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뇌·포·범·망절씨 등 귀화성씨 사람들, 90%가 중국계

서울에서 건축사를 하는 빙훈(氷勳ㆍ45)씨는 가끔 우편물 실랑이를 한다. 등기 우편물이 ‘방’씨로 오는 게 대부분이어서 그때마다 신분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빙씨는 “고교시절 ‘방훈’으로 된 명찰을 받기도 했고 특이한 성 때문에 수업시간에 자주 시달렸다”고 말했다.

서울 63빌딩에서 근무하는 빙광섭(47ㆍ경주 빙씨 17대손)씨는 드문 성씨 때문에 엉뚱한 경우를 많이 당한다고 설명했다.

“귀화한 외국인으로 아는 경우도 있고 예약했을 때 방씨로 알고 있거나 김씨로 써놓은 경우가 열에 일곱”이라는 것. 빙씨의 자녀 중엔 빙과류 와 관련시켜 친구들이 자주 놀리자 집에서 항성(抗姓) 시위를 한 적도 있다고 했다.

경주 빙(氷)씨가 희귀성이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들이다. 경주 빙씨 시조는 빙여경(氷如鏡)으로 중국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 세조때 와서 정착했다고 전한다.

세조는 그를 경주부원군에 봉해 경주 빙씨가 뿌리를 내리게 됐다. 현재 전남 곡성군 대평ㆍ구성리 일대에 집성촌이 있다.

경주 빙씨는 통계청이 2003년 1명으로 발표했다가 정정하는 해프닝도 있었지만 전국에 800여 명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경주 빙씨 종친회 빙기윤(55ㆍ신진건설 대표) 총무는 “곡성 대평리에만 17가구 40명 가량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경주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1,000명 가까이 될 것으로 본다”면서 “매월 4월 첫째 일요일에 시제를 지내는데 전국의 경주 빙씨가 모여 뿌리를 확인한다”고 말했다.

곡성에서 건설업을 하는 빙 총무는 최근 22년간 불우한 학생과 이웃에게 남몰래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한 선행이 밝혀져 경주 빙씨가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인라인스케이트 국가대표로 얼짱 스타인 궉채이( 彩伊ㆍ19ㆍ여) 선수로 인해 주목을 받은 궉씨도 희귀 귀화성씨다. 2000년 말 기준으로 74가구 248명이 확인된 정도다.

궉씨의 시조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우리나라에 온 궉시영( 時永)으로 궉채이 선수는 청주 궉씨 19대손이다.

궉씨 종친회 궉영수 총무는 “확인된 종친이 300명에도 못미쳐 손이 귀한 것 같다”며 “4,5대 독자도 흔하다”고 말했다. 궉 선수의 남동생도 독자다.

2000년 기준, 100명 미만의 희귀성씨 38개

통계청의 2003년 조사에 따르면 2000년 말 기준으로 1,000명 미만의 종친으로 구성된 희귀성씨는 110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100명 미만의 희귀성씨는 38개다.

충주 평씨(忠州 平氏)의 경우 2000년말 기준으로 전국적으로 648명이 확인됐다. 시조인 평우성(平友聖)은 조선 인조와 선조 시대에 귀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충주 평씨 종친회 평복창 회장은 “충주 평씨 묘소가 있는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타지로 이주한 종친들이 늘면서 시제때나 모이게 된다”고 말했다.

평 회장은 “북한에 있는 종친까지 합하면 통계청 조사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면서 “남한만해도 실제는 1,000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귀화성씨 가운데 중국계가 90% 이상으로 교동 뇌씨(喬桐 雷氏, 80명), 순천 포씨(順川 包氏, 129명), 안주 범씨(安州 凡氏, 155명), 광령 묵씨(廣寧 墨氏, 133명) 등이 그 범주에 속한다.

연안 인씨(延安 印氏)의 시조 인후(印侯)는 ‘후라타이’란 이름의 몽골인으로 아들 인승단(印承旦)이 충목왕 때 연안부원군에 봉해진 것이 본관이 됐다. 통계청의 2000년 조사에 따르면 568명이 확인됐다.

일본계 함박 김씨((咸博 金氏)는 임진왜란때 귀화한 김성인(金誠仁)을 시조로 2000년 조사에서 4,579명이 확인됐다. 망절(網切)씨 역시 일본계로 현재 경남 양산에 10명이 있다.

귀화성씨와 관련 주목되는 것은 2000년을 전후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신종 성씨들이다. 귀화 외국인이 급증하면서 새 성씨들도 급격히 늘어났다.

박성남씨 가족

한국여성과 결혼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 남성들은 대부분 한국 성씨를 차용하고 본관을 창설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경기도 안산에 살고 있는 박성남(42)씨는 방글라데시인으로 본명은 라흐만 모스탁이다. 2001년 한국여성 김희주(30)씨와 결혼, 2004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안산에서 휴대폰 가게를 운영하는 박씨는 “처음 한국에서 생활한 곳이 경기도 성남이고 박씨 성이 좋아 ‘박성남’으로 했다”고 말했다.

현재 딸 1명을 두고 있는 박씨는 성남 박씨의 시조로 호적법상 성남 박씨가 2명이 되는 셈이다.

안산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정혜실(40)씨의 남편 정(鄭)현수(43)씨도 유사한 케이스. 파키스탄인인 그의 본명은 자미드 후세인. 11년 전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한국에 머물다 정씨를 만나 결혼했다.

사라(11), 요셉(10) 남매를 두고 있는 그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부인의 정씨 성에 안산이라는 본관을 신설, ‘안산 정씨’의 시조가 됐다.

'화산 이씨' 베트남 리왕조의 후손

1995년 3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모두 나와 한국에서 찾아온 화산(花山) 이씨(李氏) 종친회 대표들을 환대했다.

'화산 이씨' 종친회 회장 이희연씨(왼쪽)와 이승영 총무

그리고 베트남인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면서 왕손 예우를 깍듯이 했다.

“베트남에서의 환대가 그 정도일 줄 몰랐다. 리(Ly)왕조에 대한 베트남 국민들의 애정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화산 이씨 종친회 이승영(51) 총무는 10년 전 베트남의 환대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베트남 왕조가 남긴 유일한 왕손에 대한 금의환향이라고 여겨졌다”이 총무에 따르면 리 왕조의 선조들이 고려 고종 13년(1226년)에 망명한 지 780여 년 만에 귀환한 셈이었다.

화산 이씨 시조는 이용상(李龍祥)으로 베트남 첫 독립국가인 리 왕조(1009~1226)의 8대 왕 혜종의 숙부이자 왕자 신분의 군 총수였다.

그는 한 척신의 권모술수로 왕이 폐출되고 왕족이 몰살 당하는 난국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뒤 배에 몸을 싣고 정처없이 떠났다.

그가 당도한 곳은 본국에서 3,600여km 떨어진 서해안 황해도 옹진반도의 화산이었다.

때마침 몽골군이 이곳을 유린하자 이용상은 섬사람들과 힘을 모아 침략자를 물리쳤고, 이 사실이 고려 조정에 알려져 고종은 그에게 화산 일대를 식읍으로 내리고 본관을 화산으로 하는 이씨 성을 하사했다.

그래서 이용상은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용상의 후예들은 고려시대에 걸출한 인재를 여럿 배출했고 현재 남한에는 약 260가구에 1,400명 가량이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종친회 이희연(64) 회장은 “옹진반도에 뿌리를 내린 만큼 북한에 후손들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최근까지 여러 루트를 통해 시조의 유적과 유물. 후손들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매년 리태조 즉위일(음력 3월15일)에 종친회 대표들을 초청하고 있으며 4년 전에는 양국 예술가들이 합작으로 ‘이용상 오페라’를 하노이에서 공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베트남과 화산 이씨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 매년 구정 설에는 주한 베트남 대사관측에서 자국민보다 화산 이씨 종친회 사람들을 먼저 초청하고 베트남 국빈이 방한할 때는 화산 이씨 종친회 사람들을 만나는 게 관례라고 한다.

이 회장은 “리왕조는 베트남에서 가장 융성한 왕조로 리태조는 우리의 세종대왕에 비유될만큼 추앙을 받아 베트남 국민들도 한국의 화산 이씨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 어디를 가도 화산 이씨 후손이라고 하면 친근감을 나타낸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브릿지증권의 이상준 사장도 화산 이씨로 지난 4일 베트남을 방문, 판 반 카이(PhanVan Khai)총리를 예방하고 브릿지증권의 베트남 진출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과정에서 화산 이씨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화산 이씨 종친회는 리태조가 하노이를 수도로 정도(定都)한지 1,000년이 되는 2010년 대대적인 행사를 갖고 한국과 베트남 간의 교류를 확대할 계획이다.

귀화한 일본인 망절(網切)씨 전국에 10명뿐

“한국인으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건데 한국, 일본 나눌 필요가 있겠소.”

일본인 핏줄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버섯 박사' 망절일랑(網切一郞ㆍ65ㆍ경남 양산시 내송리)씨는 국적에 대해 무관심한듯한 태도를 보였다.

매일 부인, 아들 내외와 함께 버섯을 재배하며 생활하는 망절씨는 한국에서 태어나 사실상 한국인으로 살아왔다. 그는 1942년 경남 김해에서 일본인 경찰간부(경무과장)의 8대 독자로 태어났다.

광복으로 가택연금 중이던 부모가 이웃에 놀러간 네 살배기 아이를 챙길 틈도 없이 강제송환당하면서 그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그후 이웃 양모씨의 보살핌을 받았고 호적에는 '양일랑'이란 이름으로 올랐다.

그는 68년 군에 입대했다가 70년 일본 가고시마(鹿兒島)현에 살고 있던 부친과 상봉하고 일본 국적을 회복했지만 이듬해 곧바로 한국에 귀화했다.

“처와 아이가 있고 한국인으로 생활해와 일본인으로 살기가 어려울듯했다. 독자여서 일본에 친척도 없고. 나를 길러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사는 게 자연스럽다고 판단했다.”

일본식 성을 그대로 옮겨 온 것에 대해 "핏줄의 유래를 인위적으로 바꾸기 싫었을 뿐 (일본) 국적을 계승한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호적에 자신의 성을 한국식 발음으로 '망절'이라고 올렸다. 국내에서 망절이라는 성이 새로 생긴 셈이다.

현재 부인 정순남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었고 장남 망절용씨가 1남1녀, 차남 망절웅씨가 2남1녀를 두어 모두 10명의 망절씨가 국내에 거주하고 있다.

망절씨는 70년 일본 방문에서 버섯이 장차 한국 식탁에도 오를 것으로 판단하고 72년 양산군 내송리 야산을 임대해 버섯 재배를 시작, 94년 국내 처음으로 새송이 재배에 성공했다.

그리고 2004년 수삼보다 사포닌 성분이 40%나 더 함유된 ‘홍삼 새송이’를 개발해 특허를 따냈다. 94년엔 20여 가구의 내송리 전체를 버섯 마을로 탈바꿈시켜 이런 공로로 99년 신지식인상, 2001년 새농민상 대통령상 등 굵직한 상을 10여 차례나 받았다.

최근엔 매년 한차례씩 양산시와 가고시마현 농민 간 교환 홈스테이를 5년째 이어오는 등 민간외교에도 나서고 있다.

망절씨는 “60 평생을 한국인으로 살아와 ‘일본인’이란 딱지는 무의미해졌다”면서 “자식들도 한국인으로 뿌리를 내릴텐데 후손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