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버둥 쳐봐도 우린 이방인 일뿐"말로만 한민족, 뿌리깊은 냉전적 사고로 '경계의 대상' 인식외국인 노동자보다 못한 대우 "이탈민 열에 아홉은 실업자"

탈북자 - 아웃사이더로 사는 설움의 나날
[한국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발버둥 쳐봐도 우린 이방인 일뿐"
말로만 한민족, 뿌리깊은 냉전적 사고로 '경계의 대상' 인식
외국인 노동자보다 못한 대우 "이탈민 열에 아홉은 실업자"


‘12월의 봄.’ 1968년 이후 가장 따뜻하다는 2004년의 겨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6,000여 탈북자(북한 이탈민ㆍ이하 이탈민)들은 한국 사회의 싸늘한 시선 탓에 여전히 춥기만 하다. 저녁 반상을 겸한 자리에서 그들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을 들여 봤다.(대담은 12월 16일 오후 7시께부터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이뤄졌다)

“이탈민이 허드렛일이라도 하나 얻으려면, 조선족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된다니까. 한국서 외국인 노동자보다 대우 못 받는 게 우리 이탈민들이요.” 첫마디가 심상찮다. 그러나 과연 지나친 말일까? 남한 생활 3년차의 김상진(31ㆍ가명)씨는 아직도 ‘조선족 직원’ 아니면 ‘연변 총각’이라는 딱지를 못 뗐다. 이제는 자신들과 일자리 하나도 나누려고 하지 않는 남한 사회를 생각하면 입 안 가득 원망까지 고인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 언제는 든든한 집에 정착금까지 줘 가면서 잘 살아 보라고 다독거리더니 이제 관심이라곤 눈 ???봐도 없다니까. 집 주고 돈 주면 다 되는 줄 아는 모양이야.” 이탈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변변치는 못해도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 없는 지금이라지만, 공장일에서 언제 손을 놔야 할지 모른다며 그는 끝내 사진 찍히기를 거부했다.

탈북자들 한국행 기피, 제3국 희망자 늘어
마주 앉은 주성일(23ㆍ2002년 탈북)씨가 거들고 나섰다. “이탈민 중 열에 아홉은 무직입니다. 다수의 이탈민들은 벌이가 없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나서서 하는 일이 탈북 브로커나 몸 파는 일이죠. 남한 땅에 발을 디디기까지 중국서 숨어 지낼 때야 그렇게 몸을 팔아서라도 살아 남아야 했지만 남한에까지 와서 그렇게 살 이유가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 같은 국내 이탈민들의 사정이 알려지자 중국에 체류 중인 다수의 탈북자들은 제 3국으로의 입국을 희망한다고 했다. 일본이 그 첫손으로 꼽히고 다음이 최근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킨 미국. 한국은 몽골, 베트남, 미얀마 같은 곳보다도 아래라고 덧붙였다.

“올림픽 공동입장이니 뭐니 하며 말로는 한민족이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전혀 아닌 것 같다니까. 이러다가 우리는 또 다른 소수 민족이 되는 게 아닌가 싶어.” 김씨는 그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북한이 싫어서 떠나 온 우리지만, 여전히 적국인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니 경계할만도 하지. 게다가 청년 실업이다 뭐다 하면서 가뜩이나 어려운데 ‘내가 저 사람들 때문에 내가 피해 보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고.”

대학생 주씨가 가만 있지 못 한다. “이 모든 게 사회 깊숙이 자리잡은 냉전적 사고 때문이겠죠. 대학생활 2년만 돌이켜봐도 남한 사회가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이탈민 등의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배타적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공부를 같이 해도 항상 저는 겉도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이 사회에 편입해 보려는 각고의 노력으로 지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수면 위를 부유하는 한 방울의 기름 같은 존재였다.

“처음에 전철, 버스 타는 법을 몰라 걸어 다녔습니다. 이북 말투에 우선 경계의 눈빛이 돌더니만, 결국 누구 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죠. 그러다 한 번은 집 앞 100m에서 길을 잃어 버렸는데 정말 앞이 캄캄하더라구요. 어디 도움을 요청할 데도 없고…. 그땐 정말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 가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남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북에 두고 온 가족 때문에 북한으로 되돌아 간 탈북자가 상당수에 이른다고 옆에 앉은 김 씨가 숟가락을 놓으면 말했다.

동병상련. 결국, 이탈민(통일부가 이들을 지칭할 때 권장하는 공식 용어로, ‘북한이탈민’을 줄여 부르는 말. 당사덫옜そ?‘탈북자’라는 말보다 선호한다)이 위안 받는 곳은 또 다른 이탈민이다. “‘나가면 이탈민들과 어울리지 마라’며 귀가 따갑도록 하나원에서 교육 받았지만, 다른 수가 없어.” 한국 사회의 빠른 적응을 위해 당부한 얘기였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다.

“이탈민이 조그만한 사고라도 치면 언론에 대서특필되잖아요. 최근엔 이탈민 하나가 가족을 만나고픈 마음에 제 3국을 통해 밀입북했다가 잡힌 뒤 간첩 훈련을 받고 한국에 재입국하자마자 ,결국 자수한 사건이 있었잖아요. 우리가 한국에 적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데, 언론은 그런덴 전혀 관심이 없어요. 이탈민이 연루된 사건 사고에만 혈안이 돼 있지.” 오뎅 국물에 소주가 빠질 수 없었다. 밥상은 어느새 술상으로 변해 있었다.

"언론의 부정적 보도 지나쳐"
이들은 여기서 한국 사회가 이탈민들에게 배타적인 이유로 언론을 꼽았다. “90%의 이탈민 보도가 부정적인 것들이야. 언론이 이 같은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니까.” - “맞아요. 얼마 전 하나원에 한겨례신문만 들어간다며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국감 때 한 소리 먹었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큰 착각이에요. 물론, 정치 사회 기사들에서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탈민 관련한 기사에서는 호의적인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고, 있다 하더라고 일관되지 못해 왔다 갔다 합니다. 오히려 그게 이탈민들에겐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2004년 10월 현재 남한의 이탈민 수는 6,000여명. 탈북 인구가 1990~93년에는 매년 10명에도 못 미치면서 손으로 꼽을 정도였지만 99년에 100명을, 2002년에는 1천명을 각각 넘어서 최근엔 한달 평균 120여명이 한국에 입국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탈북자 인구만도 1만 여명. 몽골 동남아 등 세계 각지서 표류하고 있는 탈북 인구는 10만 여명으로 추정되는 실정이다. 지금과 같은 탈북 사태는 서곡에 불과하다는 한 탈북자 관련 단체의 말은 그래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향후 예상되는 탈북 러시 현상과 관련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궤차고 있는 일자리를 탈북자들에게도 일정 부분 할애하는 등 이탈민들의 한국 사회 적응을 위한 정부 차원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렇게 얘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우린 고맙지.” 김씨는 자신의 잔을 털어 이리로 돌렸다. 그 새 바닥을 드러 낸 소주병은 7개. “우리가 와서 민폐 끼치고 사는 마당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소. 그냥 이웃들이 편안하게 안부인사나 건네고, 다른 사람들이 색안경만 벗고 봐 준다면, 최소 우리가 한국서 받은 것의 갑절은 해내지. 암. 그게 다야, 그게.” 주씨도 마지막 잔을 털어 넣는 것으로 김씨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허! 12월의 봄이라더니만, 진짜네.”

“정말 필요한 거요? 남한 사회 전반의 관심과 따뜻한 시선이겠죠.” 2004년 서울의 겨울 바람은 이들에게 북한에서보다 더 매섭게 파고 드는지도 모른다.

정민승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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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4-12-22 18:11


정민승 인턴 기자 prufrock@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