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이창세 대검 과학수사기획관객관적 증거와 자료 수집으로 자백 의존하는 수사관행 개선하자는 것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병풍(兵風)’ 사건이 정국을 들쑤셔 놓았다.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가 은폐됐다고 주장한 김대업 씨의 입에서 비롯된 병풍 사건은 그가 증거로 내놓은 녹음 테이프의 조작 여부를 둘러싸고 대선의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이때 녹음 테이프 진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대검찰청 과학수사과의 감정 결과다. 대검 과학수사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등과 공동으로 테이프를 분석한 뒤 편집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려 사건의 향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당시 테이프 감정을 진두지휘한 검사는 이창세 과학수사과장. 그는 이후 서울중앙지검 컴퓨터수사부장 등을 거쳐 현재는 2005년 신설된 과학수사기획관으로 재직 중이다. 말하자면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산증인이다. 이런 경력 덕택에 그는 곧잘 검찰 내 대표적인 과학수사통(通)으로 꼽힌다.

16일 대검청사 12층 과학수사기획관실에서 그를 만나 검찰의 과학수사 현황과 정책 방향 등을 들어봤다.

과학수사도 기본 원칙에서 시작

“과학수사의 필요성을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인권 문제입니다.”

과학수사라고 하면 일반적인 통념상 날로 증가하는 지능 범죄와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대응수단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이 기획관은 뜻밖에도 ‘인권 보호’를 과학수사의 가장 큰 의의로 꼽았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예로부터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는 말이 있어요. 솔직히 수사하는 입장에선 자백을 받아내는 것만큼 깔끔하고 손쉬운 수사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유혹 때문에 과거엔 자백을 무리하게 강요하다가 고문이나 회유 등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죠. 과학수사는 바로 그런 관행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겁니다. 즉 객관적인 증거와 자료 수집을 수사의 첫 번째 덕목으로 삼자는 거죠.”

예상을 깨는 답변이 이어졌다. 그는 현재 국내서 쓰이고 있는 과학수사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지문(指紋)의 확인과 대조 절차를 들었다. 모든 국민이 오래 전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아왔던 터라 일견 하찮게 생각하지만 실상은 지문 채취가 과학수사에 크나큰 도움이 된다는 설명이었다.

“의외로 전 국민을 상대로 지문을 채취하는 나라는 별로 많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국내 수사 당국은 지문 덕택에 범인 검거 등에 결정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셈이죠.”

그가 과학수사와 관련해 인권이나 지문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은 결국 과학수사도 ‘기본’을 중시해야 한다는 지적에 다름 아니다. 과학수사는 뭔가 거창하거나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수사의 기본 원칙을 지키고 기초적인 단서를 확인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유전자정보은행도 과학수사와 관련해 그가 주목하는 새로운 제도다. 살인, 강간, 강도 등 강력 사범들의 유전자 정보를 데이터 베이스화(DB化)해 수사에 활용하자는 이 제도는 내년쯤 도입될 전망이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는 이미 예전부터 유전자정보은행을 운영함으로써 상당한 효과를 얻고 있어요. 강력 사범들에 대한 유전자 정보를 확보, 관리하게 되면 수사가 한결 용이해질 뿐 아니라 범죄 예방 효과도 상당히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학수사 시스템은 현장 수사 요원들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영양분 삼아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발전하는 게 보편적이다. 많은 투자를 한다고 해도 금세 가시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은 현재 ‘디지털 포렌식’(컴퓨터, 인터넷 상의 범죄 증거를 확보하고 분석하는 일) 분야만큼은 대대적인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컴퓨터, 인터넷, 이메일 등의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디지털 범죄’가 급증하고 있어 증거 수집과 분석에도 디지털 기술의 활용이 절실해진 까닭이다.

그가 과학수사와 관련해 인권이나 지문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은 결국 과학수사도 '기본'을 중시해야 한다는 지적에 다름 아니다. 과학수사는 뭔가 거창하거나 멀리 있는게 아니라 수사의 기본 원칙을 지키고 기초적인 단서를 확인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가 과학수사와 관련해
인권이나 지문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은
결국 과학수사도 '기본'을 중시해야 한다는
지적에 다름 아니다.
과학수사는 뭔가 거창하거나
멀리 있는게 아니라 수사의 기본 원칙을
지키고 기초적인 단서를 확인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현대차 비자금 사건, 론스타 외환은행 헐값매입 의혹 사건 등의 중수부 압수수색 과정에는 우리 디지털 파트 수사팀이 통째로 지원 나갔습니다. 경제 사건에서 회계 장부 압수수색은 기본인데 요즘은 대부분 기업들이 중요 자료를 컴퓨터로 보관하다가 일이 벌어지면 삭제하곤 하잖아요. 그래서 컴퓨터 압수수색과 자료 복구 및 분석 등 디지털 수사의 전문성에 대한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검찰 과학수사의 디지털화는 피의자나 참고인 조사에도 도입되고 있다. 이른바 ‘영상녹화 조사’가 그것이다. 이는 검사의 조사 장면을 그대로 CD에 담아 법정에 조서 대신 제출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법원 전체의 입장은 통일되어 있지 않지만 일부 하급심에서는 영상녹화 조사에 의한 CD를 증거로 채택하기도 했다.

이 제도는 당사자 진술을 판사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조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조사 과정에서의 인권 침해 시비도 원천 차단할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감청수사기법 활성화 해야

이 기획관은 검찰의 과학수사와 관련해 몇 가지 고충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중에는 감청(監聽)을 무조건 불법행위로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수사 과정에 그 방법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들에게 당신들의 가장 효과적인 과학수사 수단이 뭐냐고 물었더니 감청이라고 입을 모으더군요. 사실 조직범죄, 경제사건 같은 경우 감청이 굉장히 효과적인 수사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예전과 달리 감청에 제약이 많아 활용도가 크게 줄어든 실정이죠.”

현재 수사기관의 감청은 1994년부터 시행된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수사상 꼭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만 법원의 영장을 발부 받아 실시할 수 있다. 이는 과거 수사 당국의 불법 도청과 감청이 횡행한 데 따른 업보의 성격이 짙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검찰로서는 합법의 테두리 내에서 새롭고 강력한 수사 수단을 개발하는 것만이 한 차원 높은 ‘과학 검찰’로 거듭나는 길이라고 이 기획관은 말했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