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부쩍 늘어난 중국동포와 새터민(북한 이탈 주민). 그들은 돈을 벌어 가난을 탈출하고자, 정치적 속박과 압제를 벗어나 자유를 얻고자, 모진 고생을 감내하며 한국 땅을 어렵사리 밟았다.

그들은 분명 같은 핏줄이 살고 있는 한국에 기대와 희망이 컸을 것이다. 또한 코리안 드림도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따뜻한 조국이 아니었다. 차별과 냉대로 가슴에 상처를 입히는 낯설고 거북한 땅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를 악물고 살아간다. 보다 나은 미래와 희망을 찾아 이 땅에 왔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달리 갈 곳도 없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뜨는 한가위가 다가오면 귀향의 설렘으로 들뜨는 한국 사회. 그러나 남몰래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국내 중국동포와 새터민들이다. 이맘때가 되면 그들의 가슴은 휑하니 구멍이 뚫린다. 고향 생각,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이다.

가고 싶다고 내키는 대로 갈 수 없는 곳에 고향이 있기에 가슴은 더욱 미어진다. 그 절절한 마음을 담아 고향에 띄우는 편지를 중국동포 이금자(32) 씨와 새터민 장인숙(65) 씨가 주간한국에 보내왔다. 일부 어색한 표현만 손질하고 되도록 편지 원문 그대로를 싣는다. 그들이 고향 땅을 벅찬 마음으로 밟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주간한국도 독자들과 함께 기원해 본다.

중국 동포 이금자 씨의 편지
"하늘나라로 가신 아버지는 아마 고향 땅에 들르셨을 거예요"

보고 싶은 고모께

그동안 잘 지내셨죠? 고모부를 비롯한 온가족 다 옥체 건강하신지요?

요녕성 반금시를 떠나 한국에 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다 되었네요. 사람 잡듯이 찜통같이 푹푹 쪘던 여름의 기세도 계절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네요. 시원한 가을바람에 벌써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버렸네요.

지금 코스모스 한창이고 황금빛 출렁이는 고향 땅의 벼 냄새가 제 코를 자극하는 듯한 착각이 들어요. 아! 그리운 고향. 언제 어디서나 생각나는 고향은 타향살이 하는 모두에게 언제나 정겨운 그 이름이네요.

지금 추수 준비에 많이 바쁘시겠죠? 옛날 생각이 절로 납니다. 경복이랑 경석이랑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가을하기 싫어서 매일 화장실에 가니, 담배 피우니 하면서 이런 저런 핑계로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면서 고모랑 고모부 속 많이 태우셨죠?

봄에는 논밭의 개구리 잡아서 껍질을 벗기고 여자아이들 놀리던 그런 철없던 시절, 그때가 너무나도 그리워요. 그때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지금은 다 한국에 와서 고모, 고모부 호강시켜 드리려고 공사판에 다니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옆에서 보는 저도 너무나도 대견스러워요.

고모! 항상 옆에서 엄마같이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주신 고모께 이렇게 편지를 쓰려고 하니 할 말이 너무나도 많네요. 저는 섬유회사에 출근하고 있어요. 중국에 있을 때 한국은 돈을 맘대로 벌 수 있는 천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한국 땅을 밟아보니 너무나도 다른 세상이었어요.

며칠 전의 일이에요. 우리 회사에 입만 열면 욕으로 시작하는 남직원이 있어요. 외국인 근로자만 보면 항상 욕부터 하고 그래요. 처음에는 참고 또 참았어요. 그러나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지 한 달, 두 달 참다가 6개월을 참다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또 아무 잘못도 없는 저에게 욕을 해대니 참고 참았던 울분이 한꺼번에 욱~ 하고 터져버렸지요.

그래서 손에 들고 있던 섬유원단을 내려놓고 그분에게 “다시 한번 욕해봐, 내가 당신한테 욕먹으려고 여기까지 와서 뼈 빠지게 일하러 왔어요? 당신 눈에는 우리 외국인들이 사람으로도 안 보이나요?”라고 대들었어요. 그러니까 또 “XXX, 이런 말 듣기 싫으면 그만둬, XXX”니 뭐니 해서 저도 똑같이 “XXX, 그래, 당신 욕만 하면 다야? 그래, 그만두라고? 나도 당신 같은 사람이 치사해서도 더는 못 다니겠어, 당신이 그만두라고 했으니까 나중에 그 말한 대로 책임져”라고 했지요. 열이 머리 끝까지 올라오니까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그 길로 그 회사에서 나와 버렸어요.

고모,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이것이 타향살이의 서러움인가 봐요. 중국에 있을 때는 그렇게 야무지고 성격이 꿋꿋한 저였는데 여기 한국에 오니 이렇게 원통할 때가 있어도 하소연할 곳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 이유 없이 욕먹고 회사 나온 저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이해도 안 가고···.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요.

▲ 이금자 씨.

그러나 이 한국 땅에는 좋은 사람, 착한 사람도 너무 많아요. 아버지께서 췌장암 걸리셨던 거 알지요. 몇 개월 동안이나 투병 생활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 몰라요. 다니던 교회 성도들이 와서 격려와 위로는 물론 한림대 강남성심병원의 많은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언니들의 친절한 보살핌도 많이 받았어요.

아버지가 췌장암 말기라 몇 개월 동안 병원 생활하면서 몸도 많이 지치고 힘들어 했어요. 엄마는 직장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자 바로 퇴직하시고 아버지 병간호에 들어갔어요. 2월 말에 1차 수술을 받으셨는데 암이 너무나도 커서 제거하지 못하고 또 이미 간까지 전이돼 담즙을 제대로 배출할 수 없어서 담즙 관을 밖으로 연결하였어요. 인공으로 엄마가 계속 빼내야 하였지요.

1차 수술 후 보름 동안 아버지의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나 빠지시더군요. 우리 가족들 한국에 나와 있는 사람 많다 하지만 큰 언니는 논산에서 회사도 다녀야지 애도 키워야지 하면서 바쁘고, 나도 조금이라도 일을 해야지 아버지 병원비도 그렇고 집세도 그렇고 한 푼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회사를 다녀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아버지 옆에는 엄마 혼자만 병간호를 해야 했어요. 긴 병에는 장사가 없다고 몇 달을 엄마 혼자서 보살피다 보니 성한 사람도 못 견디는데 원래부터 몸도 허약한 엄마가 이를 악 물고 버티는 것이 너무나도 안쓰러웠어요. 중국에는 둘째 금옥 언니가 있잖아요. 병간호할 사람은 금옥 언니밖에 없어요. 또 아버지는 둘째를 못 보니까 계속 보고 싶다고 하지···.

그래서 둘째언니를 한국으로 초청하려고 중국에 초청장을 보냈어요. 그런데 주중국영사관에서 가족에 병간호할 사람이 있다는 이유로 비자 발급을 거절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딸 얼굴 보자고 그러는데 한국에 오는 길이 딱 막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우리 가족 모두가 할 말을 잃고 넋이 나갔었지요.

같은 민족, 같은 핏줄, 같은 동포, 같은 혈육인데 중국과 한국이란 이 두 나라의 넘지 못할 이 크나큰 벽 때문에 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얼굴도 못 보다니. 자식으로서 마지막 효도 한번 해보자는데도 안 된다니. 너무나 막연했어요. 그때는 정말이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이 심했어요.

아버지 이제 겨우 58세. 그처럼 젊은 연세에 췌장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도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힘들지만 또한 엄마의 건강도 우리가 염려하는 중의 하나였어요. 이렇게 엄마 혼자서 병간호하고 우리 딸 둘은 주말에만 잠깐 들르고 그러면서 5개월이란 세월이 흘렀어요.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중국동포교회에 아버지를 모시고 예배 보러 갔었어요. 때마침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동포교회에 나오셔서 동포들의 어려운 점 등을 상담해 드리고 있었어요. 엄마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인권위원회에서 주중국영사관에 민원을 올리고 또한 김혜성 목사님을 비롯해 중국동포교회에서 법무부 등에 민원을 올리고 큰언니도 전자민원을 올리고 하면서 영사관에 다시 비자 신청을 하였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영사관에서는 이튿날로 비자 발급을 허락하셨고 3일 후 둘째 언니가 한국 땅을 밟게 되었어요.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아버지가 정신착각으로 계속 이상한 말씀도 하시고 우리도 못 알아보고 물도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어요. 그런데도 둘째언니가 와서 지극히 간호하고 물 한 모금도 억지로라도 마시게 하면서 아버지가 차츰차츰 기운을 차리시는 것이었어요. 죽도 조금이라도 드시려고 노력하시고 살겠다는 의지가 대단히 강하셨어요.

하지만 언니가 간호한 지 보름 후 아버지께서는 끝내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가시기 전에 그렇게 고향 땅에 가보고 싶다 하시면서, 중국 땅에 있는 고모랑 큰아버지랑 보러 간다고 여권 빨리 준비해라, 차 시간이 다 되었다 하면서 계속 고향 이름을 부르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그렇게도 그리운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가신 것이 우리에게는 제일 마음 아픈 일이지요. 그래서 마지막 가시는 길에 고향에라도 다녀가시라고 유골을 인천 앞바다에 뿌리기로 하고 인천으로 갔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유골을 바다에 뿌리고 보니 우리 고향으로 가는 여객선이 보이지 않겠어요. 하나님도 우리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을 아시는지 아버지가 저 배를 타고 중국 고향을 찾아가라는 뜻으로 그 여객선을 보내신 것 같았지요. 또 유골을 뿌린 근처 부표 위에 갈매기가 다섯 마리 앉아 있다가 한 마리만 멀리멀리 날아가고 네 마리만 남아 있었는데 마치 아버지를 보낸 우리 세 자매와 엄마의 모습 같았어요.

고모! 비록 아버지는 지금 이 땅에 없지만 저 천국에서 우리가 씩씩하게 이 한국 땅에서 잘 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거예요. 또한 이 한국 땅에서 우리와 함께 아픔을 같이 하고 사랑해주고 관심을 가져준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버지 또한 아실 거예요.

다만 서운한 것이 있다면 둘째언니가 3개월 비자를 받았는데 2개월 뒤면 중국에 다시 들어가야 하고 한국에 다시 나오려면 너무 어렵다는 점이에요.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찾아오고 명절이나 추석 때라도 봐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힘들어요. 아무튼 많은 사람들의 사랑에 제가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고모, 고모께 드리고 싶은 말 너무나도 많아요. 우리는 여기서 아버지 몫까지 더더욱 씩씩하게 열심히 일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고모도 항상 건강하세요. 고모와 만날 그때를 기대하면서 이만 끝낼게요.

2006. 9. 21. 조카 금자 올림

새터민 장인숙 씨의 편지
"꿈결에도 그리운 어머님 통일 되는 그날 꼭 찾아갈게요"

▲ 장인숙 씨 가족.

어머니!

벌써 찬 기운이 아침저녁이면 온몸을 스치는 가을입니다. 며칠 있으면 추석이라고 하니 흐르는 세월을 멈출 수가 없네요. 저의 머리에도 흰서리가 내리었는데 팔순 고령인 어머님의 모습은 얼마나 변하였을까 생각하니 흐르는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품을 떠나서는 한순간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어머님의 모습을 본 지도 15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내가 나서 자라고 청춘의 꿈과 지혜, 모든 열정을 바쳐 일하고 숨쉬던 그곳 평양의 모습은 얼마나 변하였는지···.

여기서도 TV로 평양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때마다 평양에 가고 싶고 어머니와 동생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지금도 생존해 계시리라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일반 사무원인 아버지의 너무나도 적은 월급으로는 우리 5남매를 키우기가 얼마나 힘드시었는지 우리 형제들은 그때는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자신들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여 우리 형제 모두를 일류대학에 보내시고 그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억척같이 일하시었고 그 덕분에 우리 모두 어엿한 기사가 되였고 노동당원이 되였습니다.

그때에는 우리 형제들이 그 고마움을 미처 다 몰랐지만 우리들이 아버지, 어머니가 되여 보니 부모님들이 저희들에게 바치신 지극정성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고 고마운지를 알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모든 사랑과 믿음에 보답도 못하고 국경 아닌 38선 이남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습니다.

5남매의 맏딸인 제가 언제 한번 제 구실 변변히 못했지만 어머님께서는 언제나 "열 아들, 열 딸, 열 며느리, 열 사위 못잖은 것이 우리 맏딸이요"라면서 칭찬과 격려를 해주었지요. 저는 꼭 남들이 부러워할 효녀가 되리라 열 백번 맹세해왔는데 오늘 천리타향에서 부모형제와 떨어져 살고 있으니 이 세상이 너무나 야속하기만 합니다.

어머니!

30대 중반에 나라 일을 하다가 저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저는 온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의 모든 빈 구석을 챙겨주신 분이 바로 어머님이시였고 저는 어머님이 계셨기에 그 고된 생활 속에서도 아들 4형제를 남부럽지 않게 키울 수 있었고 저 역시 국가의 최고 유공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의 맏아들이 외국 유학길에 오르고 둘째아들도 다른 나라로 유학길에 오르고 셋째는 전투비행기 비행사로 하나둘 저의 곁을 떠나자 어머니는 너무도 대견한 손자들 자랑에 늙은 줄도 몰랐다면서 대견해 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머니!

그러던 제가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해 겨울 설날을 3일 앞두고 유학 간 아들이 한국행을 하게 되여 혈육 한 점 없는 우리나라 최북단으로 추방되였지요. 그때 우리를 지키던 보위원들에게 어머니는 "저를 대신 잡아가고 저 애들을 조금이라도 용서해주시오, 가더라도 날씨가 좀 풀리면···, 선생님 며칠 있으면 설날인데···, 우리들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습니까?"라고 하면서 애원과 절망에 가득찬 눈빛과 목소리로 매달렸지만 그런 어머니를 그들은 구둣발로 답하였지요. 그래도 다시 매달리며 애원하던 모습은 지금도 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것이 어머님과의 마지막 이별이였습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탄광오지에서 죽지 못해 살았습니다. 언제면 어머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한가닥 희망이 있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추방되어 오자 그 홧김에 아버님이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지만 저는 갈 수도 없었고 보내주지도 않아 맏딸로서 아버지 묘소가 어딘지도 모르고 지내는 불효자식이 되였습니다.

어머니!

그곳에는 저의 남편의 묘소도 있는데 어느 누가 벌초라도 해줄 수 있겠습니까? 풍문에 의하면 어머님과 동생들도 다 흩어져 지방에 추방되였다고 하는데···, 그 생각을 하면 자다가도 소스라쳐 일어나곤 합니다.

여기서는 추석을 최대 명절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국 고속도로가 고향 가는 차들로 꽉 막혀서 마치도 주차장을 방불케 합니다. 이때에는 모든 자식들이 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들을 찾아 뵙고 조상들의 묘소도 잘 가꾸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기는 명절을 보냅니다.

추석에는 매(모든) 집에서 송편도 만들어 먹습니다. 이곳에 온 우리들도 이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뭉쳐 내 고향이 바라보이는 임진각 망향각에 가서 합동 제사도 드리고 부모님들의 이름도 목매어 부릅니다.

어머니!

제가 언제면 맏딸 구실을 하겠습니까? 그날이 꼭 오리라 굳게 믿습니다. 저는 여기서 아무러한 불편도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저 고향에 계시는 부모 친척들에 대한 그리움만 없으면 이 세상에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머니!

동생들한테도 제가 맏이로서 구실을 잘 하겠다고 알려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어머니! 너무나도 많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통일되는 그날 제가 제일 선참으로 어머님 품을 찾아가겠습니다. 부디 부디 건강하시길 멀리서 축원합니다.

2006년 9월 22일 서울에서 맏딸 숙이 올림




정리=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