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 로봇연구회 '제틴'

‘로봇에 웃고 사랑에 울고.’

뮤지컬의 제목이 아니다. 서울시립대학교 마이크로 로봇 연구회 제틴(ZETINㆍzetin.uos.ac.kr)의 회원, 로봇 마니아들의 이야기다.

“로봇에 빠지면 학교 앞에 집을 두고도 일주일 안 들어가게 되고, 안 씻게 됩니다. 그렇지만 로봇이 탁! 움직이기라도 하면 그 동안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는 일순간에 날아가버리죠. 로봇에 빠져드는 사람들도 바로 이 때의 쾌감, 희열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로봇에 안 빠질 수가 없습니다. 이런 날이 잦은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멤버들이 사귀던 여자 친구들과 헤어지게 됩니다. 지금 여자친구 있는 멤버가 아무도 없네요. ‘로봇의 저주’ 탓이죠.” 전자전기과 김형기(25) 군의 얘기다.

여자친구보다 로봇이 더 좋아

과연 말 그대로 로봇의 저주일까. “한번 몰입하게 되면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다른 곳으로 발이 떨어지지 않는 어떤 마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여자친구한테 전화 한 두 통씩은 해줘야 하는데, 그마저도 잊게 만드는 무슨 힘이 있다니까요.

청량리 역에 내린 여자 친구로부터 짐 좀 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어떤 친구가 ‘택시비 내가 줄테니까, 택시타고 와!’ 했다가 그 자리서 이별통지문자를 받았다는 거 아닙니까.”

이들은 그 상처를 로봇으로 치유하고 있는 듯 했다. 같은 학과 송태효(23) 군의 이야기다. “이젠 무슨 대회를 나가도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고, 심지어 우리를 보고 전의(戰意)를 상실해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기권하는 팀들도 보입니다.” 최근 서너 달 동안에 있었던 각종 로봇대회에서 제틴이 올린 쾌거가 이 얘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능형 모형차 설계 경진대회 우승(7월15일), 전국 트레이서 로봇 경연대회 우승(8월21일), 시립인천대학교 마이크로마우스 경연대회 우수상(10월4일), 2005 한국 지능형 로봇 경진대회 대상 (10월14일), 로봇피아드2005 청소로봇부문 및 극한작업로봇부문 산업자원부장관상(10월28일, 29일) 등 수십 건의 수상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제틴은 ‘ZEro To INfinite’가 압축된 말로 0에서 무한대까지 즉,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의미다. 13년 전 학과 소모임으로 시작, 2001년에 학교의 중앙 동아리로 승격됐다.

학과 소모임에서 시작한 탓에 아직은 대부분의 회원이 전자전기과(학부) 학생이고, 98학번에서부터 05학번에 이르기까지 모두 30여명의 학생들이 활동하고 있다.

동아리 방은 학생회관 3층에 자리잡고 있다. 상장과 상패들이 한쪽 벽에 왜 진열되다 말고 어지럽게 널려 있을까. “처음에는 벽에다 걸기도 하고 정성스럽게 줄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공간이 좁은 탓도 있겠지만 지금은 상패가 너무 많아 ‘처지곤란’일 정돕니다.” 어지럽게 널린 것은 상장과 상패 뿐이 아니다. 5~6평 남짓한 동아리 방에는 부서진 의자, 전원 공급장치와 각종 전자측정 장비, 전기 인두와 납, 회로기판, 각종 전자 부품들로 난잡하다.

등받이가 떨어져 나간 벤치는 배달된 중국요리를 펼쳐 놓고 먹는 ‘식탁’으로, 밤샘 작업에 노곤한 몸을 쉴 수 있는 ‘침대’로 쓰인다고 했다.

한쪽 구석에는 본체의 커버도 없이 흉물로 줄지어 선 너댓 대의 컴퓨터들이 보였다. 길가에 버려진 컴퓨터들에서 쓸만한 부품들만 모아 만든 것이라고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제틴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성능은 2001년에 출시된 제품 수준. 쓰레통에서 건진 물건 치고는 쓸만하다고 했다.

로봇피아드 2005 수상작인 청소로봇(왼쪽)과 극한 작업로봇(가운데)앞에서 포즈를 취한 제틴 회원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현진욱, 곽성훈, 김형기, 조용준, 송태효, 김윤배 군. 임재범 기자

제틴이 주로 출전하는 경기는 ‘마이크로 마우스 대회’와 ‘라인 트레이서 대회.’ 최근에는 이들보다 업그레이드 된 실용로봇, 지능 로봇 경기에도 출전하고 있다.

로봇 경기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마이크로마우스 경연대회’는 ‘미로 찾기 로봇’으로 잘 알려진 로봇이 임의로 만들어진 미로를 최대한 빨리 빠져 나오는 경기다.

출전 마우스 로봇 1대 제작에 비용은 20만~30만원 선에서 결정되고 제작 기간은 숙련도에 따라 차이를 보이지만, 3개월 정도 걸린다.

이후 관람객들에게 스릴과 재미를 더해 주고 있는 대회가 라인 트레이서(line tracer)다. 적외선 센서를 장착한 로봇을 검은 주행판 위에 그어진 흰색 라인을 따라 달리게 해 완주시간을 측정하는 경기로 로봇 1대 제작에 드는 비용과 기간은 마우스 로봇의 그것과 비슷하다.

제틴이 참가한 대표적인 지능, 실용 로봇대회는 지난 달 말에 막을 내린 ‘로봇피아드 2005.’ 이 대회는 별도로 개최되던 지능형로봇기술평가대회, 로봇올림피아드, 휴머노이드로봇 대회가 통합되어 총 16개의 종목에서 로봇들이 경합을 벌였다.

‘로봇의 국제올림픽’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을 정도로 국내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회다. 올해는 10개국 320개 팀이 참가했다.

또 이 대회는 제작비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기도 하다. 제틴이 참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청소 로봇 제작에 100만원, 극한작업로봇에 200만원의 지원을 받았다.

이 대회의 청소로봇 부문에 출전해 대상을 탈 수 있게 한 로봇은 리버포(Reaver4). 초음파 센서를 이용해 벽이나 가구와의 거리를 측정하고 피해가면서 다양한 패턴으로 구석구석의 바닥 먼지를 흡입하는 진공 청소 로봇이다.

제작에는 5명의 ‘로봇 폐인’이 100만원의 비용으로 3개월 동안 매달렸다. “대회 때 산업부 차관께서 ‘모 회사의 청소 로봇보다 낫다’고 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죠.” 이 로봇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제작팀장 현진욱(27)군이 겸연쩍어 하며 하는 얘기다.

경기는 바닥에 흩어진 쌀을 흡입하는 것으로 진행됐다는 그는 “경기 룰에 맞춰서 제작된 로봇이라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청소 로봇과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다소 무리일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 외에도 붕괴된 건물 내에서 생존자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진행된 극한작업로봇부문에서 제틴은 록타이트(Rok tite)를 출전시켜 산업자원부 장관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온갖 로봇으로 가득찬 동아리방. 임재범 기자

이 로봇은 궤도바퀴를 이용해 계단, 언덕 등의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곳을 탐색하는 로봇. 5명의 학생(팀장 송태효)이 4개월동안 250만원을 들여 만든 것이다.

오기로 버티고 자신과 싸우는 작업

이 정도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동아리라면 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인기도 있을 법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의외다. “매년 봄에 동아리 회원들을 모집하면 30~40명 정도 입회합니다.

하지만, 한 두 달 뒤엔 그 수가 10명 수준으로 줄어들고, 여섯 달 뒤엔 그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소위 엑기스로 불리는 1~2명만 남게 되죠.”

록타이트(극한작업로봇) 제작에 참여했던 곽성훈(25)군은 평소 그 원인을 나름대로 생각해뒀던 것을 풀어놓았다. “회로 기판 하나에 수백 가닥의 선을 땜질해서 연결하는데 그 중 한 가닥만 잘못 붙여도 꼼짝도 않는 게 로봇이다 보니, 문제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일주일 열흘을 동아리 방에 틀어 박히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오기로 버티고 자기 자신과 싸우는 일이죠. 학점 관리하랴 취직 공부하랴 요즘 같은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학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든 사물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보이게 마련. 옆에 있던 막내 김윤배(21) 군이 받아 쳤다. “실제로 이 동아리를 거친 선배들이 더 좋은 곳으로 취직을 했습니다.

로봇 만드는 데에는 물리학, 전자공학, 전기공학, 컴퓨터 프로그래밍, 기계공학, 제어계측 등 수많은 관련 지식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로봇만 잘하면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습니다. 확대 해석하면 어느 한 군데서 일하다가도 다른 분야로 가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거죠.” 학교에서 이론 공부만 하다 나가는 것보다, 로봇창작을 이론과 실습을 융합하는 기회로 생각하면 로봇 만드는 일이 취업에 더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제틴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 로봇 실력만 느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술과 담배도 많이 늘게 됩니다.” 대회가 임박한 날에는 담배의 경우 하루 1갑은 기본이고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은 마당에 거의 매일 로봇 얘기를 안주 삼아 알코올(술)로 그들의 몸을 방부처리 한다고 했다. 곽성훈 군이 웃으면서 하는 얘기. “여기 온 것도 1학년 때 진욱이 형이 술을 많이 사줘서 오게 된 겁니다.”

현진욱 군을 비롯한 제틴의 학생들의 꿈은 보다 다양한 로봇을 만들어 보는 것이다. “학생신분의 특성상 시간적 여유는 되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싼 로봇만 만들어 왔습니다. 대회에도 부지런히 나가고, 상금도 모아서 2족 보행 로봇, 인공지능 로봇에 도전할 겁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