2002년 9월 대선을 앞두고 노 대통령이 제시한 충청권 행정수도 건설 공약은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대의 못지않게 대선 승리를 위한 ‘정치성’이 깊숙이 내재돼 있었다.

이러한 충청표는 재작년 대선을 넘어 2005년 4월 재보선, 2006년 지방선거, 나아가 2007년 대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 변수다. 노 대통령의 표현대로 ‘재미’를 볼 수 있는 확실한 표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과 여권에는 당장 내년 4월 재보선이 문제다. 20여 지역이 예상되는 가운데 대부분 수도권에 집중돼 있어 여당의 과반수 의석이 무너질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여권은 한나라당이 행정수도 논란을 재보선까지 이끌고 가 유리한 선거 지형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열린우리당 내 대표적 기획통인 이강래 개혁기획단장은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이 행정수도 문제를 내년 지방선거 때 활용하고 대선 때 수도권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 여권은 행정수도 논란을 조기에 매듭짓지 못할 경우 내년 재보선은 물론, 2006년 지방선거와 2007년 대선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고 헌재 결정을 계기로 행정수도 이전 반대론을 완전히 제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24일 오후 충남 연기군 남면 주민대책위 사무실 앞에서 주민대표들이 헌재의 위헌판결에 항의하는 삭발식을 하고 있다. / 홍인기 기자

한나라당 역시 향후 선거에서 호남과 충청권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고 보고 수도권에 ‘올 인’한다는 전략을 세워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의 한 핵심인사는 “헌재 결정으로 충청권은 확실한 여당 쪽으로 기울었고, 호남 또한 한나라당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수도권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내년 재보선에서 패하면 2006년 지방선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고 수도권을 잃을 경우 2007년 대선은 해보나 마나”라고 단정지었다.

여당이 4ㆍ15 총선 직후부터 “20~30년 집권을 위한 토대 구축”(정동영 전 의장, 4월23일)을 강조하면서 행정수도 공방을 “차기 정권 쟁탈전의 서막”으로 규정짓고 총력전에 나선 것이나, 노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 반대론을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 또는 퇴진운동으로 느끼고 있다”(7월8일 인천지역 혁신발전 5개년 계획 토론회)며 강경 입장을 천명한 것은 수도 이전 문제가 국토 균형발전 차원을 넘어 집권 여당의 국정 운영과 차기 선거 승패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 정권에 치명타, 돌파카드도 마땅찮아

따라서 헌재가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위헌으로 결정, 사실상 수도 이전을 불가능하게 한 것은 향후 선거전선에서노 대통령과 여권에게 치명적인 악재다. 여권은 관습헌법에 허(虛)를 찔린데다 이를 돌파할 카드가 마땅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 3월 탄핵 정국에 갖힌 노 대통령을 구해낸 국민적 열기도 좀처럼 감지되지 않아 향후 선택도 어렵게 하고 있다.

헌재 결정을 수용, 숨고르기에 들어간 노 대통령이 과연 어떤 카드를 꺼낼 지 귀추가 주목된다.

▲ 강금실의 예언과 노 대통령의 속웃음?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지난 7월 퇴임 직전 각료 중 유일하게 헌법재판소의 수도이전 위헌 결정 가능성에 우려를 표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의 핵심 관계자는 22일 “강 전 장관이 7월 고위당정 정책조정회의에서 ‘위헌 결정이 날 것 같다’고 지적했다”며 “그러나 다른 장관들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괜찮다’고 했다”고 전했다.

강 전 장관은 7월 15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과 관련, 총리공관에서 열린 당정회의에서 “간단히 볼 문제가 아니다”며 “보수적인 헌재 구성원의 성향상 쉽게 합헌 결정이 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와 정가 주변에서는 강 장관의 예언(?)에 훨씬 앞서 ‘위헌설’과 함께 수도 이전이 투자 규모와 정치상황 등으로 무산될 가능성이 있다는 ‘백지설(白紙說)’이 적잖이 퍼져 있었다.

즉 참여정부 초기부터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검토, 일각에서 위헌 가능성이 제기됐고, 실제 행정수도 건설 비용도 정부가 발표한 것보다 훨씬 많아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정부ㆍ여당이 수도 이전 문제를 조용하게 풀어갈 수 있었음에도 공론화해 정치 쟁점화하고 결국 헌재의 판결까지 간 것도 백지설과 연계된 정략이란 지적도 있다.

백지설이 사실이라면 헌재의 위헌 결정은 노 대통령에게서 짐(수도 이전 문제)을 하나 덜어준 셈이다. 노 대통령이 헌재의 위헌 결정에 우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웃고 있을지 모른다는 분석은 그래서 나온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4-10-28 16:15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