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미국적 블록버스터 공식으로 애국심을 건드린 봉준호식 메시지

봉준호의 집단 소동극은 늘 모종의 납치와 실종에서 출발했었다. 형사는 사라진 여자의 육체와 그 육체를 시해한 범인의 뒤를 쫓고, 아파트 주민들은 강아지를 훔쳐간 범인을 코앞에서 놓친다.

실종이라는 테마에서 우러나오는 호기심과 급박함의 동력이 봉준호의 영화를 앞으로 민다면 그의 블랙 유머와 그 실종에 대항하는 이들의 무능력감은 봉준호의 영화를 다시 지상으로 끌어 내린다.

스스로는 ‘운명적 패배주의’라 칭했던 이 무기력한 친근함이, (똑같이 하수구에서 거대한 악어가 솟아나고, 정체불명의 괴물이 똑같이 우주선의 선원들을 공격해도) 영화 ‘괴물’이 태생적으로 미국의 공포영화들과 확연히 선을 긋는 지점이다.

그의 영화를 보다 보면 초절정의 힘과 능력으로 사태를 진압하고 차근차근 괴물을 쫓아가는 헐리우드 전사들에 대한 선망과 열망과 숭배 대신, 삶의 진물에서 나오는 비애감 한 자락을 깔고, ‘나 같은 저들’에 대한 수수한 동일시를 하게 만든다.

납치된 딸은 오리무중이고, 박강두 본인은 강제적으로 뇌 수술을 받고. 결국 개인의 무능력감이 우리 사회의 거대한 무능력과 맞닥뜨리게 될 때, 봉준호의 영화는 슬쩍 장르적 공식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의 메시지를 가진 블랙 유머의 세계로 관객들을 안내한다.

봉 감독은 힘 빼고 어깨 내리고 전례 없이 공포 영화에서 가장 가족적인 면모들을 웃음과 적당히 섞어, 대한민국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장르적 당의정에 자신만의 정치적 메시지를 쌓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괴물이 나오는 장소는 바로 테임즈강도 네시호(湖)도 뉴욕 앞바다도 아니라, 여기 지금의 장소인 한강인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그 일상의 장소에서 죽은 개의 시체와 죽은 여자의 시체가 나뒹굴며, 강 바닥에는 죽은 인육의 뼈가 한가득 널부러져 있다. 집채만한 괴물이 갑자기 한강에서 솟아올라 사람들을 한입에 먹어치우는 것을 목격할 때, 심리적 맹점을 가지고 무심히 바라보았던 한강은 다시 한번 역사의 장소가 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와는 아주 다른 신기한 감흥을 자아내게 된다.

그리하여 2002년 6월 13일, 효순이와 미순이 두 소녀가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졌다. 나는 괴물을 보며 이 비통한 순간의 역사적 진실이 미군 장갑차가 아닌 한강에서 뛰쳐나온 괴물의 입에서 나왔다고 느낀다.

‘괴물’은 우리가 지난 세월 무엇과 싸웠는지, 어떤 괴물과 맞섰는지에 대한 하나의 정치적 우화이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선택’처럼 정색을 하고 했다면 개봉 첫날 45만 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러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봉준호는 자신이 보아왔던 미국적 블록버스터의 공식을 가지고 미국의 심장을 향해 화염병을 던진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참으로 비디오 세대 감독다운 전략이며, 온갖 괴물과 싸워 온 1980년대를 통과한 학번들이 내릴 만한 그런 결론은 아닌가.

똑같이 한강에 ‘괴물’이 나와도 ‘용가리’는 되지 말자는 다짐을 하는 ‘괴물’에 대해, 대한민국 사람들 중 마음 한 조각을 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솔직히 CG로 태어난 괴물이 더 괴물스러운지, 단기간에 좌~악 관객들을 빨아들이는 블록버스터 마케팅 공식이 더 괴물스러운지 알 수는 없지만 말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심리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