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천하 앞에 '팔 걷고 부엌으로 간' 남편들

[추석 특집] 여풍(女風)당당 한가위…명절 스트레스는 남자 몫?
여인천하 앞에 '팔 걷고 부엌으로 간' 남편들

명절 차례에 여풍(女風)이 거세다.

설, 추석만 되면 등이 휘도록 음식을 해대며 부엌살이를 했던 여자들이 ‘평등 명절’을 외치며 차례 형식을 바꾸고 있다. 차례 참여는 물론 여자들의 명절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한 아이디어들이 속출하고 있다.

뒷방에 앉아서 명령만 하던 남자들도 이젠 ‘마나님’ 눈총에 슬그머니 소매를 걷고 전을 부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여인들의 입김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요즘은 노동 분담 차원을 넘어 아예 차례와 제례의 형식 자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차례나 제사를 딸 아들 구별 없이 번갈아 모시는 윤회봉사(輪回奉祀)가 확산되고, 주문 상차림, 사찰 합동 차례, 여행지서 차례 지내기 등도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추석 풍경이 됐다.

일부는 아예 인터넷으로 차례상을 차리고 추모관을 만들어 추석 차례를 대신하기까지 한다.

여성의 수고를 최소화 하는 추석 지내기 모습은 그야말로 ‘명절 여인천하’다. 이는 ‘안주인’들이 웃어야 집안이 편안해지는 핵가족 세태의 반영이기도 하다. 명절 증후군 없이 여성들도 웃고 지내는 달라진 추석 차례 몇 가지를 소개한다.

<2남1녀 가정의 막내 아들에게 갓 시집 간 A씨. 추석을 보름 앞두고 손위 동서로부터 조용히 부름을 받고 큰집을 찾았다. 손위 동서의 말인즉 “7년 전에 시집와 그 동안 집안 대소사뿐 아니라 매년 10여차례 제사를 혼자 감당하느라 물심양면으로 너무 지쳤다”며 “이번 추석부터 차례나 제사를 번갈아 모시자”는 당부 아닌 당부였다.

시가 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집안에 큰 어른 격인 손위 동서의 명을 그 자리서 거절할 수도 없고 해서 남편과 의논하겠다며 돌아왔다. 그 날 밤 남편은 “그 동안 형님 내외도 고생하셨고 차남도 자식이니 못할 것 없다”며 흔쾌히 ‘모시자’고 했다. 결국 번갈아 차례, 제사를 모시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명절 음식을 직접 준비한 적이 없던 새댁으로선 그저 눈앞이 캄캄했다. 며칠 차례상 마련에 밤잠을 설치던 새댁은 신세대답게 인터넷을 떠올렸다. 몇 번 클릭하니 눈 앞에 차례상이 입맛대로 펼쳐졌다. 20만원 대 가격의 차례상이 단번에 해결됐다. 차례상 비용은 형 가족과 시누이와 분담할 계산이었다.

그 해 추석 새댁 집에 온 가족이 모였다. 다들 새댁의 신세대다운 기지에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그 칭찬 릴레이를 타고 새댁은 이번엔 결혼한 시누이에게 슬쩍 “딸도 자식이니 시누이도 차례와 제사를 모시는 게 어떠냐”고 제의했다.

일순 시누이는 ‘그래도 뼈대 있는 집안에서 여자가 어떻게…’ 하는 거부의 뜻을 비쳤지만 딸 아이 하나라고 그토록 아껴주시던 부모 은혜와 여자끼리 노동을 분담하자는 뜻에서 생각을 고쳐먹고 우선 명절 차례만은 모시기로 했다.>

A씨 가족처럼 장ㆍ차남뿐 아니라 딸까지도 차례와 제사를 번갈아 모시는 윤회봉사(輪回奉祀) 가정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뼈대 있는 집안’이란 명분을 지키려 맏아들과 맏며느리 허리만 휘게 할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모두 노동과 비용을 분담해 명절 스트레스를 될수록 줄여 가자는 세태의 반영인 셈이다. 그래서 가족 모두가 웃는 ‘평등 명절’을 만들자는 취지다.

윤회봉사는 그래도 형제가 있는 경우에 가능하다. 요즘 같이 외아들, 외동딸 가정이 급속히 늘어나는 저 출산 시대에는 형제 간에 돌아가며 모시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머지않아 딸만 있는 집일 경우 어쩔 수 없이 딸이 결혼을 해도 친정 제사나 차례를 가져가 모시는 여성 제주(祭主) 풍속이 자리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여성 단체들은 여성 제주가 일반화 되면 앞으로 재산 상속에서도 남녀 평등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장남이 제사를 포함한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전통적 종법제(宗法制)가 점차 희미해지는 마당에 굳이 장남 중심의 상속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다.

<혼자였던 어머니를 여의고 3번째 추석을 맞는 외아들 B씨. 그동안 병든 어머니 수발에, 잦은 제사 준비에 고생 꽤나 한 아내에 늘 미안함 마음도 있고 해서 이번 추석 연휴엔 부부가 아들 내외와 동반해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추석에 그냥 놀러 가자니 아무래도 찜찜하다.

그래서 추석 전 일요일에 일단 성묘를 했다. 문제는 추석 차례. 고민하는 이들에게 아들 내외가 별 걱정 다 하신다 며 면박 아닌 면박을 줬다. 아들 내외의 설명은 여행지에서도 얼마든지 차례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묵을 호텔은 주문만 하면 추석 당일 객실까지 차례상을 배달해 준다는 것이다.

손수 차리는 상보다야 못하지만 조상님께 면목만은 살리는 묘안이라고 했다. 모처럼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여행지에서 차례를 지내는 정성을 부모님도 이해하시리라 생각하며 이들 가족은 추석 여행을 떠났다.>

이처럼 여행지에서 휴가도 즐기며 차례를 지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호텔 방에 차례상을 차려놓고 간편하게 차례를 지내거나, 여행지 근처 사찰에서 여는 합동 추석 차례에 미리 신청에 사찰에서 예를 올리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인터넷으로 차례상을 차려 놓고 조상에 대한 예를 올리는 경우도 있다. 전통적인 추석 풍경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가족들이 추석 연휴를 고생하지 않고 즐겁게 보내는 것을 조상들도 나쁘게만 보지 않을 것이란 실용주의 추석 풍경이다.

괜히 며느리들 스트레스 줘가며 옛날처럼 떡하고, 365일 굶다가 명절 하루 배불리 먹자는 식으로 음식을 해대고 하는 것이 꼭 전통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여성민우회가 권장하는 함께 웃는 평등명절 실천법

2001년부터 ‘평등 명절’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여성민우회 인천 지부는 올 추석에도 ‘함께 웃는 명절’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웃는 명절을 위한 지침으로 여성민우회는 추석 당일 ‘양가에 함께 찾아 가기’와 ‘함께 준비하는 명절’을 꼽았다. 여성민우회가 소개하는 여자들의 명절 스트레스 줄이기 캠페인 관련 이야기 두 토막.

명절에는 양가를 함께 찾아 뵙는다

<처음 결혼했을 때 명절이 되면 당연히 친정에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번 시아버님께서는 길이 많이 막히니까 친정에는 다음에 가라고 하신다.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아들의 불편함만 생각하고 며느리의 심정은 헤아려 주시지 않는 아버님의 말씀이 섭섭했고, 또 명절날 외롭게 계시는 부모님 생각에 눈총 받는 것을 무릅쓰고 차례가 끝나면 꼬박 꼬박 친정으로 향했다.

그러기를 7년, 이제는 아버님이 받아들이셔서 차례가 끝나면 "어서 챙겨서들 가거라"고 하신다.>

경비는 분담하고 음식 준비는 남녀가 함께 한다

<우리는 명절 경비와 일을 분담하고, 들어온 선물은 각자 나누어 갖는다. 모아진 돈에서 추석 준비 비용을 지출하고 남은 돈은 부모님께 선물한다. 경제적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아서 좋고 부모님께 효도도 하게 된다.

우리 집안 여성들은 한마음이 되어 음식 만들 준비를 모두 갖추어 놓고 남성들에게 자연스럽게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남자들은 둘러앉아 전을 부치면서 사는 얘기를 한다.

명절 차례를 다 지내면 동서들과 함께 같이 영화도 보러 가고 차 한 잔과 함께 모처럼 수다의 꽃을 피운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9-14 15:07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