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서 의 향기가 난다

[추석 특집] 연휴에 만날 연극배우 김지숙
그녀에게서 <로젤>의 향기가 난다

9월 8일 오후 강남의 한 까페에서 만난 배우 김지숙(49)은 막 요가를 끝내고 온 뒤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까만 원피스를 걸친 그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20,30대라고 여길 만큼 온 몸에 생기와 탄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의자에 앉으며 그가 던진 첫 마디가 뜻밖이었다. “보약이 필요한 것 같아요.” 세월이 비껴간 듯 젊음이 넘치는 그에게도 ‘로젤’은 버거운 대상인 듯 했다.

“로젤의 삶이 너무 굴곡이 많아 그걸 연기하는 배우는 무척 고통스러워요. 어제는 한 방송에서 마지막 부분만 연기했는데도 기운이 쫙 빠지는 것 같았어요.”

‘로젤과 김지숙’. 더 이상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 연극과 배우다. 지난 1990년 초연이래 3,000여회 공연 동안 100만 관객이 로젤이 된 김지숙을 봤다.

사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대사가 나올 정도로 배우에겐 분신 같은 연극인데, 그는 9월16일부터 서울 강남 우림청담씨어터에서 무대에 오르는 공연을 앞두고 새삼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두려우면서도 설레여요. 연습하면서 대사 하나하나가 달라진 게 느껴져요. 조금 더 부드럽고, 여성스럽고… 제 안에서 새롭게 탄생할 로젤에 대한 기대감이 커요.”

극은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여성이 어린 시절 친구를 찾아 다니며 불행했던 자신의 삶을 들려주는 형식이다. 독일 작가 하롤트 뮐러의 1인극. “초연 때는 가부장적 남성 문화로 인해 피폐해진 로젤의 삶을 항변하듯 ‘과격하게’ 접근했어요. 그런데 근래에는 로젤을 대하는 마음이 확연히 달라졌어요.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게 아니라 함께 조율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거죠.”

내년이면 연기 인생 30년을 맞는 그는 로젤과 그 절반의 세월을 동고동락했다. 사람들은 김지숙 속의 로젤을 보고, 로젤이 된 김지숙을 통해 연극에 빠져들어갔다.

그러나 로젤과 그는 닮은 듯 하면서도 사뭇 다르다. 로젤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짓밟힌 나약한 여성이라면 그는 소외된 약자의 권익을 대변하는 투사에 가깝다.

그간 성폭력상담소와 주한미군범죄근절을 위한 운동본부, 여자교도소 재소자 위문 공연 등 사회의 그늘진 곳을 두루 찾아 다니며 공연을 벌여온 그의 홈피에는 저마다 아픈 삶을 호소하는 사회 각층의 e-메일이 쏟아진다.

오죽하면 그가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스트레스 치료사가 되고 싶다고 할까. “상담하면서 로젤을 통해 경험한 사회의 편견을 되새기죠.” 사람들과 소통하며 그의 내면 속 로젤은 그렇게 하루하루 더 성숙해져 간다. “3,000여 회 공연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의 로젤로 무대에 올랐던 적이 없었다”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간다.

특히 이번 공연은 각별하다. 윤석화, 김성녀, 손숙, 양희경, 박정자 등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 6명을 초청한 PMC프로덕션(대표 송승환)의 ‘여배우시리즈’ 중 네 번째 무대다.

워낙 쟁쟁한 배우들이 모였으니, 제법 신경도 쓰일 터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돋보이고 싶은 여배우의 심리를 그는 이미 초월한 듯한 눈치다.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지숙의 의도는 모조리 빼고, 그저 로젤의 삶만 전달하고 싶어요.”

로젤의 연출도 자신이 맡았다. “제 자신을 믿게 됐어요. 배우한테는 그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는 신념이 가득해 보이는 눈빛으로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어떤 면에서 로젤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으며 장기 공연이 가능했는가를 직접 확인해 주셨으면 해요. 이 가을에 삶의 자극을 원하는 분이라면 꼭 로젤을 만나러 오세요.”

9월 16일~11월 13일 우림청담씨어터 수ㆍ목 오후 8시, 금 오후 3시 8시, 토 오후 3시 7시, 일 오후 3시, 3만원(S석)ㆍ5만원(VIP석) (02)569-0696.


배현정기자


입력시간 : 2005-09-14 17:38


배현정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