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졸레누보 등 영향 '비싼 술' 인식 사라지며 대중화, 업계도 거품빼기 골몰

한국 와인시장에 ‘가격 전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특별한 사람과 특별한 곳에서 ‘폼 잡고’ 마시는 고급 사교문화의 상징 제품처럼 여겨왔던 와인을 비싸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웰빙 바람을 타고 누구나, 어디서나 마시는 술로 대중화하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보통의 소비자들이 수입 와인의 가격에 거품이 없는지 따져 묻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와인의 대중화는 소비자의 ‘반란’을 불러일으켰고, ‘가격 전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와인 가격에 대한 소비자 반란의 단초가 된 것은 ‘보졸레 누보’다.

보졸레 누보는 프랑스 부르고뉴 주 보졸레 지방에서 매년 첫 수확한 포도로 담은 햇포도주로 11월 3번째 목요일 0시(올해는 17일)를 기해 전세계에서 동시에 출시된다.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다리는 햇술이다. 한국에서도 보졸레 누보는 인기가 좋아 길거리 편의점에서도 팔릴 정도로 플래그아이템(Flagitemㆍ대표적 브랜드) 역할을 하며 와인 대중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보졸레 누보의 호들갑스러울 정도의 마케팅이 작년부터 갑자기 식었다. 언론 등이 제기한 가격문제 때문이다. 현지에서 병 당 5,000원 정도에 불과한 술이 한국에서만 유독 비싸다는 것이다.

물론 보졸레 누보는 비행기로 공수할 수밖에 없는 등 비싼 이유가 있다. 수입상들은 “보졸레 누보는 실제로는 다른 와인에 비해 마진이 적다”며 “고객 서비스 차원의 마케팅인데 비싸다고 욕까지 먹었다”고 억울해 한다.

이런 이유로 올해에는 작년 대비 30% 정도만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여하튼 보졸레 누보 탓에 국내 유통업계는 와인 가격의 진실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와인 가격의 거품빼기에 골몰하고 있다.

와인 가격전쟁을 몰고온 또 하나의 결정적 원인은 대형 할인점들에서의 와인숍 등장이다.

2000년 이후 급성장을 거듭해온 와인 시장은 올해 시장 규모 3,000억원(수입상 출고가격 기준)을 내다보고 있다. 시장이 커지다 보니 대형 할인점들이 너도나도 저가의 기획상품을 내놓으며 와인 소매시장에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소규모 와인 전문매장이나 와인 바에서 고가 와인만 접했던 소비자들에게 맛도 그런대로 괜찮은 1만원대의 와인을 소개했다. 결국 할인점 와인 코너 등장 후 몇 년 사이 ‘와인은 비싼 술’이란 등식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까다로운 유통과정

그렇다면 와인 가격의 진실은 무엇인가. 대부분이 수입인 와인의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은 세금, 물류비용과 도ㆍ소매 유통 마진이다.

우선 와인의 세금은 관세(수입가격의 15%)와 주세(수입가격과 관세의 합산 가격의 30%), 교육세(주세의 10%), 부가세(전체 합산가격의 10%) 등이다. 물류비용은 전체 가격의 3%정도다. 나머지는 유통과정의 마진이다.

관세청이 밝힌 지난해 와인의 평균 수입 가격은 병(750㎖)당 2.80달러(지난해 환율기준 3,243원)다. 고급와인을 대표하는 프랑스 와인의 경우 4.16달러(4,818원)로 5,000원에 못 미친다.

통관기준 가격(CIFㆍ운임, 보험료 등 포함 가격)이 4,818원인 프랑스산 와인의 세금 부과 후 가격은 관세(722원) 주세(1,662원) 교육세(166원) 부가세(741원) 등을 포함해 8,109원이 된다.

여기에 물류비(243원)를 더한 8,352원이 수입상의 마진을 뺀 와인의 수입 원가가 된다. 여기서부터는 국내 유통 단계에서 생겨나는 마진이 붙어 할인점이나 전문매장에서 대략 3만원 대의 가격으로 팔려 나간다. 분위기 값이 더해지는 레스토랑이나 와인바에서의 가격은 어림잡기도 힘든다.

한편 일본은 가격 대비 세금을 매기는 우리 방식의 종가제가 아닌 총량(㎖) 대비 세금을 매기는 종량제를 적용한다. 종량제 세금 적용은 일본의 시중 와인 가격이 한국의 60%대에서 형성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수입상과 소ㆍ도매상이 밝힌 와인의 높은 가격엔 일반 주류와 다른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와인은 수 천종에 달할 정도로 다품종소량으로 유통되기 때문에 물류 비용이 많이 든다.

기껏해야 10여종이 유통되는 위스키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또 온도 변화 등에 민감하기 때문에 보관 비용도 만만찮다고 한다. 아직 시장이 적어 재고 부담도 적지않다. 결국 유통 과정에서 높은 마진을 확보하지 못하면 남는 게 없다는 논리다.

와인 가격을 올리는 데는 주류유통 관련법의 제도적 이유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와인 수입상은 주류종합도매상을 겸하지 못한다. 결국 수입상-도매상-소매상-소비자로 다단계 유통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실정인 셈이다.

그러나 수입상과 도ㆍ소매상들이 밝히는 사정을 모두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와인 가격에 ‘거품’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와인 사업가나 애호가 모두 ‘합리적 가격’이 와인 대중화의 열쇠라는 점에 대해 입을 모은다.

실제로 전세계 와인 소비량 중 87%는 5달러 이하이고, 10%는 5~10달러의 중ㆍ저가 와인들이다. 특히 와인 소비가 종주국 프랑스에서 줄고 미국과 영국, 아시아 등 과거 와인을 생산하지 않았던 나라들에서는 급증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ㆍ칠레ㆍ호주ㆍ남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 생산하는 ‘신세계 와인’이 중ㆍ저가 시장을 급속히 잠식하고 있는 추세다.

이는 세계적으로 와인 시장의 판도가 중ㆍ저가 위주로 재편되고 있는 배경이다. 지난해 미국에서 2달러 짜리 와인 ‘찰스쇼’의 선풍적 인기가 그 단적인 예이다.

캘리포니아의 브론콘와인이 저가 와인시장을 겨냥해 내놓은 찰스쇼는 뉴욕 지하철 요금보다 싼 가격이면서도 맛과 향이 웬만한 고급 와인과 비교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다.

찰스쇼는 지난해 캘리포니아 전체 와인 출고량의 12%나 차지하며 미국 내 와인시장 활성화를 이끌었다. 프랑스산 고급 와인이 판치던 국내 와인시장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실속형’ 칠레 와인이 급성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추세와 무관하지 않다.

가격 경쟁이 심화하면서 유통 질서의 붕괴 등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국내 최대규모의 와인 소매업체인 ‘와인나라(www.winenara.com)’ 이철형 대표는 “일부 유통업자들이 가격 장난으로 와인 시장 발전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객관적으로 가격 대비 품질을 인증하는 기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와인의 종류가 워낙 많다 보니 검증도 안된 싸구려 와인을 들여와 고가에 파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유명한 와인에 비해 가격 비교가 어려운 점을 악용한다는 얘기다. 그는 “국내에는 아직 공식적인 소믈리에(와인 전문 감식가) 협회도 없고 와인 대중화를 위한 기반이 약한 게 사실”이라며 와인 대중화의 지름길은 업계와 소비자의 신뢰 형성임을 강조했다.

성장가능성 큰 블루오션

한편 신규 사업의 영역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는 업계에서 와인 시장은 아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통한다. 규모는 작지만 수입ㆍ판매ㆍ외식사업 분야에서 성장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한때 대기업 종합상사들까지 와인시장을 기웃거린 이유도 이 때문이다. 2000년 이후 와인 수입사업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꾼 이후 100여 곳이 난립, 과당경쟁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신규 와인 수입면허를 제한하고 있다. 현재 선두권을 형성하는 와인 수입업체는 두산주류를 비롯해 해태그룹의 금양인터내셔날, 아영주산, 나라식품, 신동와인, 대유와인 등이다.

칠레산 와인 한국에서 왜 강세인가?

2004년 10월 기준 원산지별 수입 와인은 프랑스산이 전체의 43%를 차지해 여전히 1위를 고수했다. 칠레산은 전년 대비 197%나 급증, 5위에서 2위로 뛰어 올랐다. 시장 점유율도 14.8%나 됐다. 다음으로 미국과 이탈리아, 호주, 독일, 스페인 등이 뒤를 이었다.

그렇다면 칠레산 와인이 왜 이처럼 인기인가. 우선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이다. 여기에 실속형 소비자들의 ‘입소문’이 더해졌다는 것이 업계의 분석이다.

우선 프랑스 와인은 종류도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브랜딩(포도 품종을 섞어 만드는 기법)으로 만드는 탓에 전문가가 아니고는 쉽게 가격 대비 품질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칠레 등 신세계 와인은 회사명이 곧 브랜드이고 포도 품종도 정해져 있어 일반 소비자들이 고르기 용이하다. 와인 선택에 있어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말이다.

여기에 한국ㆍ칠레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지난해 칠레산 와인 관세율이 기존 15%에서 12.5%로 인하돼 수입업체들의 선호도도 한몫을 했다. 칠레산 와인의 관세는 매년 2.5%포인트씩 낮아져 2009년에는 무관세가 된다.

한편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21개국 정상회담 만찬장의 와인으로 칠레산 ‘몬테스 알파 M’(사진)이 결정됐다.

이 와인은 빈티지(Vintageㆍ포도수확 연도)에 따라 시중에서 14만~17만원 선에서 판매된다. 또 몬테스 알파 M과 함께 칠레산 ‘몬테스 알파 카베르네 소비뇽’도 각국 총리와 각료들의 만찬 와인으로 선정됐다. 이 와인의 시중가격은 3만원 안팎이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