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EC한국산업교육센터 정광열 대표

“혁신은 사람으로 치면 체질을 바꾸는 작업입니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는 경향이 많은데 그건 잘못입니다.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사람이 마음만 급해 며칠 무리했다가 알이 배기는 것처럼 ‘혁신 피로’가 생길 수 있죠.”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혁신적 생산방식을 일컫는 TPS(Toyota Productivity System)의 창시자 고(故) 오노 다이이찌 전 부사장이 말기암으로 투병 중이던 1990년 초 어느 날. 30대 중반의 패기 넘치는 한국인 젊은이가 그의 자택을 방문했다. 이 젊은이는 그 전에 세 차례나 문전에서 발걸음을 돌린 바 있다. 암과 싸우느라 심신이 지쳐 있던 오노 전 부사장이 만남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사연을 몰랐던 젊은이는 TPS를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을 담은 ‘러브레터’ 20여 통을 줄기차게 보낸 끝에 마침내 소망을 이룰 수 있었다. 오노 전 부사장의 부인이 그 정성에 감복해 남편을 설득했던 것이다. 극적인 만남이 있고 나서 얼마 뒤인 그해 5월 오노 전 부사장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도요타의 오늘에 결정적 공헌을 했던 그의 장례는 회사장(葬)으로 치러졌다.

오노 전 부사장은 떠났지만 그가 정립한 TPS는 도요타뿐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기업 현장에서 혁신 모델로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에는 그의 제자들이 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생애 마지막 수제자인 그 한국인 젊은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6년 동안 한국 기업들에게 TPS의 정수(精髓)를 가르쳐온 KPEC한국산업교육센터 정광열(49) 대표이사다.

정 대표는 90년 당시 막 출범한 한국능률협회컨설팅의 생산혁신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국내 기업들의 혁신에 골몰해 있던 그는 TPS를 이상적 모델로 삼고 창시자에게 직접 배우기 위해 오노 전 부사장을 무작정 찾았던 것이다.

“오노 선생은 ‘일’과 ‘혁신’, ‘개선혼’(改善魂) 등 세 가지 단어의 뜻을 묻고는 현장에서 직접 깨닫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3개월 동안 도요타 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하나둘씩 깨우쳐 나갔죠. 그는 ‘작업이 진짜다’, ‘몸으로 배워라’는 말로써 현장과 혁신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도요타의 생산현장에서 정 대표는 TPS를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었다. 그 소중한 체험의 교훈은 연수를 마친 후 남긴 ‘지구를 지켜라, 생산을 지켜라’는 기념 글귀에 압축됐다. 그것은 또한 TPS 연수를 제대로 마쳤다는 ‘수료증’이나 마찬가지였다.

먼저 ‘지구를 지켜라’는 것은 필요한 물건을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만 생산해 자원 낭비를 하지 않음으로써 환경을 지킨다는 뜻. 이는 철저한 낭비 제거를 통한 이익 극대화라는 TPS의 정신이 함축된 것이다. 아울러 ‘생산을 지켜라’는 것은 일본 기업에게 한 수 배웠지만 이를 통해 한국 기업들의 생산기반을 지켜내겠다는 다짐이었다.

이후 정 대표는 자신의 결의를 행동으로 옮기는 데 나섰다. 국내 기업들에게 TPS를 보급하는 혁신 전도사로 변신한 것. 그의 주선으로 처음 기술자들을 도요타 공장에 연수 보냈던 LG전자가 효과를 봤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삼성전자 등 대기업은 물론 많은 중견, 중소 기업들도 TPS 공부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의 수요가 점차 많아지자 정 대표는 96년 전문적인 TPS 컨설팅 및 연수 사업을 위해 KPEC한국산업교육센터를 설립했고 마침내 지난해에는 부설연수원인 혁신사관학교도 문을 열었다.

“도요타는 인간존중 철학을 바탕으로 다(多)기능을 가진 전인적 인재를 키우는 데 많은 투자를 합니다. 대부분 기업들이 ‘물건의 부가가치’를 말하지만 도요타는 ‘사람의 부가가치’를 굉장히 중시해요. 사람이 결국 물건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때문이죠. 그런 도요타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메이드 인 코리아’의 레벨 업을 이뤄낼 ‘메이드 인 코리아 인재’를 키워낼 기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죠.”

정 대표는 산업 인재의 요람이 될 혁신사관학교를 세우며 육군사관학교에서 적잖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는 정예 군인을 육성하는 곳이 육사인 것처럼 산업을 지키는 혁신 인재를 길러내는 곳은 혁신사관학교가 걸맞다는 것. 연수원 이름에 사관학교를 사용하고 육사 출신의 예비역 소장인 김선규 초대 원장을 초빙한 것도 그래서다. 국내 산업 보호에 대한 열정과 의지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셈이다.

정 대표에게 기업혁신은 ‘고객 중심, 이익 중심, 실행 중심’의 세 마디로 요약된다. ‘개선의 신(神)’ 오노 다이이찌의 혁신 철학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그만큼 TPS에는 혁신의 본질이 담겨 있다는 믿음이 강하다. 그중에서도 앎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은 혁신의 요체나 마찬가지다.

“TPS는 말만 그럴 듯한 여느 혁신 이론과 달리 행동 철학입니다. 도요타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까’라고 묻지 않고 ‘성과가 있습니까’라고 물어요. 다시 말해 TPS는 실적으로 혁신의 성과를 보여준다는 것이죠.”

도요타는 56년 동안 TPS의 뼈대를 바꾸지 않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바꿀 필요가 없는 이익창출 시스템(profit system)을 갖췄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TPS가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으로 보는 것은 오판이다. 이에 대해 정 대표는 이렇게 설명한다.

“도요타는 ‘우리는 자동차를 만드는 게 아니라 고객 만족을 만든다’고 이야기합니다. 고객의 니즈는 어떻습니까? 계속 변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고객을 만족시키려면 회사도 끊임없이 변해야 합니다. 즉 도요타의 TPS는 완성된 게 아니라 ‘완성을 향해 나가는 철학’이라는 것이죠.”

그 때문인지 정 대표는 TPS라는 한 우물을 16년 동안 팠지만 알면 알수록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당초 자동차 공장에 적용되던 TPS가 다른 제조업종에 성공적으로 활용된 데 이어 요즘에는 비(非)제조업종에서도 효과를 입증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TPS의 효용성은 ‘화수분’ 같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혁신해야 한다는 구호는 난무하지만 정작 제대로 된 혁신을 달성하는 사례가 드문 데 대해서도 뼈 있는 지적을 했다. 의욕만 앞선 혁신은 쉬 주저앉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TPS를 통한 혁신은 사람으로 치면 체질을 바꾸는 작업입니다. 한국에서는 기업이나 정부나 혁신을 한다면서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는 경향이 많은데 그건 잘못입니다. 어느날 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사람이 마음만 급한 나머지 며칠 무리했다가 알이 배기는 것처럼 ‘혁신 피로’가 생길 수밖에 없거든요.”

정 대표는 “기업 활동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기업 혁신도 마라톤을 닮아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한꺼번에 뒤집고 갈아치우려고 하는 것은 과욕이다. 명확한 목표를 설정한 뒤에 한 걸음씩 달려가면서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게 혁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정 대표 자신의 행보는 요즘 100m 질주처럼 숨가쁘다. TPS 혁신 프로그램을 가급적이면 서둘러 널리 보급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쟁 환경에서 한국이 살아 남으려면 하루 빨리 혁신으로 무장하는 길밖에 없다는 게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경력>

- 중앙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명지대학교 산업공학과 박사과정 수료

- LG전자 제품설계, 생산기술, 자동화팀장

- 한국능률협회컨설팅 생산혁신본부장

- KPEC한국산업교육센터 대표이사

<저서>

이젠 행동으로 합시다(96년), PROFIT 현장경영(99년), DOING 도요타 혁신성공(2003년), 도요타 식 “모랄 업” (2005년)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