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브랜드 도입 경쟁, 국내시장 점유율 50% 상회… 한국 패션업계 힘겨운 싸움

국내 양대 유통그룹 신세계의 계열사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올 초 미국의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갭’과 ‘바나나 리퍼블릭’을 한국 시장에 단독 출시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이 회사는 두 브랜드를 거느린 미국의 갭과 국내 독점 판매 계약을 맺었다.

1969년 설립된 갭은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주요 시장에서 3,00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한 해 매출 규모가 160억 달러(2005년 기준)에 이르는 세계 최대 캐주얼의류 업체다. 효율적인 생산-유통-판매 시스템을 갖춰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미 조르지오 아르마니, 돌체&가바나 등 명품 브랜드를 갖춘 신세계는 갭을 들여옴으로써 캐주얼 라인업에서도 최고 브랜드를 내세울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신세계는 갭과 바나나 리퍼블릭 매장을 향후 3년 안에 40개까지 늘릴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질세라 신세계의 라이벌 롯데백화점은 스페인의 유명 패션 브랜드 ‘자라’를 연말쯤 국내 시장에 선보이며 맞불을 놓는다는 계획이다. 혁신적인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를 갖춘 자라는 보름마다 신상품을 내놓을 만큼 유행을 빠르게 선도해 이른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 브랜드로 불린다.

롯데백화점은 자라의 본사인 인디텍스와 합작 형태로 국내 시장을 공략한다. 첫 번째 매장은 서울지역 패션 1번지인 명동 상권의 롯데타운이나 강남 일대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인디텍스 측은 대대적인 자라 선풍을 일으키기 위해 매장 입지 조건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것으로 전해졌다.

재벌그룹 계열의 대형 패션업체들도 자체 브랜드 강화 전략과는 별개로 해외 유명 브랜드 도입에 부쩍 열을 올려 눈길을 모으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견 패션업체의 아성이었던 여성복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용병’ 브랜드를 수혈하는 전략을 세운 것.

제일모직은 올 초부터 미국 뉴욕의 패션 리더들이 즐겨 입는 여성복 브랜드 ‘띠어리’를 새로 수입, 시판하고 있다. 올해로 탄생 10주년을 맞은 띠어리는 미국뿐 아니라 유럽, 일본의 패션 선도계층 사이에서도 성가를 높이고 있는 글로벌 브랜드.

LG패션도 얼마 전 이탈리아 패션업체인 블루핀과 계약을 맺고 안나 몰리나리, 블루마린, 블루걸 등 이 회사의 유명 여성 브랜드를 독점 수입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신규 브랜드 론칭보다 정착 쉬운 장점

국내 패션 시장에 해외 브랜드의 파고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일부 역량 있는 업체들을 중심으로 국내 브랜드의 해외 진출이 점차 탄력을 받고 있지만 내수 시장은 오히려 글로벌 강자들의 브랜드 파워에 더욱 휘둘리는 양상이다.

패션전문지 어패럴뉴스가 발행한 한국패션브랜드연감에 따르면 국내 패션시장에 이름을 올린 해외 브랜드의 숫자는 2006년 기준 820여 개로 전체의 약 43%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10년 전 97년의 28%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한 수치다.

국내 패션시장의 규모는 대략 연간 20조원 안팎으로 추정되는데 일각에선 금액으로 따지면 해외 브랜드가 이미 시장점유율 50%를 넘어섰다고 분석한다.

해외 브랜드의 공세가 가속화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백화점의 고급화 경향이다. 근래 백화점들이 다른 유통업체와의 차별화를 위해 상품 구색의 수준을 경쟁적으로 높이면서 자연스레 해외 브랜드의 입지가 넓어졌다는 것이다.

해외 브랜드 수입의 절차가 까다롭지 않은 것도 중소 수입업체의 난립을 부추기고 있다. 여러 국내 업체가 하나의 해외 브랜드를 동시에 수입할 수 있도록 한 병행수입 제도가 대표적인 예다. 게다가 인지도가 높은 유명 브랜드의 경우 손쉽게 고객을 끌어들일 수 있어 신규 브랜드 론칭보다 훨씬 안전하고 매력적이라는 점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시장에서 신규 브랜드를 정착시키려면 최소 30억~50억원 이상 드는데 그렇다고 성공을 확신할 수도 없다”며 “그런 까닭에 많은 업체들이 검증된 해외 브랜드를 가져와 팔면 보다 쉽게 장사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비자 눈높이 글로벌 수준으로 높아져

무엇보다 한껏 높아진 국내 소비자들의 취향도 빼놓을 수 없다. 경제활동의 세계화와 인터넷 사용의 확산, 소득증가 등으로 패션 소비층의 눈높이가 글로벌 수준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패션업체 입장에서는 여기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한국패션협회 박영수 과장은 “국내 소비자들이 해외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높아진 데다 패션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소비자 취향이 세분화하면서 이에 맞는 해외 브랜드 도입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패션시장의 잠재력이 해외 브랜드의 구미를 당긴다는 점도 중요한 배경이다. 특히 감각적이고 세련된 한국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게 되면 다른 아시아 지역은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시장을 ‘테스트 마켓’으로 삼고자 하는 글로벌 브랜드가 늘었다는 분석이다.

해외 유명 브랜드들이 과거에는 국내 업체에 라이센스를 주는 형태로 많이 들어왔지만 최근 들어 직접투자나 합작법인 설립 등으로 진출 방식을 바꾸는 사례가 많아지는 것도 한국 시장의 성장성을 그만큼 높게 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지난해에는 미국의 유명 청바지 브랜드 ‘게스’가 한국 법인을 설립, 직접 진출로 전환하기도 했다.

국내 토종 패션업체들은 해외 브랜드의 대대적인 공습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명품을 중심으로 한 고가 시장뿐 아니라 국산 브랜드 영역인 중저가 시장까지 잠식당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커진다.

어패럴뉴스 안정환 편집국장은 “수입 브랜드는 아직 국산보다 좀 비싸긴 해도 가격 차이가 많이 좁혀져 경쟁력이 생겼다”며 “백화점 등 주요 유통채널에서 이미 해외 브랜드에 밀려나고 있는 토종으로선 더욱 힘겨운 싸움을 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해외 브랜드의 공세가 반드시 위기만은 아니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국내 업체들이 해외 업체와의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 스스로 경쟁력과 브랜드 파워를 키워나가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 패션시장은 이미 디자인, 생산 및 유통의 글로벌화로 사실상 단일시장이 돼버렸다. 지구촌 소비자들은 ‘국산’보다 ‘디자인과 품질’을 따진다. 그런 만큼 한국 패션도 진정한 강자로 거듭나기 위해선 고수들과의 ‘진검승부’를 피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