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초 정국구상 발표"에 "어떤 내용일까" 정치권 촉각

노무현 대통령의 ‘산행(山行)’은 아직 진행중이다. 지난달 30일 노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 60명과 함께 청와대 뒤 북악산에 오른 후 던진 화두에 대해 아직도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날 산행은 집권 여당이 10ㆍ26 재선거에 참패, 국정운영에 빨간불이 켜진 데다 당내에서 선거 패배에 대해 ‘대통령 책임론’이 불거진 직후에 이뤄진 것이어서 정가의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산행하는 동안 일체 정치적 발언을 삼갔다. 동행한 기자들에게도 편안한 산행을 주문했고 만세동방 계곡에선 약수 한 잔씩을 권하기도 했다.

현안과 관련, 노심(盧心)을 내보인 것은 등산로 입구에서 “어제 잘 주무셨느냐”는 질문에 “그 동안 정치하면서 겪어온 풍파를 돌이켜보면 요즘 일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받아넘긴 게 전부였다.

노 대통령은 산행을 마치고 인근 식당에서 오찬을 하면서 10ㆍ26 재선거를 전후해 담아두었을 ‘구상’을 꺼냈다. 그에 앞서 잔을 들고 “마주보고 하는 건배는 대연정이고, 옆으로 하는 건배는 소연정 건배”라며 의미 있는 농담을 건네고는 캐나다 멀로니 전 총리를 거론했다.

노 대통령은 멀로니 전 총리가 1991년 부가세를 도입, 민심이반으로 93년 총선에서 의석이 169석에서 2석으로 줄어드는 등 당을 몰락시켰지만 재정과 경제를 구했다며 극찬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개혁을 추진하다 죄절한 프랑스 드골 대통령과 독일의 슈뢰더 전 총리의 고뇌를 얘기했다.

그리고 숨을 고른 뒤 “내년 1월부터 취임 3주년인 2월25일 사이에 지난 임기 평가와 한국 미래의 과제, 내 진로에 대해 전체적으로 정리해서 국민들에게 발표하겠다”며 국정에 대한 로드맵을 밝혔다. “지금 구상을 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노무현 구상 놓고 해석 분분

노 대통령의 ‘구상’이 나오자 정치권에서는 이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야당과 여당 일각에서는 ‘정치적 승부수’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노 대통령이 위기 때마다 특유의 승부수를 던져 위기를 넘겨왔다는 판단에서다. 대선 때 정몽준 후보와의 후보 단일화 시도, 야당의 탄핵 발의를 불러온 재신임 카드, 지지도 추락에 따른 대연정 제시 등이 대표적인 예라는 것이다.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은 탈당, 조기퇴진, 개헌 등 ‘노무현 구상’의 몇 가지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맹 의원은 “정기국회에서 사립학교법 개정, 선거구제 개편, X파일 등을 둘러싼 공방으로 정국이 파행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를 빅뱅(대폭발)의 1단계로 규정했다.

이어 노 대통령이 정국파행에 대한 국민비판이 정점에 달하는 시점에서 정치권 전체를 기득권과 지역주의에 안주하는 구세력으로 규정, 국민을 상대로 정치개혁을 선언하며 열린우리당을 탈당하는 2단계 수순을 밟을 것으로 내다봤다.

3단계로는 “구정치세력 일소와 지역구도 해소를 위한 선거구제 개편을 헌법개정으로 풀 수 밖에 없다”며 개헌 및 임기단축 로드맵을 내놓은 뒤 정치권에 수용을 압박한다는 것이다.

여당 일각에서도 노 대통령이 우리당 탈당, 권력이양, 임기단축, 개헌 등 정치적 결단이나 제안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은 “노 대통령의 최근 행보는 당정분리라는 원칙을 넘어 당과 거리를 두려는 인상이 짙다. 여당 내에서 대통령 비판이 거세지고 국민 여론도 ‘국정에만 전념하라’는 쪽으로 기운다면, 탈당과 거국내각 구성의 카드를 꺼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풀리지 않는 국가적 과제의 해법을 국민투표에 회부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이 산행에서 퇴진을 담보로 정책을 국민투표나 총선에 거는 승부수를 띄운 멀로니 전 총리, 드골 전 대통령, 슈뢰더 전 총리 등을 언급한 것은 그러한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이 경우 자연스럽게 재신임 문제가 부각될 수 있다.

대표적 친노(親盧) 인사인 김두관 대통령 정무특별보좌관은 10일 주간한국과의 인터뷰에서 “대연정은 한나라당의 거부로 정리됐지만 지역구도 해체, 국민통합, 양극화 해소라는 가치는 유효하다”고 해 대연정론 자체가 정파를 초월한 중립적 국정운영을 의미한다고 할 때 내년 초 노 대통령의 탈당도 점쳐진다.

김 특보는 또한 “(대통령이 언급한)사회갈등을 해결하는 의사결정구조를 정착시키는 구상 속에 권력구조를 바꾸는 문제, 개헌이라든지 선거구제가 포함될 수 있다”고 해 노 대통령의 내년 선택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청와대 "임기 건 승부수 아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노 대통령이 내년 초 제안하겠다고 밝힌 ‘사회적 의사결정구조’를 포함한 미래 국정구상과 관련, “대통령의 개인적 결단이나 임기를 걸고 하는 정치적 승부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권력이양이나 탈당 등의 관측은 대연정 제안 당시의 관점에서 비롯되는 선입견”이라며 “대연정 제안은 종결된 만큼 그런 차원에서 대통령의 구상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노 대통령의 ‘진로’ 발언과 관련, “임기를 포함한 개인적 거취나 정치적 승부수를 말한 게 전혀 아니다”며 “탈당도 고려하고 있지 않으며, 한국의 내일에 대한 얘기를 임기동안 어떻게 풀어가고 해결할 것인가를 포괄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김두관 특보도 “대통령의 구상은 참여정부 후반기에 들어서 실천단계에 있는 국정과제 및 프로그램을 언급한 것으로 향후 2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바라보고 해결할 국가적 어젠다를 제시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 문제, 민생경제 문제, 사회통합 문제 등을 대표적 예로 꼽았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 기자들과 산행 후 가진 오찬에서 주로 국가균형발전, 사회개혁, 미래문제 등을 거론했다. 남은 임기 동안 역점을 둬야 할 부분에 대해 “우리 미래의 운명을 좌우하는 오늘의 문제들을 풀어가기 위한 사회적 시스템을 국민과 더불어서 함께 논의해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당ㆍ정ㆍ청 간 관계에서 '당의 정치 중심론'을 강조하고 이해찬 총리에게 힘을 실어줘 ‘분권형 국정운영’의 기조는 계속 유지해나가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열린 우리당은 정세균 의장이 11월 9일 서울 영등포구 당사에서 열린 '국민과의 대화' 토론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최홍수 기자

이는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에 있어 대통령은 ‘미래의 국가 위기 해법’을 비롯, 중장기 국정 어젠다들을 챙기고 외교,안보 등 외치(外治)에 주력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의 입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내년 초에 밝힐 구상은 청와대의 주장대로 국가적 어젠다를 제시하는 담론형 제안이지, 정치적 제안의 틀은 아니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구상이 온전히 펼쳐지기에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적지 않다. 언제든 ‘정치적 승부수’로 전이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다.

우선 국정운영을 어렵게 하는 20%대의 낮은 지지율이다. 최근 일부 상승 조짐을 보이고 있으나 참여정부에 대한 불신, 우리당에 대한 실망 등이 겹쳐 내년 지방선거까지 20~30%대를 오르내릴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사회(국민) 통합이라는 노 대통령 구상의 중요 부분이 위협 받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정치적 승부수’를 띄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재와 같은 여당 내 갈등과 야당과의 대립은 정치적 양극화 해소, 나아가 사회갈등을 해결하는 의사결정구조를 정착시키겠다는 노 대통령의 구상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여당이 갈등을 수습하지 못하고 분당으로 치달을 조짐을 보이거나, 중요한 국가적 과제가 야당과의 시각차로 무산 내지 진척이 안 되는 등 의사결정구조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탈당을 포함해 권력구조 개편이나 개헌 등 정치적 수단이 결행될 여지가 높아진다.

예컨대 참여정부의 핵심 과제인 지방분권, 국가균형발전, 동북아경제중심국가 건설 등의 목표가 야당과의 입장차로 입법에 제동이 걸리거나 헌법재판소에 의해 중지되는 현실은 노 대통령의 구상에 인내와 탄력성을 감소시킬 수 있다.

개헌 등 정치구조에 변화 올 수도

남북문제도 변수다. 최근 강정구 교수 사건을 둘러싼 국가보안법 문제나 헌법 개정을 수반할 영토조항에 대한 여야의 시각차나 여론은 뚜렷한 대립을 보였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주관적 판단임을 전제로 “민생 등 경제분야와 정치개혁, 남북관계가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의 3대 의제가 될 것”이라며 “특히 남북관계는 정상회담과 연계돼 그 어느 때보다 비중이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노 대통령이 밝힐 구상 중에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획기적인 방안이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현재 한나라당은 정부의 대북 정책에 부정적이거나 속도조절을 요구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남북문제에 대한 접근이 예상을 뛰어넘는 전진적이거나 폭 넓은 대북지원을 수반할 경우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를 놓고 여야는 심각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다.

우리당에서 친노계로 분류되는 한 초선 의원은 “남북문제는 노 대통령의 구상과 한나라당 간에 큰 차이를 보일 것”이라며 “담론 수준이 아닌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고 어려움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우리당의 한 재선의원은 노 대통령의 구상과 관련, “정치분야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이 어떻게 표현될지 속단하기 어렵다”며 “당초 연정론을 주장한 게 대통령의 일시적인 생각이 아니었던 만큼 정치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또 다른 초선 의원은 “여러 현안들과 관련해 구체적이지는 않더라도 개헌문제에 관한 언급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탈당 가능성에 대해서는 “내년 초는 아니다”고 단언했다.

노 대통령이 집권 4년 차에 밝힐 국정 구상의 얼개는 ‘미래’ ‘통합’ ‘개혁’으로 압축된다. 참여정부의 실천 로드맵을 표방한 이 그랜드 플랜이 정파적 이해를 떠나 장애물을 넘어 순항할 지, 아니면 정치적 암초에 걸려 수포로 돌아갈 지 벌써부터 정가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