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덕 쌓고 학업 닦는 것을 교육의 가치로 인식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896년. 조선조 말 고종과 왕세자는 그 해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한다. 바로 아관파천 사건이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 황제는 왕궁을 빠져나가는데 엄순헌 귀비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입문의 경비가 삼엄해 쉽게 황제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을 염려한 엄 귀비(당시 상궁)는 빈 가마를 들고 몇 날 며칠을 왔다갔다 하다 어느날 갑자기 고종황제가 탄 가마를 무사 통과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진명여고는 엄순헌 귀비(고종의 계비로 영친왕의 모친)의 오빠인 엄준원 선생에 의해 1906년 창립됐다.

이미 1년 전 사저인 달성위궁에 사숙을 설치해 교육에 뜻을 두었던 엄준원 선생은 이듬해 엄귀비께 진언, 학교 대지를 하사받고 곧바로 진명학교를 설립해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 과정에 엄 귀비의 뜻과 정신이 반영됐으리란 것은 짐작 가능하다.

당시 상궁으로서 자신이 모시는 황제에 대한 극진한 배려와 충절을 보여준 엄 귀비의 정신은 진명여고에 그대로 투영돼 이어져 내려왔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부덕(婦德)을 키우는 것을 학교 최고의 가치로 삼아왔는데 올곧고 기품 있는 여성을 키워낸다는 그 교풍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건학이념 또한 진덕계명(進德啓明)인데 이는 ‘부덕을 쌓고 학업을 닦아서, 나의 빛으로 겨레와 온누리를 밝게 비추어 전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진명의 인물

■ 정ㆍ관계

이윤자(11, 13대 국회의원ㆍ35회) 한양순(12대 국회의원ㆍ36회)

■ 학계

김재순(수녀ㆍ카톨릭대 부총장ㆍ35회) 김경희(건국대 재단이사장ㆍ55회) 윤순희 (숭의학원 재단이사장) 박명숙(경희대 예술학부 교수ㆍ57회) 전미숙(한국예술종합대학 무용원 원장ㆍ66회)

■ 문화계

나혜석(서양미술가 최초 여성운동가ㆍ3회) 김오남(시조시인ㆍ17회) 노천명(시인ㆍ20회) 손호연(와키시인ㆍ30회) 김희진(중요무형문화재22호 매듭장인ㆍ41회) 전양자(탤런트ㆍ49회) 박정자(연극인ㆍ50회) 김청자(메조소프라노ㆍ52회) 문정희(시인ㆍ55회) 김성녀(연극인 중앙대국악대학 음악극과 교수ㆍ57회) 박명숙(무용인 ㆍ57회) 김인숙(이상문학상 수상작가) 유지나(영화평론가ㆍ68회) 최화정(탤런트ㆍ68회) 이영현(가수 그룹 빅마마 멤버ㆍ89회)

■ 기타

황윤석(최초 여성판사ㆍ36회) 한양순(사회체육센터 이사장ㆍ36회) 황연대(한국 장애인복지재단 부회장ㆍ46회) 우복희(이화여대ㆍ의료원장ㆍ46회) 조경자(대한탁구협회 부회장ㆍ49회) 김현숙(뉴욕 Wind Song 방사선병원장ㆍ54회) 이선희(판사ㆍ58회) 신은경(한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ㆍ전KBS 아나운서ㆍ66회) 허성녀(수녀ㆍ68회) 김순덕(동아일보 논설위원ㆍ69회) 임수경(전 문익환목사 기념사업회 사무국장ㆍ75회) 심연수(인천지법 부천지원 판사ㆍ76회) 윤경아(서울행정법원 판사ㆍ77회) 노현정(KBS아나운서ㆍ86회)

‘진명에서는 남편과 자녀들을 잘 보필하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여인이 나온다.’ 예전 총각들이 진명여고 출신이라면 너나없이 최고의 신부감으로 꼽았다는 얘기는 그리 먼 얘기도 아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결혼 스토리가 대표적인 사례. 이 전 의장은 부인 한윤복(39회) 여사와의 혼담이 오갈 때 그의 부친이 “진명 출신이라면 따져 볼 필요도 없다. 그냥 데려와도 된다”며 즉석에서 며느리감으로 인정한 것은 지금도 진명여고 동창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로 회자된다.

‘며느리감의 산실’로 주목을 받아서인지 지금도 유명인들의 아내로 내조를 잘 하기로 소문난 진명여고 출신들이 적지 않다.

정세균 의원과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박계동 의원의 부인들이 모두 진명을 졸업했으며 이들은 내조 덕을 많이 보기로 이름나 있다. 또 박성범 의원의 당선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 신은경 전 KBS아나운서도 진명 출신이다.

진명여고 민경헌 부장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공부하세요’ 멘트의 주인공 노현정 KBS아나운서가 방송에서 보여주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도 진명의 전통과 무관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꼭 내조자로서 뿐 아니라 진명여고는 100여 년이 넘는 역사에서 명문 여고에 걸맞는 인재들을 배출해냈다.

1911년 10명의 1회 졸업생을 낸 이후 지금까지 졸업시킨 여성 인재 수만 3만여 명. 사공인숙 진명여고 동창회장(45회ㆍ천주교 루르드성모회 회장)은 “학교에 3년간 몸담는 동안 진명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절로 몸에 배게 된다”고 자부심을 표현했다.

진명 100년사를 빛낼 만한 인물 중에는 문화계에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유난히 많다. 이는 강하고 헌신적인 자성(慈性)을 지닌 전문인 육성을 추구하는 교육 철학과 건학 이념의 결과로 보아진다.

익히 아는 진명인 중에는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로 기록되어 있는 나혜석을 비롯, 한국 장애인복지 진흥회 상근 부회장인 황연대, 주부교실 중앙회장인 전 국회의원 이윤자,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판사인 황윤석, 이선희 변호사가 있고 시인 노천명, 무형문화재 매듭장인 김희진, 연극 배우로 유명한 박정자,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박정란, 성악가 김청자 등이 있다. 탤런트 겸 방송인으로 전양자와 최화정, 영화평론가로 프랑스 공로훈장을 받은 유지나, 빅마마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이영현 등도 꼽을 수 있다.

1925년 입학고사를 치르면서부터 명문여고로 부상한 진명여고는 한국전쟁 때도 교육과 봉사의 끈을 놓지 않은 것으로 자부심이 높다.

전란 중에도 부산시 고수동에 피난학교를 운영하면서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물론 끼니를 해결 못하는 교사와 학생들에게 식사 대접을 계속해온 것은 진명이 가진 교육에 대한 책임과 봉사 의식을 보여준다. 학교는 5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해 학생들에게 한국 전통의 떡을 만들어 주는 행사를 세 달에 한 번씩 벌이고 있다.

83년간 머물렀던 종로구 창성동을 떠나 1989년 지금의 목동 신 교사로 이전, 새 터전을 마련한 진명은 현재의 학교 건물에서도 오랜 역사를 느낄 수 있는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중앙 현관에 ‘三一堂(삼일당)’이라고 쓰인 현판이나 일제 때 강탈당한 설립자 동상 대신 놓여져 있는 하얀 구(球) 모양의 돌 등이 그것.

진명여고는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장기적 인재 육성을 위한 진명 장학재단 설립을 비롯, 전국 학생 백일장대회 개최와 사학의 위상과 역할에 관한 학술대회를 마련 중이다.

‘100년사’ 발간, 100년 찬가 제정, 모든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진첩 제작 등을 진행 하고 있고 2106년 개봉 예정의 타임캡슐 봉인 행사도 준비 중이다. 또 사이버 스쿨 기능과 자매 결연 외국학교를 연결하는 신세대형 홈페이지도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만들고 있다.

동문들의 발걸음도 바빠지고 있다. 모교를 후원하기 위한 100주년 기념 바자와 문화행사로 진명 동문 예술인의 합동 축하공연과 문집 발간, 진명인 미술전람회 등을 계획하고 있다.

3만여 동문들의 의지와 100년의 역사를 미래에 펼치자는 의미의 기념탑 제막을 위해 기본 컨셉 설정과 제작에도 돌입했다.

8월 15일 정오에는 학생 100명과 교직원, 동문, 학부모 100명 등 총 200명으로 구성된 국토 4단(端) 탐사단이 국토의 동족 끝인 독도, 서쪽의 백령도, 남쪽의 마라도, 북쪽의 백두산에 동시에 등정하여 국토애와 민족애를 다질 계획이다.

무엇보다 가장 역점을 둔 것은 100주년 기념관 건립이다. 단순한 기념관이 아니라 진명여고 교육의 심장부로 삼아 첨단 인텔리전트 기능을 구비한 종합적 건물로 구상하고 있으며 현재 재원 마련과 기념 유품 수집을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 중이다.

사공인숙 총동창회 회장은 “이들 행사는 모교 개교 100주년을 맞아 한마음으로 미래 진명을 향해 다 같이 매진할 것을 다짐하기 위한 것”이라며 의미를 되새겼다.

인터뷰 - 이호준 교장
"능력 · 창조성 갖춘 전문인 양성에 주력"

“학교가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고, 최대의 복지는 학력을 신장시켜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쉬는 것만이 복지가 아니라 자신이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길과 환경을 확보해 주는 것이지요.”

이호준 진명여고 교장은 “은사로서 학생들에게 ‘이제는 학력을 키워 능력있고 창조적인 전문인이 돼라’는 말을 항상 한다”고 강조한다.

부덕(婦德)을 키우는 것은 진명의 오랜 학교 덕목. 하지만 예전처럼 겸손과 얌전함만을 추구하다 보면 요즘 같은 무한 경쟁사회에서는 퇴보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미덕을 팽개치라는 것은 아니고 학생들이 실력을 키워나가도록 지원하는 것이 교육의 바람직한 길”이라는 것이 이 교장의 지론이다.

“고교 과정은 상급학교(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과정이지요. 그런데 학생들이 희망하는 전공과목이나 적성, 소질과는 관계없이 성적으로만 학과를 선택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안타까울 뿐이지요.” 그래서 이 교장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도록 기초학력 증진에 교육의 최우선 순위를 둔다.

진명이 가지고 있는 고교 최고 수준의 도서관도 같은 맥락이다. 학교 설립자인 엄준원 선생의 호를 딴 ‘의석관’으로 이름붙여진 도서관은 단순히 책만 읽는 예전의 도서관과는 전혀 다르다.

이 교장은 “각종 도서 및 영상자료를 구비하고 있으며 세미나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필요한 지식을 책으로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로 접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한다.

“이 도서관은 통합교과적인 문제를 중시하는 요즘 입시 환경에 절대 유리합니다. 예전처럼 단편적인 지식만을 묻는 입시 방식과 달리 이제는 여러 과목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문제가 출제되고 논술이 중시되기 때문이지요.”

단순히 암기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채널을 통한 지식 습득이 학생들에게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 이 교장의 신념이다. 여러 매체에 흠뻑 빠져들지 않으면 체계적인 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진명여고는 내신에 의한 수시 모집보다 정시 모집 대학 합격률이 높다. 특정 교과서나 참고서로 문제를 풀이하는 교육방식보다는 여러 영역에 걸친 종합적 사고를 키워주는 교육을 주창해서다.

“실제 보충수업의 경우 과목 이름이 ‘국어’나 ‘영어’로 붙여져 있지 않습니다. ‘현대시의 이해 처럼 대학교 수업 명칭 같은데 이런 수업은 자연히 대학 입시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교사들 또한 과목별로 이런 시도를 하고 있고 그에 맞는 교재개발과 연구에도 힘쓰고 있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교육 세계화도 이 교장이 신경쓰는 대목. “방학 때 학생들이 직접 해외에 나가 견문을 쌓을 수 있도록 다양한 해외여행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진명여고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중국으로 떠난다.

이미 1936년 선배들이 수학여행을 제법 거리가 먼 금강산으로 15박16일간 떠난 기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은 물론이다. “우리 것을 세계에 홍보하면서 다른 나라도 알게 되면 세계를 향해 웅지를 펴고 인류에 봉사할 수 있다”는 이 교장의 교육방침에서 비롯된 시도다.

1990년부터 명덕여중과 명덕여고, 명덕외고에서 교장 경력을 이어온 이 교장은 학교 수장직을 오래 맡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정년퇴직을 했으면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그 해 9월에 다시 부름을 받고 진명 가족이 됐다.

“TV나 신문에 교육계의 안 좋은 뉴스들이 많습니다. 왜 잘하는 소식은 찾지 않나요? 교육에 관한 보도는 교육적 효과를 염두에 두고 써야 합니다.” 이 교장은 “교육계 종사자들이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학생들을 이끌고 갈 수 있도록 언론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박원식차장 park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