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강한 근거지 장악력으로 진로 지방시장 접근 봉쇄

국내 소주 시장은 수도권을 텃밭으로 하는 ‘절대 강자’ 진로가 절반 이상을 장악한 가운데 ‘지방 제후’ 9개사가 지역 거점을 발판으로 남은 절반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분점하고 있는 양상이다.

2005년 9월 현재 10개 소주 업체의 전국 시장 점유율을 보면 진로가 55.6%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는 반면, 나머지 업체들은 10% 벽조차 넘지 못하고 있다.

2위 금복주도 점유율이 고작 9.5%에 불과해 1위 진로와는 경쟁 자체가 안 되는 구도다.

그러나 지방 시장만 놓고 보면 사정은 딴판이다. 오히려 지역 소주 업체들이 특유의 향토 장악력을 무기로 진로의 시장 접근을 강력하게 봉쇄하고 있다.

특히 금복주(대구ㆍ경북), 대선주조(부산), 무학(울산ㆍ경남) 등 영남의 터줏대감 3사는 각자의 근거지에서 90% 안팎의 시장을 점유, 수도권에서 90% 이상 점유율을 가지는 진로에 필적하는 독점력을 과시하고 있다.

대한주류공업협회 임완혁 과장은 “수도권에서는 진로가 절대 강세를 나타내지만 지방 시장은 다르다.

영남, 전라남도, 제주도에서는 지역 소주 업체들이 확고한 강세를 띠고, 충청, 강원, 전라북도에서는 지역 업체와 진로가 과반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고 시장 판세를 분석했다.

지방 소주 시장에서 지역 업체들이 선전을 하는 데는 과거 오랫동안 유지됐던 ‘자도주(自道酒) 의무판매 제도’의 영향이 크다.

소주 시장의 독과점을 방지하고 지방 소주 업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973년 처음 시행된 이 제도는 한동안 지방 업체들의 생명줄 구실을 톡톡히 했다.

비록 96년 위헌 판정으로 사문화됐지만 이전에 만들어 놓은 지역 분할 구도는 아직까지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소주 시장의 지역 분할 구도가 앞으로도 지속될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진입 장벽이 사라진 뒤 소주 업체들 간에 서로의 안방을 공략하는 시장 쟁탈전이 가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지역 소주 시장에서는 지역 업체들과 진로의 공방전뿐 아니라 지방 업체들 간 대결까지 뜨겁다. 또한 수도권 시장에서도 두산이 진로의 아성을 깨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전운이 고조되고 있다.

대전ㆍ충남 시장은 요즘 향토 소주 업체 선양과 진로가 벌이는 한판 대결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수도권과 비교적 가까운 이 지역에선 현재 진로가 절반을 조금 웃도는 시장 점유율을 기록 중이다.

선양은 99년 지역 시장 점유율이 70%에 육박하는 등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적도 있지만 2000년대 들어 ‘참이슬’을 앞세운 진로의 파상공세에 밀려 30%대까지 추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경남에 기반을 둔 무학의 길거리 이벤트

그러다 2004년 오너가 교체된 후 지난해부터 새로운 브랜드 ‘맑을 린’을 내세워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고 있다. 톱스타 한채영을 제품 광고 모델로 기용해 젊은 고객층을 공략하고 TV를 통해 기업 이미지 광고도 내보냈다.

이 회사에서 빅 모델을 쓰고 TV 광고를 시작한 것은 모두 창사 후 처음이다.

제품 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서는 판촉 이벤트도 강화했다. ‘맑을 린’과 ‘참이슬’을 직접 비교 시음하게 하는 행사를 곳곳에서 열었고, 기증주도 대량으로 배포했다.

‘맑을 린’ 병 모양의 대형 풍선을 실은 차량들을 동원해 도심 홍보 활동도 벌였다.

필사적인 노력의 결실은 금세 나타났다. 지난해 9월 ‘맑을 린’ 출시 당시 선양의 지역 시장 점유율은 40%선이었는데 불과 3개월 만인 12월에는 45%까지 치고 올라간 것.

이 회사 기업문화팀 박경정 대리는 “맛과 디자인, 광고 캠페인 등의 종합적 성공으로 브랜드 파워가 대폭 올라갔다. 이제 ‘참이슬’과의 경쟁에서도 자신감이 붙었다.

업소에 영업을 나가 보더라도 종업원이나 손님들의 반응이 확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자랑했다.

선양의 대반격에 진로도 맞대응을 시작했다. 최근 출시한 20.1도짜리 신제품의 시음 행사와 도우미를 동원한 선물 증정 이벤트 등을 지역의 거점 상권에서 펼치기로 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도권에서 진로에 절대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두산 관계자들이 선양의 마케팅 비법을 꼼꼼히 살펴보고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선양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아마도 진로를 꺾기 위한 방법이 뭔지를 찾을려는 차원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귀띔했다.

다른 지방 업체에 비해 월등한 지역 시장 장악력을 지닌 영남 3사도 고민이 없지는 않다. 특히 부산ㆍ경남 지역을 양분하는 대선주조와 무학은 진로의 남진(南進)을 막아야 하는 동시에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 이중 전선에 놓여 있다.

부산의 광역화, 경남 주요 도시의 생활권 팽창으로 지역 간의 경계가 갈수록 희미해지면서 두 회사의 시장 쟁탈전은 갈수록 격화되고 있다.

상대방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두 회사의 전략은 판촉 활동 강화를 기본 축으로 한다.

가령 대선주조는 무학의 거점 도시인 울산이나 마산 등지에서, 무학은 반대로 대선주조의 영토인 부산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무료 기증주를 제공하거나 각종 이벤트를 벌여 고객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두 회사 간의 싸움이 후끈 달아오른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무학 미래경영사업부 박철우 대리는 “무학과 대선주조의 상대 안방 공략은 과거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 2년 전 두 회사 간에 인수합병(M&A)전이 벌어진 뒤 서로가 언론 플레이를 자주 하면서 최근에 ‘전쟁’처럼 불거진 측면이 크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두 회사를 긴장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진로의 위협이다. 하이트맥주에 인수되면서 막대한 영업력 시너지 효과를 갖게 된 진로가 그동안 요지부동이었던 영남 시장 정복에 나서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판단 때문이다.

이와 관련, 박 대리는 “진로가 지금은 하이트맥주와의 합병 이후 내부 정비 기간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2~3년 안에 전국 천하통일을 위해 대대적 마케팅 공세에 나설 것은 분명하다.

그 경우 확고한 텃밭 장악력을 가진 영남 3사도 적게는 10%에서 많게는 30%까지 시장을 잠식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한국기업평가(한기평) 송수범 연구원도 최근 내놓은 ‘진로와 하이트맥주 결합 이후 소주시장 전망’이라는 보고서에서 비슷한 예측을 내놓았다.

그는 보고서에서 “진로는 영남권에서 절대적인 시장 점유율을 가진 하이트맥주와 결합을 통해 취약 지역인 영남에서 물류센터, 주류 도매상 등 영업 기반을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점유율 확대를 추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진로의 천하통일 대업은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자도주 판매제도 폐지 이후 지역 소주 업체들이 꾸준히 쌓아올린 브랜드 파워와 제품력, 마케팅 능력 등이 진로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전국 시장 점유율 2위 업체인 금복주의 한 관계자는 “진로와 하이트맥주 연합군의 영남 공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장 변화를 지켜보고 있으며 대응 전략도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브랜드 ‘참소주’의 품질은 진로와 충분히 맞설 경쟁력을 갖췄다고 본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진로도 아직까지는 신중한 입장을 나타낸다. 당장 뭔가 새로운 시장 전략을 세우기보다는 일상적인 마케팅 활동을 꾸준히 펼쳐가면서 장기적인 승부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 회사 홍보팀 전영태 차장은 “소주 시장은 볼륨이 크고 안정적이어서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지방 소주 시장의 벽은 생각보다 높아서 우리의 공격력 못지 않게 지역 업체들의 방어력이 탄탄하다.

게다가 지금은 최근 출시한 ‘처음처럼’으로 수도권 시장에서 공세의 포문을 연 두산을 방어하는 것이 발등의 불”이라고 털어놓았다.

전문가들은 국내 소주 업체들의 제품 생산 능력이 대부분 엇비슷한 수준에 도달했으며,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브랜드 파워일 뿐이라고 진단한다.

송수범 연구원은 “소주의 원료인 주정은 주정 회사에서 만들고 소주 회사들은 이를 구매해 완제품을 만든다. 때문에 각 회사 제품마다 첨가물, 희석 비율, 제조 장치 등에 따른 미세한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크게 봐서 제품력은 대동소이하다.

그럼에도 진로가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것은 오랜 전통, 그리고 ‘참이슬’이라는 빅히트 상품이 만들어낸 높은 브랜드 인지도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런 지적은 향후 소주 시장의 경쟁이 더욱 불꽃 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소비자의 입맛을 만족시켜주는 것은 어느 업체나 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시장의 승패는 구매욕을 자극하는 마케팅 능력에 달렸다는 것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