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순하게…20도 소주시대 개막

“어, 소주 맛이 순해져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가네” “달라지긴 한 것 같은데 크게 모르겠는데…”

서민의 술 ‘소주’가 마침내 알코올 도수 ‘20도 시대’를 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계속 이어져온 ‘순한 소주 전쟁’이 사상 첫 ‘20도 전선’까지 다다른 것.

최근 진로와 두산이 각각 알코올 도수 20.1도 ‘참이슬’ 과 20도짜리 ‘처음처럼’을 새로 출시하면서 소주 시장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번 신제품 소주들이 나오기 전까지 대세를 이룬 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21도. 2004년부터 ‘2년 천하’를 누렸지만 결국 그 자리를 1도 더 낮은 20도대 소주에 물려주게 됐다.

소주가 1973년 처음으로 25도에 진입한 이래 끝점인 20도에 이르는데 33년이 걸린 셈이다.

소주 도수가 낮아지는 이유

‘소주 20도 시대’의 의미는 웰빙 추세와도 맥을 같이 한다. “소비자들의 음주 트렌드가 해가 갈수록 저도화되고 있습니다. 가급적 술을 마시고도 다음날 아침 부담이 없었으면 하는 것이 요즘 소비자들의 바람이니까요.”

신동규 두산 전략기획본부 부장은 “건강을 중시하는 소비 성향과 맞물려 최대한 ‘몸에 덜 해로운’ 술을 소비자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술 소비자층로서는 마지막 시장으로 여겨지는 여성 음주자들의 증가도 도수를 낮추는데 한몫한다.

여성들이 술을 찾는 빈도와 양은 늘어가지만 이들은 독주보다는 알코올 도수가 낮은 술을 더 선호하므로 소주업계가 나갈 방향은 뻔한 것.

전영태 ㈜진로 기업문화실 차장은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된 것도 도수와 관계 있습니다.

근무 일수는 줄었지만 구조조정 등으로 인력도 같이 줄면서 평일의 업무 강도는 오히려 더 세지는 것이 요즘 추세”라며 “때문에 독한 술을 마셔서 쉽게 취하고 다음 날 고생하는 것보다 조금 약한 술로 하루의 피로를 달래려는 음주 문화가 더욱 힘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전엔 흔했지만 과음하고 다음날 사무실에서 술이 덜 깬 모습을 보이는 세태는 이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최근 수년간 ‘고도주’보다는 순한 ‘저도주’가 애주가들의 입맛을 끌어 온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실제 위스키 같은 고도주 수요는 줄어든 반면 14도 내외의 와인이나 청주(정종)류, 복분자주나 백세주 같은 술들이 시장에서 환영을 받아왔다.

이규철 ㈜진로 기업문화실 홍보팀장은 “소주의 알코올 도수 하락 추세는 소주가 더 이상 고도주이기를 고집하기보다는 저도주로 변신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신소비층으로 떠오르고 있는 젊은 세대의 술문화 패턴에도 영향을 받고 있음을 말해 준다.

40대 이상 연령층이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는 것이 상례였다면 요즘 20, 30대는 가볍게 술을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한다. 때문에 ‘순한’ 소주는 이제 시대의 대세라는 것이다.

소주의 저도화 추세는 지방에서 먼저.

사실 두산과 진로가 최근 20도대 소주를 내놓는 바람에 20도대 소주가 전국민적인 화제가 됐을 뿐이지 실제 20도대 소주를 처음 선보인 것은 지방에서부터다.

이미 지난해 9월 대전 충남 지역 주류업체인 선양은 20.5도 짜리 소주를 처음 선보이며 사실상 20도대 소주 시대를 열었다. 올들어서는 무학이 이어받았다. 경남을 기반으로 한 무학은 1월1일 20.5도로 소주 도수를 낮췄다.

지방 소주사들이 서울ㆍ수도권의 대형 소주사보다 한 발 앞선 데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다. 정구하 ㈜진로 마케팅 팀장은 “유통과 마케팅력이 앞선 대형 소주 메이커에 맞서 지방 소주 브랜드들이 살 길은 제품력뿐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영업이나 마케팅에서 뒤져 있고 이들 분야는 쉽게 추월하기 어렵지만 제품 기획에서의 변화는 크게 어렵지 않기 때문.

정 팀장은 “대형 양조사 입장에서 현재 잘 나가는 제품을 놔두고 섣불리 새 시장에 도전하기도 쉽지 않은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지방에서 먼저 등장한 20도대 소주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았다는 점도 알코올 도수 하락 추세에 불을 당겼다.

김일영 두산주류BG 마케팅부문 상무는 “비교적 규모가 적은 지방시장에서 ‘저도주 소주’의 시장 검증을 거친 뒤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며 “결과적으로 지방 소주사의 선공(?)은 간접적인 시장 검증 효과를 가져다 준 셈”이라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소주의 저도주 추세에 브레이크가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다. 1993년 전북지역에서 한때 20도짜리 ‘보배20’이 선보였지만 자리를 잡지 못했다.

당시 소주 도수의 대세는 22도. 너무 앞서 가다 빛을 못 본 셈이다. 전영태 ㈜진로 기업문화실 차장은 “지금 시점에서 소주 20도가 대세라는 얘기지 이보다 조금만 빠르거나 늦어면 20도 소주는 실패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지금 19, 18도 소주가 선보인다고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 잡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란 분석이다.

20도 대에서 벌어질 새로운 소주 전쟁

지난해까지 서울과 수도권의 소주 시장에서 진로의 점유율은 무려 92.6%. 전국 시장에서도 55.4%로 절반를 훌쩍 넘는다. 소주 시장의 선두주자인 진로는 점유율에서도 타회사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반면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두산은 전국 시장 점유율이 5.3~5.5%, 수도권도 불과 6.1%에 머물고 있다. ‘맞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성적이다.

시장 점유율에서 드러나고 있듯 ‘20도대 소주’의 출현은 소주 시장에서의 또 다른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한 마디로 두산이 ‘20도대 소주 전선(戰線)’을 먼저 형성하면서 진로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지금까지의 시장 성적표는 21도대 소주 시장에서의 결과였다는 것이 두산의 입장이다.

두산은 신제품 ‘처음처럼’으로 도전장을 내밀며 새로운 시장판도를 형성해 나가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드러내고 있다.

이에 맞서는 진로도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진로는 부도가 난 상태에서도 몇 년간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해마다 1%씩 매출을 늘렸는데 말이 1%지 소주 시장 1%는 300억원의 규모입니다.”

정구하 마케팅팀장은 “진로가 국내 시장 점유율의 절반을 넘게 된 것도 부도 상태에서 전 직원들이 똘똘 뭉쳐 이룩해 낸 산물”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만큼 저력이 있는 회사고 소주에 대한 모든 노하우가 축적돼 있는 결집체인 진로가 새로운 20도대 시장에서도 굳건한 왕좌를 사수할 것”이라고 그는 자신했다.

‘20도대 소주’ 신시장의 주도권을 둘러싼 두 회사간의 신경전은 이미 출고 때부터 벌어졌다. 제품 등록과 출고, 광고, 홍보 등에서 두 회사는 모두 하루 차이로 접전을 치르며 양보할 수 없는 라이벌임을 과시한 것.

국세청에 제품 등록을 하고 제품 출고를 먼저 시작한 것은 두산. 불과 하루 차이로 선수를 빼앗긴 진로는 하지만 보도자료 배포와 광고에서는 주도권을 뺏었다.

진로가 2일 보도자료를 배포했지만 두산은 6일 신제품 출시 기자간담회를 가졌고 광고도 진로가 한 주 먼저 내보냈다. 반면 두산은 국세청 신고등록과 출고에서 모두 하루씩 앞섰다.

두산은 또한 가격에서도 2라운드 포격을 감행했다. 명분은 알코올 도수가 내려간 만큼 가격을 인하했다는 것. 종전보다 병당 70원(소비자가 기준)을 내렸다.

이중 50원은 소비자에게 혜택이 직접 돌아가고 20원은 유통업자 몫이다. 식당이나 술집등에서 출고가 인하분이 소비자가로 반영되진 않겠지만 두산은 이를 시장 확장의 호기로 보고 있다.

업소 이익이 돌아가는 만큼 업소에서 두산의 ‘처음처럼’ 판매를 더 장려하지 않겠느냐는 전략인 것. 하지만 진로는 이에 대해 ‘단순한 마케팅 전략일 뿐 시장에 변화를 줄 변수는 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하고 있다.

‘20도대’에서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며 신시장 장악을 노리는 두 회사간의 소주 전쟁은 당분간 한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혈전이 전개될 태세다.

세계의 주당 유혹하는 한국 소주의 맛

1968년 베트남, 73년 서독, 75년 미국, 77년 일본.

우리나라의 소주가 해외 시장을 개척한 시기이다.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한국인의 소주가 한반도를 넘어, 한류를 알리는 세계 시장 개척의 첨병 역할을 해온 것이다.

전 세계 50여 개 국가에 수출하고 있는 진로의 활약상은 단연 눈부시다. 지난해 진로소주의 해외 수출액은 5,062만 달러. 총 356만 상자(360ml,30병)의 소주를 수출했다.

국내외 판매량을 합치면 세계 유수의 위스키, 보드카, 럼, 진 등을 훨씬 앞질러 2001년부터 세계 증류주(Spirits) 시장의 판매량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최대 수출 시장은 일본. 98년 일본시장 내 86개 희석식 소주업체 중 단일브랜드로 시장점유율 1위에 오른 진로 소주는 이후 2004년까지 7년 연속 선두를 지켰다.

지난해에는 일본에 301만 상자를 수출해 전년 대비 33.2%가 줄어 다소 주춤한 상태이지만, 일본인 10명 중 6명이 아는 '브랜드 파워'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2005년 진로재팬 조사).

일본 전체 15만 여 곳의 소매점 중 13만 여 곳 이상에 진로 소주가 유통되고 있다.

두산의 약진도 두드러진다. 최근 일본 시장에서 한국 소주의 판매량이 다소 부진한 상황과 달리 해마다 20% 이상의 판매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수출액은 5,460만 달러로 전년도 대비 36% 늘었다. 설악산 천연수로 만든 깨끗한 이미지를 강조한 마케팅과 일본 현지의 판매 대행을 담당하는 대형 주류업체인 산토리사의 유통망을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외에도 현재 일본에는 보해양조, 무학, 선양, 금복주, 하이트주조 등이 진출하여 우리나라 소주의 '힘'을 알리고 있다.

한편, 지난 14일 밸런타인데이에는 일본 백화점 매장에 난데없이 우리나라 소주가 든 '진로 초콜릿'이 등장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남성들이 단 초콜릿을 즐기지 않는 데다 일본 사회 전반에 한류 붐이 폭발적으로 일고 있는 데 착안해 상품화한 것이다. 일본 세이부 백화점과 소고백화점을 운영하는 밀레니엄 리테일링그룹과 진로재팬이 공동으로 개발한 것.

입 속에 쏙 들어갈 크기의 초콜릿 3개 들이가 525엔(약 4,500원)으로, 폭 넓은 연령대의 여성 고객들로부터 호응을 얻으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배현정 기자




박원식 차장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