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배구조 개선 순기능도

[외국계 자본, 약? 독?] 과세체계 허점 이용 막대한 투자이익
기업 지배구조 개선 순기능도

우리나라의 자본 시장 개방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외국인이 직접 주식을 살 수 있도록 처음 증권 시장의 문을 연 것은 1992년이다. 하지만 개방 초창기 주식 투자 한도는 그리 높지 않았으며 이후 조금씩 확대됐다.

그러던 상황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한 것은 바로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였다. 당시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한 우리 정부는 앞뒤 가릴 여유도 없이 국제통화기금의 요구에 따라 자본 시장을 사실상 몽땅 개방했다.

환율은 2배나 오른 데다 초고금리 정책을 강요받은 상태의 한국은 단박에 국제 투기 자본의 황금어장으로 떠올랐다. 게다가 주가는 곤두박질쳐 국내 상장 기업들은 외국 기업들의 손쉬운 인수합병(M&A)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우리에게 악몽이었던 IMF 위기가 외국 자본에게는 ‘코리안 드림’이라는 다른 얼굴로 다가갔던 것이다.

하지만 한 푼의 달러가 아쉬웠던 우리로서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외국 자본의 유입으로 기업과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이 촉진되고 선진 경영기법과 첨단 기술이 이전될 것이라는 기대를 위안으로 삼기도 했다.

그리고 7년여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지난 1월 “제일은행 매각이 실패작이었으며 이를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외환위기 때 제일은행을 매각해 대외 신인도를 높였지만 선진 금융기법을 전수받겠다는 당초의 정책 기대효과는 전혀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굳이 이 전 부총리의 말이 아니더라도 대다수 국민들은 제일은행 매각에 대해 아쉬움과 억울함을 토로한다. 불과 5,000억원의 헐값을 받고 외국계 펀드인 뉴브리지캐피탈에 매각한 데다, 이후 무려 17조원대의 공적자금을 투입했지만 5조원이 넘는 돈을 회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5년 만에 제일은행을 다시 팔아 1조원이 넘는 차익을 얻은 뉴브리지캐피탈에 조세 피난처 이용이라는 과세 체계의 허점 탓에 한 푼의 세금도 물리지 못했다.

한국은 외국자본의 황금어장
외국 자본의 어두운 그늘이 어디 이 사례뿐일까. 서울 역삼동의 스타타워 빌딩을 매입했다 되판 론스타도 2,600억원의 차익을 얻었지만 본사 소재지인 벨기에와 한국 간 조세협약 덕에 세금을 피해 갔다. 외환은행을 갖고 있는 론스타는 향후 이 은행 지분 매각 때도 엄청난 차익을 실현하는 대신 세금을 전혀 내지 않을 전망이다. 칼라일도 한미은행을 씨티그룹에 팔아 7,000억원 대의 이익을 남겼지만 역시 조세 피난처를 활용해 세금을 물지 않았다.

이처럼 IMF 위기 이후 빗장 풀린 국내 자본 시장에서 외국 자본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손쉽게 벌어들이자 해외 언론은 “한국은 외국인들의 놀이터”라며 조소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지금껏 외국 자본의 돈벌이에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던 정부가 세무조사 등의 이례적인 조치를 취하고 나선 배경이기도 하다.

서울 파이낸스 센터. 박철중 기자

한때 론스타 코리아에 몸담기도 했던 우병익 KDB앤파트너스 사장은 “한국은 IMF 위기로 인해 아무런 준비 없이 외국 자본을 받아들였다가 한마디로 이들에게 당한 꼴이 됐다”며 “5%룰이나 과세 조치 등을 통해 외국 자본에 대한 ‘퀄리티 컨트롤’을 진작 했어야 한다”고 안타까워 했다. IMF 직후에 밀물처럼 들어온 투기 자본들이 이미 한탕을 하고 나간 마당에 최근 정부의 감독 강화 조치는 ‘사후약방문’이라는 것이다.

국내 자본 시장이 외국 자본들에게 얼마나 휘둘리는지는 증시를 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다. 2004년 말 기준으로 거래소 시장의 외국인 지분율은 절반에 가까운 42%에 달한다. 역대 최고의 비중이다. 이 같은 외국인 지분율은 아시아 1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위에 해당한다는 지적이다.

사실 지분율 그 자체만으로 시비를 걸 수는 없다. 외국인들이 琉매?한국 증시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 외국 자본의 투자 행태다.

외국인 주주들이 챙겨가는 배당금은 한 예다. 지난해 12월 결산 상장 기업의 현금 배당금은 총 10조1,400여억 원에 달했는데, 이 가운데 외국인의 몫이 47%인 4조8,300여억 원이나 됐다. 또 전체 배당금에서 차지하는 외국인의 비중은 2001년 이후 매년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다. 최근 국내 기업들의 실적이 크게 향상된 데 따라 배당금의 절대 규모도 크게 늘었다.

김용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 연구원은 “중국에서는 외국 자본의 과실 송금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는데 한국 주식 시장에서는 배당금의 절반이 해외로 유출된다”며 혀를 찼다. 지나친 배당은 투자 재원을 축소시키기 때문에 기업의 미래 활력을 갉아 먹는다는 지적이다.

외국인의 지분율 확대로 인한 우량 기업의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험 증가도 첨예한 논란거리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대외 자본 개방의 허와 실’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내 상장 기업 10개 중 하나는 지분 구조상 잠재적 경영권 위협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의 지분율이 국내 최대주주보다 높은 기업이 전체 499개사 중 53개(2004년 말 기준)로 10%선에 달한다는 것.

주목할 것은 우량 기업일수록 외국인 지분율의 비중이 더욱 높았다는 점이다. 시가 총액 상위 20개 기업 중 18개가 외국인 지분율 30%를 넘었고,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 포스코, 현대차 등 7개 기업은 50%를 상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투명경영 확산에 큰 기여
물론 적대적 M&A에 노출되는 환경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시각도 있다. 국내 기업들 사이에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나 투명 경영이 확산된 것도 바로 외국인 주주들의 입김 탓이 크다는 분석인 것이다.

또 자본ㆍ기술ㆍ고용이라는 삼박자를 갖춘 ‘좋은 외국 자본’의 역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른바 외국인 투자 기업(외투 기업)을 일컫는다. 삼성중공업 중장비 부문을 인수한 뒤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볼보 건설기계코리아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한 외국계 기업의 고위 관계자는 “투기 자본이 설쳐대는 통에 외국 자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면서도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직접 투자를 한 외국 기업들이 한국 경제에 기여하는 부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정종남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국장도 “외국 자본을 모두 배척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다만 국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면밀히 따져보는 태도는 이제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5-04-27 19:33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