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초상화(御眞)는 한국 초상화의 시원(始原)이라고 할 만큼 역사가 깊다. 문헌상 중국의 당서(唐書)에는 고구려 시대 때부터 왕의 초상화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삼국시대 왕의 초상화는 없고 본격적으로 왕의 초상화를 제작, 보존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부터다. 당시 초상화는 숭불(崇佛)사상의 영향 아래 왕 및 후비(后妃)의 초상화를 비롯해 공신, 일반사대부 화상까지 사찰에 봉안하였다.

고려 시대는 진전제도(眞殿制度)를 두어 군왕의 화상은 도성내(개성) 경영전(景靈殿)에, 왕 및 왕비의 진영은 도성 근처 절(願刹)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그러나 잦은 전란과 사고로 대부분의 초상화는 소실됐고 근래의 것은 원본을 보고 다시 그린 이모본(移模本)이거나 상상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 왕조 때도 왕의 화상 제작은 태조에서 순종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都監)을 중심으로 어진이 제작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으로 대부분의 어진이 소실됐고. 태조 어진도 인조 9년(1631년) 화재로 불타버리는 등 현존하는 어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한국전쟁은 그나마 남아있던 어진을 사라지게 했다.

그 결과 현존하는 어진은 1800년대 말~1900년대 초에 이모본으로 그려진 태조 어진, 영조 어진, 익종 어진과 영조가 즉위하기 전 제작한 연잉군 초상(1745년),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철종 어진(1861년)이 화면의 3분의 1 가량이 소실된 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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