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 개인 사무실 열며 칩거 3개월 만에 정중동 행보경제에 초점… 외국 방문 통해 국가지도자 이미지 심기 나서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가 9월 들어 ‘대권’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5월 20일 지방선거 유세 도중‘문구용 칼’테러를 당한 뒤 사실상의 ‘칩거생활’에 들어간 지 3개월여 만이다.

박 전 대표는 자신의 미니홈피 누적 방문자 수 500만 명 돌파를 기념해 9월 중순 일일바자를 열어 첫 외부 공식행사를 갖는다. 이달 말에는 독일 방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권행보에 나설 예정이다.

박 전 대표는 지난달 30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의원 워크숍에서 기자와 만나 “개인 사무실을 여의도에 열 계획"이라며 "준비기간을 거쳐 10월 초나 돼야 공식적으로 문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사무실의 성격에 대해 대선캠프는 아니라며 “외부 사람을 만나는 곳으로, 몇 명 정도만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선 싱크탱크 전초기지로 부상할 여지는 충분하다. 한 측근은 “정책개발과 지원 세력을 묶을 대선캠프는 연말쯤 짜여질 것”이라고 해 그 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박 전 대표의 대권행보가 빨라지면서 대선지형도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당내 경쟁주자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대권의 바로미터인 ‘민심’과 ‘비전’을 찾아 이미 출발했고 박 전 대표까지 본격 가세하면 대권레이스는 한층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표는 6월 15일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테러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신촌 세브란스)에 가는 것 외에는 줄곧 집에 머물며 독서를 했다. 토마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 김정렴 회고록인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등 주로 세계화, 선진화와 관련된 책들을 읽었으며 유익하더라고 했다.

그렇다고 ‘칩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춘상 보좌관은 “(박 전 대표가)필요한 사람은 직접 만나고 전화로 통화하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바쁘게 보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미 국무부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차관보 등을 배석자 없이 만났고 안부를 묻는 중국, 일본, 유럽 외교관들과도 접촉했다.

사이버 공간 외연 확대에 적극적

눈에 띄는 외부 활동도 있었다. 박 전 대표는 7월 14일 강남구 신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네티즌 지지자들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홈페이지 ‘호박넷(www.hopark.net)’ 오픈 행사에 참석했다.

‘호박넷’이란 ‘호박(好朴, 박근혜를 좋아하는)’과 ‘네트워크(network)’의 합성어로, 박 전 대표를 좋아하는 국민이면 누구나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참여형 사이트이다.

공식 홈페이지와 ‘미니홈피’를 이미 갖고 있는 박 전 대표가 사이버 공간에 또 하나의 새 기지를 마련하는 것은 대권 행보와 관련한 외연 확대 시도로 읽힌다.

7월 19일에는 특별재난구역으로 선포된 강원도 평창과 정선의 피해지역을 찾았으며, 7ㆍ26 재보선을 앞두고 전국 4곳의 선거 지역을 돌았다.

박 전 대표가 공식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8월 15일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육영수 여사의 32기 추도식에서다. 이날 박 전 대표는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의미심장한 말도 했다.

“여러분들의 흐르는 땀을 보면서 어머니에 대한 생각과 함께 여러분들의 관심과 열정에 꼭 보답을 해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여러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꼭 보답하도록 노력하겠다.”

장차 전개될 대선 경쟁에서 꼭 승리해 성원에 답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박 전 대표는 당내 행사나 국회에 종종 모습을 나타내 의원들과 스킨십을 나눴다. 지난달 24일 오전,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제2차 전국위원회의에 참석해 의원과 당 관계자들을 만나고 유정복 의원(전 비서실장)으로부터 여의도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친(親)박근혜 성향으로 분류되는 김학원 의원이 전국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 데 대해서도 적잖이 고무되었다.

이어 박 전 대표는 곧바로 해산한 자민련의 지구당 위원장 및 당직자 출신 모임인 자민련동지회 초청 특강에 참석, 자민련동지회가 ‘애국단체’로서 자신과 뜻이 같다고 생각한다며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자민련 사무총장을 지낸 김한선 회장(전 국회의원)은 “내년 대선에서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밝혀 자민련동지회가 박 전 대표의 우군이 될 수 있음을 내비쳤다.

박 전 대표는 지난 3개월여를 단순한 휴식이 아닌 대선궤도에 본격 진입하기 위한 재충전의 기회로 삼아 잠행하는‘정중동(靜中動)’행보를 취한 셈이다.

박 전 대표의 대권행보에 동력을 보탤 외곽 조직의 움직임과 대권 로드맵도 주목된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P빌딩에는 2개월 전부터 박 전 대표를 위한 대선 예비 캠프가 가동되고 있다. 아직 대선 전략 및 언론홍보 기능과 일정을 조정할 비서 기능을 담당하는 ‘확대비서실’수준이지만 규모를 확대 중이다.

사무실은 김무성ㆍ유승민ㆍ유정복 의원이 중심이 돼 운영하고 있으며 김 의원은 전략과 외부인사 영입을, 유 의원은 인재풀과 의원을 담당하며 유정복 의원은 사무실과 박 전 대표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무실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와 함께 1992년 정권창출의 일익을 담당했던 김현호 신동철, 김선동, 이헌승 씨 등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현호, 신동철 씨는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맹형규 캠프에 있던 인물이고 김선동 씨는 박 전 대표 비서실 부실장, 이헌승 씨는 김무성 의원 보좌관으로 모두‘친박(親朴)’인사들이다.

박 전 대표는 9월에 대학강연 등 ‘특강정치’를 가동시켜 현안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이와 아울러 외국 방문을 통해 글로벌 리더로서의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준다는 방침이다.

특히 첫 대권행보의 초점을 ‘경제’에 맞춘 게 주목된다. 박 전 대표는 9월 말 독일의 집권당인 기독교 민주동맹 산하 연구소인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 초청으로 독일을 방문, 최초의 여성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만난다. 또 선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4년 방문했던 독일 루르 지방 함보른 탄광도 찾을 계획이라고 한다.

10월에는 닝푸쿠이(寧賦魁) 주한 중국 대사의 요청에 따라 중국을 방문, 새마을운동 특강을 할 예정이다.

이렇듯 독일ㆍ중국 방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신화’이미지를 환기시킴으로써 박정희 후광효과를 얻는 동시에 박 전 대표와 ‘경제’를 연결시킨다는 계산이다. 나아가 ‘내륙운하’구상과 ‘외자유치’로 각각 경제전문가 이미지를 각인시킨 이명박, 손학규 두 경쟁자에 비해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경제’를 집중 보완해 차별화된 ‘경제대통령’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복안이다.

'대통령의 딸' 한계 벗어나야

그러나 박 전 대표가 본격 대권행보에 나섰지만‘넘어야 할 산’은 많다. 우선 ‘경제’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부친의 ‘경제 신화’를 차용한 것이어서 박 전 대표만의 고유한 색깔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현행 당헌 당규상 대의원 20%, 책임당원 30%, 국민선거인단 30%, 여론조사결과 20% 등을 반영해 후보를 결정하도록 경선 방식은 친박 인사가 절반을 넘는 당 구조상 박 전 대표에게 유리하지만 이는 여론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최근 경기도당 위원장 경선이나 원내대표 선출에서 나타났듯 반박 성향의 소장ㆍ중도파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벽이다.

무엇보다 박 전 대표의 지지층이 한나라당 고정 지지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은 본선 경쟁력에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친박 인사들이 대부분 영남ㆍ보수 인물이란 점은 극복해야 할 과제다.

9월부터 본격화하고 있는 박 전 대표의 대권행보가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아니면 한계를 드러낼지 가을 정국의 새로운 관심거리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