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학벌 위주의 인사 관행 깬 의지와 뚝심의 실력파

9급에서 차관급까지… 기적의 주인공들
[9급 공무원, 신화를 꿈꾸다]
고시·학벌 위주의 인사 관행 깬 의지와 뚝심의 실력파


왼쪽부터, 김완기 청와대 인사수석, 이기우 총리 비서실장, 조연환 산림청장, 이종규 재경부 세제실장, 신삼철 조달청 차장, 김애랑 여성부 기획관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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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있는 ‘9급 고졸’ 출신 공무원이 정부 고위직에 잇따라 발탁되면서 공직 사회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9급 공채로 들어와 5급 사무관으로 승진하기까지는 보통 25년 이상이 걸리고 사무관에서 ‘공무원의 꽃’이라는 1급까지는 다시 20년 정도가 지나야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그러기에 공무원 사회에서 9급 공무원이 1급에 오른다는 것은 기적 같은 ‘신화(神話)’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하위직 공무원들의 꿈 '고졸신화'
그러나 최근 남다른 노력과 한길을 걸어 온 전문성 등으로 그러한 신화의 주인공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 1월 임명된 김완기(60) 청와대 인사수석(차관급)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기우(57) 총리 비서실장(차관급)과 조연환 산림청장(차관급), 이종규 재경부 세제실장(1급), 신삼철 조달청 차장(1급) 등도 ‘9급 고졸 신화’로 꼽힌다. 이들은 고시 출신과 학벌 위주의 공직 인사 관행을 깨고 실력 위주로 등용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반영된 측면이 있지만, 학력 인플레로 대졸 실업자가 넘쳐 나는 최근의 상황에 비춰 봤을 때 하위직 공무원이나 공무원 지망생에게 희망과 기대 섞인 자극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김완기 수석은 광주 동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광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한 수재였지만 중학 시절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가장이 돼 고교 졸업후 대학 진학 대신 행정 공무원을 선택했다. 1966년 9급(지방행정 서기보)직에 1등으로 합격, 전남 광산군 면서기로 출발한 김 수석은 이후 전남 구례ㆍ나주 군수를 거쳐 ‘일벌레’라는 별명을 얻으며 94년 내무부의 꽃인 행정과장에 올랐고 전남도 기획관리실장, 광주시 기획관리실장, 광주시 행정부시장(1급)을 역임했다.

지난해 3월 김 수석을 소청심사위원장(차관급)에 발탁한 정찬용 전 청와대 인사수석은 “광주ㆍ전남에서 신망 받는 인사로 하위직과 최고위직 공무원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두루 갖춘 공정하고 합리성을 지닌 적임자”라며 기용 배경을 설명했다. 김 수석은 학력과 관?“나는 (야간대학이나 특수대학원 진학 등) 학력으로 나를 꾸미고 싶지 않았고, 오직 일로써 나를 보여 주려고 노력해 왔다”고 못박았다. 간판이 아닌 ‘실력’으로 9급 고졸 신화를 이뤘음을 보였다는 것.

이기우 비서실장은 부산고를 나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9급 공무원을 선택, 67년 경남 교육청(거제군) 행정서기보(9급)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99년 1급인 기획관리실장까지 올라 교육부에서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지방교육청 말단 공무원과 공립학교 서무과장 등 일선 교육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고 80년대 초 문교부로 올라와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쳐 실무에도 밝다는 평이다. 이해찬 총리가 교육부 장관이던 98년 3월부터 1년여 간 호흡을 맞춘 덕분에 까다롭다는 총리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공무원”이란 극찬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실장의 별명은 특유의 친화력을 나타내는 ‘마당발’로 2003년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 있을 때는 직원 300명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외울 정도였다는 후문이다. 이 총리와의 인연으로 총리실로 옮겨간 이 실장은 공무원의 덕목으로 ‘성실’과 ‘책임감’을 꼽았다.(관련기사 40페이지)

조연환(56) 산림청장은 보은농고를 졸업한 뒤 1968년 산림청 9급 공무원으로 출발, 37년만에 산림청장에 오른 산림행정의 전문가다. 조 청장은 공직에 있으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기술고시(80년.16회)에 합격할 만큼 자기계발에 충실하다는 평甄?

산림인으로 외길을 걸어온 조 청장은 부하 직원들 사이에 신망이 두텁고 임업인 뿐만 아니라 산림 관련NGO 등과도 관계가 원만해 산림 정책을 무리없이 효율적으로 수행해 왔다. 바쁜 공직 생활에도 문학에 관심이 커 다섯 권의 시집과 수필집 등을 펴낸 조 청장은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과 함께 자기 계발 노력이 병행돼야 공무원으로서의 ‘희망’도 담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규 세제실장은 충남 홍성고 졸업 후 1965년 인천세무서 9급으로 출발, 고시 출신 엘리트가 즐비한 재경부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세제 전문가로 성장, 1급까지 올랐다. 90년 토지초과이득세를 도입할 당시 실무를 맡았으며 94년엔 금융실명제의 뼈대를 세웠다. 재경부 세제실의 김종욱 서기관은 “실장님은 ‘걸어 다니는 사전’으로 불릴 정도로 다방면에 능통해 관련 부처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새 제도를 마련할 때 항상 문의를 해온다”며 “세재에 관한 한 최고 전문가”라고 평했다. 이 실장은 “공무원 경쟁력의 핵심은 ‘특화된 전문성’”이라며 “후배 공무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고 말했다.(관련기사 42페이지)

전문성과 추진력으로 승부
신삼철 차장은 조달청 설립 이래 9급으로 출발해 1급까지 오른 최초의 케이스여서 조달청 뿐만 아니라 다른 청 공무원들에게까지 희망적인 선례를 남겼다는 평이다. 충남 강경상고 졸업후 1967년 충남 교육청 9급으로 공직의 첫발을 내디딘 신 차장은 74년 조달청으로 자리를 옮긴 뒤 30여년 동안 선물 거래, 해외 조달, 내자 구매 등 ‘외길 조달맨’의 인생을 걸어왔다.

신 차장이 1급까지 오른 데에는 출신과 배경보다는 전문성, 업무 추진력, 자기 계발 노력 등이 종합적으로 뒷받침됐다는 평가다. 실제 79년 물자관리과장 시절 전국 공공 기관에 방치된 정부 미술품을 정리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했는가 하면 IMF 위기 때는 정부재활용센터를 설치, 알뜰 시장 운영 등 물자 사랑 운동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해 연간 2,000억원의 국가 예산을 절감하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또 바쁜 공직 생활 중에서도 일본 요코하마대 국제경제법학 석사, 청주대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WTO 시대의 정부 조달’(97년)등의 저서를 남기는 등 ‘노력하는 공무원상’을 보여준 것도 1급 발탁의 배경이 된 것으로 전해진다.

여성 공무원 가운데는 김애량(55) 여성부 기획관리실장(1급)이 유일한 9급 고졸 출신의 신화로 존재한다. 명문 이화여고를 나왔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탓에 대학 진학의 꿈을 접고 1968년 서울시 9급 행정직에 응시해 합격, 그 해 집 근처인 성북구 동소문동 동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서울시청 부녀과ㆍ가정복지국장, 서대문구 부구청장(3급)을 거쳐 공직 33년만인 2003년 1월 첫 여성 관리관(1급)인 서울시 여성정책관에 올랐다.

김 기획관리실장은 “공직 초기 남녀 차별이 적지 않았지만 점차 수평적으로 발전해 왔다”면서 성공 배경과 관련, “학연ㆍ지연ㆍ혈연이 성공의 필수 조건이라는 사회 통념은 이제 구문이 된 지 오래고 성실성과 자기 계발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9급 공채 여경으로 출발해 경찰 역사 60년만에 처음으로 지방경찰청장에 오른 김인옥(53ㆍ경무관) 제주청장도 주목할 여성이다. 부산 동아대 1학년 재학 중이던 1972년 1기 여경 공채로 서울 용산서 경무과에서 출발한 김 청장은 남볼봉?강한 조직에서 오로지 ‘일’로서 승부, 99년 총경(4급 상당)으로 승진했고 2003년 방배경찰서장으로 있을 때는 ‘강력 사건 100일 작전’에서 전국 5위, 서울 강남권 1위를 기록하는 등 업무에 관한한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경무관(3급 상당)으로 승진, 지방경찰청장이 된 김 청장은 첫 여성 치안감(2급 상당) 1순위에 올라 있다. 김 청장과 여경 공채 동기인 한재숙(52ㆍ경정) 전남지방경찰청 생활안전계장은 “김 청장은 ‘그릇’이 다르다”며 “업무는 치밀하게 하면서도 포용력이 커 여경들의 귀감이자 선망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9급 고졸 출신의 여성 공무원 가운데는 조달청 개청 이래 첫 서기관(4급)이 된 송인순(54) 구매국 서기관도 돋보인다. 서울 숙명여고 졸업 후 1972년 9급 공채로 조달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한 송 서기관은 원자재수급계획관실, 경영법무담당관실 등 주요 부처를 거치며 탁월한 업무 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바쁜 공직 생활중에도 고려대 행정대학원(석사 학위 취득)을 졸업하는 등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해 지난해 4월 다면 평가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서기관에 올랐다는 평가다.

입지전적인 인물 많아
지방 자치 단체 공무원 가운데는 이의근(65) 경북 지사, 이원종(64) 충북 지사, 김태환(62) 제주 지사 등이 9급 고졸 출신들이다. 이 도지사(정무직)들은 1995년 지방 자치 전면 실시 이후 선출직 공무원이 됐다는 점에서는 일반 공무원의 신화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그에 버금가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이 경북 지사는 1961년 대구상고를 나와 경북 청도군청 9급 말단으로 출발, 특유의 성실성과 행정 기획력을 인정 받아 7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로 차출된 뒤 승진 가도를 달렸다. 내무부 행정국장, 기획관리실장, 청와대 행정수석 등 요직을 두루 거쳤고 3기(관선 1회, 민선 2회) 경북 지사를 지내고 있다.

이 충북 지사는 충북 제천고를 졸업한 뒤 1963년 9급 공채시험에 합격한 뒤 서울 광화문 우체국에서 동전 수거원으로 공직을 출발했다. 야간 대학에 다니면서 행정고시에 합격(66년), 서울시 행정과장, 용산ㆍ성북ㆍ동대문 구청장, 주택국장, 교통국장을 거쳐 청와대 내무행정비서관을 지낸 뒤 관선 충북 지사(92~93년)와 관선 서울 시장(93~94년)을 역임한 데 이어, 민선 충북 지사 2ㆍ3기를 맡는 등 ‘9급 신화’를 이어 가고 있다.

김 제주 지사는 전주고를 나와 1964년 제주시 9급 행정서기보로 공무원을 시작해 제주도 기획담당관을 거쳐 40대 초반에 관선 남제주 군수를 지낸 뒤 제주도 행정 부시장, 관선 제주 시장 등 탄탄대로를 걸어 왔다. 민선 2~3기 제주 시장에 연거푸 당선된 뒤 지난해 제주 도지사 보궐 선거에서 당선됐다.

열린우리당 김혁규 상임위원 역시 9급 고졸 출신으로 부산 동성고를 나와 경남 창녕군 면사무소에서 공무원을 시작해 내무부 지방재정과(7급)에 근무하던 중 71년 미국으로 건너가 사업에 성공한 뒤 귀국, 김영삼 전 대통령 민정비서관에 이어 관선 경남 지사(93년)가 됐다. 이후에도 두 차례 민선 경남 지사에 당선됐지만 중도에 하차하고 참여정부에 합류, 노무현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을 거쳐 17대 국회의원(비례 대표)이 됐다. 김 의원은 도지사 재직시 기업 경영 마인드를 도입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여권 내에서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되고 있어 이것이 현실화될 경우 9급 고졸 출신 중 최고위직에 오르게 된다.

현재 9급 공무원이나 앞으로 9급 공무원으로 공직의 첫발을 내디딜 지망생들에게 ‘9급 고졸 신화’는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 참여정부 들어 공직 사회에서 학벌이나 고시 합격자 우선 관행과 지역 안배 등이 약화되고 능력을 중시하는 흐름도 신화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 올해 2,125명을 뽑는 9급 공무원 공채 시험에 17만8,8802명이 응시, 평균 84대 1(특히 교육행정직 503대1, 일반행정직 296대 1)이라는 사상 최고의 경쟁률을 보인 데에는 청년 취업난이라는 시대적 상황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풍찬노숙의 설움을 겪은 이들이 또 다른 ‘신화’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현실은 매우 냉혹하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행정부 공무원 정원 55만9,783명 중 9급 공무원 5만4,846명(2005년 1월31일 기준)과 지자체 공무원 26만4,533명 중 9급 공무원 3만5,739명(2004년 12월31일 기준) 가운데 5급 사무관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9급이 3분의 2 이상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농림부의 박상윤 서기관(4급)은 9급 공무원 출신으로 33년을 근무했지만 아직 4급에 불과하다. 박 서기관은 ‘9급 신화’에 대해 “1960~70년대에 새 부서가 늘어나고 공무원이 적었을 때는 승진도 빨라 ‘9급 신화’가 가능했을 지 몰라도 조직이 안정되고 공무원 적체가 계속되는 요즘 상황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굅?말했다. 9급 공무원으로 출발, 25년째 근무하고 국세청의 오동교(48) 조사관(6급)도 “승진을 위해서는 최소 복무 기간이 ㄹ필요하고, 공무원 조직이란 게 안정적인 만큼 고시 합격 같은 특별한 경우가 없으면 초고속 승진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이너리티’를 배려하고 그들에게 보다 많은 기회를 제공하려는 사회 흐름에 비춰볼 때, ‘9급 신화’의 가능성도 그 만큼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우물을 넓고 깊게 파서 전문성을 터득해 나가는 동시에 자기를 계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원만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써야 한다며 신화의 주인공들은 한목소리를 냈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5-03-09 14:24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