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디지털생활 현실로, 미래산업 이끌 신성장 엔진

<독신인 A씨는 프리랜스 여행 작가다. 그는 휴대폰 하나 달랑 들고 취재 여행을 다닌 지 오래다. 내비게이션를 통해 여행지로 가는 최적 이동로는 물론 숙박시설 등 지역 정보도 체크한다. 여행 중 음악 감상과 TV 시청, 현장 사진 촬영, 인터뷰 녹음, 원고 작성과 전송까지 휴대폰 하나로 뚝딱 해결한다. 또 휴대폰으로 집에 두고 온 애완견 메리를 위해 실내 온도를 체크하고 먹이도 원격조정으로 준다.>

<냉장고에 달린 15인치 액정화면 위로 ‘긴급메시지’가 뜬다. ‘오늘이 남편 생일인 것 알죠?’ 남편 생일을 깜빡 잊고있던 B는 서둘러 냉장고 액정화면에서 인터넷에 접속, 생일잔치에 필요한 재료와 조리법을 다운로드한다. 재료는 클릭 한 번으로 인근 백화점 식품코너에 자동으로 주문되고 30분도 안 돼 배달됐다. 조리준비는 이미 끝난 상태. 전자레인지에 조리시간과 온도 등 조리방법을 입력됐다. 이제 스위치만 누르면 남편 생일잔치 요리가 완성된다.>

꿈의 디지털 생활양식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휴대폰이나 PC 하나로 업무와 엔터테인먼트, 홈네트워킹을 자유자재로 처리하는 시대, ‘내 손안에 큰 세상’이란 광고 문구 같은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디지털 컨버전스(Digital Convergenceㆍ디지털 기기ㆍ서비스의 융합)’라는 거대한 기술혁명의 물결이다.

8일(현지 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폐막한 ‘2006년 국제 가전전시회(CES)’는 디지털 컨버전스 제품들의 경연장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MS) 빌 게이츠 회장은 “올해는 디지털 생활양식을 전파하는 한 해가 될 것”이라며 “앞으로 디지털 기술은 어떻게 음악을 듣고 TV를 보느냐, 게임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 연락할 수 있느냐 등을 중심으로 발달할 것”이라고 본격적인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를 전망했다.

디지털 컨버전스란?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06 '국제 가전 전시회'

디지털 컨버전스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유선과 무선, 통신과 방송, 통신과 컴퓨터 등 기존의 기술ㆍ산업ㆍ서비스ㆍ네트워크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새로운 형태의 융합 상품과 서비스가 등장하는 것을 일컫는다.

기술적 측면의 ‘컨버전스’라는 말은 1979년 미국 MIT의 니그로폰테 교수가 방송, 컴퓨터, 출판 등의 융합을 일컫는 ‘미디어 컨버전스’라고 명명한 후 개념적으로만 사용되어 왔으나, 2000년대 초 삼성전자가 출시한 VTR과 DVD의 복합 제품인 DVD콤보가 크게 히트함으로써 소비자에게 구체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삼성의 DVD콤보는 2개 이상의 기기를 하나로 통합한 세계 최초의 디지털 컨버전스 상품으로 기록된다.

현재 IT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컨버전스는 핵심 기술인 칩 분야 융합에서 시작해, 점차 기기로 확대되고 최종 소비 단계인 서비스 영역으로 발전하는 추세다.

먼저 칩 융합은 다양한 기능의 칩을 하나로 집적할 수 있는 SoC(System on Chip)라는 핵심기술을 통해 이뤄진다. 나노기술, 바이오기술 등 타 기술영역과 결합한 바이오칩이 주요 결과물이다.

최근 이러한 칩의 융합을 기반으로 디지털 컨버전스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분야가 기기 융합이다.

휴대폰과 PDA 기능을 합친 스마트폰과 텔레매틱스 단말기, 셋톱박스, 홈네트워크 서버 등이 소형화, 휴대화를 통한 기기융합의 대표적 경우이다.

서비스 융합이 종착점

칩과 기기의 융합으로 이어진 디지털 컨버전스의 종착점은 서비스 융합이다. 우선 방송과 통신 서비스 융합의 예가 휴대폰으로 TV를 시청할 수 있는 DMB(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 서비스이다.

또 통신과 금융의 융합은 휴대폰으로 각종 금융거래를 할 수 있는 m-뱅킹 서비스를 들 수 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 내비게이션이나 인터넷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텔레매틱스 서비스, 또 통신과 가전, 건설산업이 3각 결합해 홈오토메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 홈네트워킹 등이 서로 다른 서비스와 산업간 융합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렇게 정보통신과 컴퓨터, 방송, 금융, 건설, 의료, 교육이라는 전통적 산업 간의 구분을 허물고 다양한 ‘교집합’을 시도하는 디지털 컨버전스는 21세기의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다.

디지털 컨버전스가 일어나는 배경으로는 기본적으로 반도체 등 디지털 기반 기술의 혁신적인 발전에 기인하지만 기업들의 새로운 수요 창출이란 기업 전략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해 한 세미나에서 “정보기술(IT) 산업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생명공학기술(BT) 나노기술(NT)과 연계한 융합기술로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단순한 신기술보다는 서로 다른 기술을 합쳐 새로운 성과를 내겠다는 전략이다.

이와 관련 삼성경제연구소 곽수정 박사도 “지금은 휴대폰이나 기존의 가전 제품들이 세계적인 공급 과잉으로 일시적 포화상태”라고 말했다.

곽 박사는 “기업은 새로운 기능과 서비스를 융합한 신제품으로 신규 수요를 창출해야 하는 절박성이 디지털 컨버전스 물결의 주요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한국 휴대폰 시장의 디지털 컨버전스는 대단히 성공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휴대폰 교체 주기는 18개월로 선진국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그만큼 한국의 소비자들이 기술 융합의 신제품을 빠르게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수요가 창출되고 있는 셈이다.

업무에서 펀(Fun) 기기로 전환

또한 이러한 디지털 컨버전스의 물결을 끌고 가는 주요 견인차는 마국 ‘2006년 국제 가전전시회’에서 확인됐듯 ‘엔터테인먼트’ 기능이다.

모바일과 업무효율성 기능을 강조했던 기존의 휴대폰과 PMP(Portable Multimedia Player)가 MP3와 DMB TV, 게임기 기능 등을 끌어들이는 것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것이다.

필립스는 2013년경에는 신규 휴대폰의 50% 이상이 TV 기능을 탑재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디지털 컨버전스 물결은 종국에는 이동통신과 방송, PC, MP3, 카메라 등 각종 기능들이 한 기기로 수렴될 수밖에 없어 기업의 입장에선 사업 기회가 축소될 것이란 우려가 있다.

그러나 삼성경제연구소 김재윤 박사는 “컨버전스는 기본적으로 보완적인 측면이 많다”고 전제한 뒤 “마치 광장에 다양한 기술들을 풀어놓고 소비자에게 선택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컨버전스로 휴대기기의 기능이 복잡화 하더라도 사용자들은 자기가 필요한 기능들을 중심으로 탑재된 휴대기기를 선택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기나 모델 수가 늘어난다는 얘기다.

디지털 컨버전스 물결은 기업에게 기회의 축소보다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창출해 주는 ‘블루오션’이라는 전망이다.

컨버전스의 중심 축의 무엇?

디지털 컨버전스가 혁명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능과 서비스의 수렴화나 다양화의 중심 축이 되는 제품이 무엇이 될지도 큰 관심사다.

휴대폰이 될지 PMP나 MP3가 될지는 아직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의 추세로는 모바일 정보통신 분야에서는 휴대폰이 디지털 컨버전스의 핵심 수단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향후 통신기능이 추가될 PMP의 도전이 만만찮다.

통신이 가능하게 하는 PMP의 핵심 기술은 휴대 인터넷으로도 불리는 ‘와이브로(WibroㆍWireless와 Broadband의 합성어)’이다.

와이브로는 국내에서 올해 중반에 세계 최초로 별도 주파수대역(2.3GHz)을 이용해 본격 상용화할 예정이다. 사업자로는 KT, SK텔레콤, 하나로텔레콤 등 3개사가 선정됐다.

향후 와이브로는 유선 초고속 인터넷과 치열한 시장경쟁을 펼칠 것으로 보이며 음성이 결합될 경우엔 이동전화와도 한판 승부가 불가피하다.

디지털 컨버전스는 기업간의 경쟁의 룰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면서 경영 혁명을 불러오고 있다. 컨버전스 시대에는 서비스와 컨텐츠, 기기 등을 혼자서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산업 간의 협력과 조정이 필수적이다.

지난해 세계적으로 히트한 MP3 플레이어 ‘iPoD’를 출시한 애플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애플은 유로 음악 다운로드 서비스인 iTunes와 결합하면서 음반업계와 통신사업자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MP3 플레이어 시장에서 1위로 급부상하는 성공을 거뒀다.

디지털 컨버전스 물결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현상은 그 어느 때보다 소비자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이다. 소위 기업과 소비자간의 쌍방향식 교감이 한층 강화된 것이다.

기업들이 심층적인 소비자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실제로 인텔이나 IBM 같은 다국적 기업들은 인류학자와 심리학자들로 구성된 소비자와 함께 문화 관련 연구팀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대간·계층간 양극화 심화

디지털 컨버전스의 빠른 진행은 국가간, 계층간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우선 가격면에서 컨버전스 기기들은 기존의 단순 기능 기기보다 비싸 저개발ㆍ개도국ㆍ저소득층의 소비자에게는 그림의 떡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들은 점차 IT기술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우려이다.

그래서 MIT의 니그로폰테 교수 등 일각에서는 IT기술이 낳을 양극화를 메울 제품으로 컨버전스에 역행하는 단순 기능의 저가 상품이 인도나 중남미 국가들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 줄 것으로 전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김재윤 박사는 “디지털 컨버전스로 인한 양극화 현상은 가격보다는 디지털 이해도의 차이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격은 어차피 상품의 대중화 정도에 따라 점차 하향화 추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내비게이션의 경우 불과 4~5년 전만 해도 고급승용차의 전유물이었다.

2001년 PDA형 내비게이션 가격은 100만원대였으나 2005년에는 같은 기능의 내비게이션의 가격이 30만원대로 낮아져 소비자의 부담을 크게 덜어줬다.

김 박사는 “결국은 제품을 구입할 경제적 능력은 있지만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에 문제가 있는 계층과 세대들의 소외가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양극화의 핵심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