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며느리의 한가위 사랑] 네팔 며느리 기따 쿠마리 라이우애 넘치는 가족사랑으로 문화적 차이 극복, 친정 식구들도 어느새 '한국 마니아'

“엄마, 나 고름 어떻게 해야 해? 내가 갈까? 나 몰라.” 네팔에서 온 기따 쿠마리 라이(34)는 추석을 앞두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선 옷고름을 매지 못해 쩔쩔 매며 엄마를 찾는다. 그런 며느리의 옷고름을 손수 매어주며 시어머니 김영순(79) 씨는 빙그레 웃는다. “서툴지만 자꾸 배우려 하는 모습이 예쁘고, 더 귀엽고 그렇죠.”

그러한 시어머니께 “시집올 때부터 엄마라고 불렀다”고 자랑하는 외국인 며느리 기따. 천진한 말투가 꼭 재롱을 부리는 귀염둥이 막내 딸의 그것 같다.

며느리는 요즘 한창 들떠 있다. 며칠 있으면 추석. 여느 며느리 같으면, 손 끝에 물 마를 날 없는 명절이 다가오는 것이 겁부터 날 텐데 기따의 얼굴에선 오히려 화색이 돈다.

“형님들이 직장에 다니셔서 주말이나 돼야 볼 수 있거든요. 명절 때는 다 모이니까 무척 재미있어요. 윷놀이하고, 화투도 치고···.” 기따는 “명절 스트레스요? 그런 것 내게 없어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기실 기따에게 추석은 또 다른 각별한 의미도 있다. 남편 박순덕(42) 씨와의 첫 만남이 이뤄진 뜻 깊은 날이기 때문이다.

산업연수생으로 와 신부감으로 낙점

5년 전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와 있던 기따는 직장인 제과회사에서 같이 근무하던 한 선배로부터 “추석 때 송편이나 함께 빚어보자”는 초대를 받았다. 선배는 지금은 큰형님이 된 최봉순(49) 씨. 평소 동료들 사이에 싹싹하고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 착한 마음씨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기따를 막내 동서감으로 점 찍었던 것이다.

그날 기따는 7남매가 되는 남편 형제들이 북적대며 우애 있게 살아가는 정겨운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큰집에 다같이 모여 일하고, 놀고, 음식도 먹고 하는 모습이 무척 화목해 보였어요. 사실 그때 신랑하고는 만나서 말도 많이 못했지만 ‘이 사람하고 같이 살아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심, 신랑보다 가족이 더 맘에 들었다는 고백이다.

이렇게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만남을 이어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차츰 정을 느끼면서 2002년 5월과 10월 네팔과 한국에서 각각 두 차례의 결혼식을 올렸다. 이제 결혼생활 5년 차에 막 접어들었다. 그 사이에 네 살, 세 살배기 자매 현정, 현경이가 태어났다.

천생연분이라던가. 만 4년이면 신혼은 지난 듯하지만, 부부는 여전히 “조금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닭살’ 부부의 전형.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국제결혼인 만큼 살아온 환경이 다르면 다툴 일도 많아질 것 같지만, 기따네 가정에는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저 사람 머리 좋고, 이해심 많아요”하며 말끝마다 아내를 추켜세우는 남편 박 씨는 “지난 4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한 번도 크게 싸운 적이 없었다”라고 자랑한다.

네팔에서 4남매의 든든한 맏딸로 자란 기따는 가족을 잘 챙기고, 매사에 사려도 깊다. 2년 전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큰형님 댁에서 나와 분가했지만, 실상은 같이 사는 것과 마찬가지.

집에 있는 날보다 시댁에서 보내는 날이 더 많은데도 그녀는 전혀 싫은 기색이 없다. 주말마다 시댁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부모님 농사일을 돕기 위해 틈틈이 오간다. 그런데도 “뒤에서 돕는 것뿐이지, 혼자서 제대로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겸양이다.

그렇다고 부부가 살아가는데 소소한 말썽이 없을 수는 없다. 하물며 자라온 문화가 전혀 다른 외국인이 부부가 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1997년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기따는 결혼 전 이미 한국생활을 5년 정도 한 터였지만, 결혼 초기에는 어르신들 앞에서 반말을 해서 지적을 많이 받았다. “한국말은 어른들의 말과 아이들의 말이 따로 있어 구분하기 어려웠다”고 그간의 고충을 토로했다.

문화적 차이도 무시할 순 없었다. 결혼 초기 기따는 한여름에도 집안의 문을 꽁꽁 닫았다가 남편이 기겁했다. 네팔에서는 속옷 빨래는 남이 안 보이는 곳에서 말려야 하기 때문에 베란다가 아닌 방안에다 널고, 대신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문을 닫은 것이었다.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남편의 눈엔, 더워서 문을 열어놓으면 자꾸 닫아버리는 아내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건 당연했다.

서로의 문화에 차츰 익숙해져 가는 지금은 아이의 양육 방식을 두고 종종 갈등을 빚곤 한다. 큰아이를 보면 속칭 ‘미운 네 살’이라는 말이 절감이 간다.

아이들이 개구쟁이라 말썽을 부리다 아빠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받곤 한다. 그럴 때면 기따는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린다. “엄마가 외국인인 만큼 아이들을 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신랑은 믿어요. 그래서 더 심하게 야단 치는 것을 아는데도 여자들은 마음이 약하잖아요.” 신랑의 속뜻을 알면서도, 기따는 서운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기따는 “제가 외국 사람이라 잘못 키워서 그런가 하는 걱정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남편과 다툰 뒤 시어머니께 고민 상담

힘들 때면, 더욱 고향과 친정 엄마가 생각나는 법. 그러나 남편과 갈등이 있을 때면 그녀는 친정 대신 형님들과 시어머니께 고민을 상담한다. 그럴 때마다 각자 가정 건사하기도 바쁜 세상에 막내 동생 내외의 소소한 고민까지 받아주는 형님과 동서들이 말할 수 없이 고맙다고 했다.

특히 시댁에서 분가를 하고, 막 둘째 현경이를 낳았던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 “현경이를 낳고 보름 넘게 미역국을 먹었더니 질려 버렸어요. 그래서 둘째 아주버님께 감자탕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뛰어가서 사다 주시더라구요. 너무 고마웠죠.”

기따의 시댁 식구 자랑은 끝이 없다. “그때 난생 처음 아파트란 곳에 살았는데 보일러를 틀 줄을 몰랐어요. 게다가 12월이어서 날씨도 너무 추웠죠. 그래서 형님께 ‘춥다’고 전화했더니 당장 달려오셨어요. 혹 ‘창문 틈새로 바람이 새나’ 하고 형님댁의 커튼을 떼와서 달아주기까지 하셨죠. 그렇게 잘 해줄 때는 정말 눈물이 나요.”

아주버님이 사준 아이들 장난감에서 이불이며, 형님이 담궈 준 김치 등 먹거리까지 집안 곳곳에는 남편 박 씨 형제들의 사랑과 배려가 넘쳐 난다. 박 씨는 “남편이 아무리 잘한다 해도 아내가 외국에서 시집온 만큼 의지할 데가 많이 없는데, 형제들이 다정하게 감싸주는 것이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큰 힘”이라고 말한다.

아내 역시 “네팔이나 한국이나 동서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저는 오히려 항상 동서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자랑한다”며 “우리 같은 동서지간은 어디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행복해 한다.

기따는 내친김에 지난 8월, 네팔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진짜 한국인 며느리가 된 것이다. 이후 아이들을 데리고 결혼 후 처음으로 어렵게 친정 나들이를 했다. 아이들이 네팔인 외할머니와 친숙해질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네팔로 떠나기 전 방송(KBS ‘러브 인 아시아’) 화면을 통해 처음 할머니를 만난 현정이는 외할머니에게 처음엔 “칠칠 맞다”는 반응을 보였다. 네팔 문화에 따라 코와 귀에 커다란 금장식을 달고 있는 할머니 모습이 딸에게 이상하게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그러한 금장식이 네팔에선 “부유층의 상징”이라고, 딸에게 설명해줬다. 그러자 “다르다”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님을 어린 딸도 이해하는 듯했다.

부부는 현재 살고 있는 집 인근에 있는 네팔인 공장 기숙사에도 어린 딸들과 곧잘 함께 간다. 어려서부터 자주 접하다 보면, 국경의 벽도 낮게 느껴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소 키우며 '처가 방문 프로젝트' 진행

주변에선 아이들이 장차 커가면서 ‘코시안(Kosian)’이라 놀림 받을까 가장 우려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기따 부부는 크게 염려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들에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는 나라가 엄마의 고국”이라며 자부심을 심어준다. “엄마의 나라를 똑 부러지게 설명할 줄 안다면, 어디 내놔도 왕따를 당하진 않을 것”이라며 웃는다.

네팔의 친정 식구들도 이러한 기따네 가정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처음엔 맏딸이 먼 이국 땅에서 결혼해 살겠다는 말에 “너무 힘든 길”이라고 펄쩍 뛰었지만, 지금은 “아직 결혼 안한 막내 딸도 한국 남자와 결혼시키고 싶다”며 ‘한국 마니아’가 다 됐다.

“아내가 친정 부모님이 보고 싶은 만큼, 저도 네팔의 처가 식구들이 보고 싶어요.” 박 씨의 네팔 처가 사랑도 장모의 사위 사랑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네팔 방문을 위한 프로젝트도 추진해왔다. 신혼 시절, 소 두 마리를 구입해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큰집에 맡긴 것. 이 두 마리는 새끼를 낳아 이제 네 마리로 불었다.

“우리 네 식구가 네팔 가려면 400만~500만원은 족히 드는데, 갑자기 그런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요? 소는 그럴 때를 대비한 것”이라고 박 씨는 살짝 귀띔한다.

그런 남편이 눈물겹도록 고마운 기따. “전 시집 잘 왔어요. 네팔에서도 이런 가정은 못 만났을 거예요. 이번 추석에 보름달이 뜨면 항상 우리 가족 모두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기만을 빌 거예요.”

‘가족’이란 말에는 국경을 초월하는 사랑과 따뜻함이 담겨 있다. 언어와 피부색과 문화가 달라도 인류 모두를 하나로 묶어준다. 살맛나게 하는, 이보다 더 든든한 울타리가 세상에 또 있을까. 그 앞에서 더 이상 순혈을 강조하고 차별하는 것은 부실없는 짓이라는 것을 기따 부부는 말해준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