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등 저가공세와 경기 침체로 썰렁, 특화된 디자인과 품질로 승부해야

“다른 말이 필요 없어요. 경기가 너무 안 좋아요. 게다가 나아질 기미도 안 보이니 더 답답합니다. 특단의 대책이 시급해요. 동대문시장이 무너지면 패션코리아의 꿈도 깨질 것입니다.”

국내 최대의 ‘패션 메카’ 동대문시장이 오랜 침체의 늪에서 신음하고 있다.

디자이너, 원부자재 업체, 봉제공장, 대형상가 등을 반경 1km 안에 모두 갖춘 동대문시장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패션산업 집적단지로서 국내외에 명성을 떨쳐 왔다. 바이어가 어떤 옷을 요구하든 하루도 안 돼 손에 쥐어주는 ‘마법’으로 한국 패션산업의 역동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대문시장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빅뱅’ 이후 좀처럼 그때의 활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전반적인 국내 경제의 불황 여파 탓만도 아니다. 오히려 구조적인 문제들이 첩첩이 쌓인 결과라서 상인들의 시름은 더욱 깊다.

동대문관광특구협의회 송병렬 사무국장은 요즘 동대문 사정이 좀 어떠냐는 질문에 한숨부터 내쉰 뒤 그 이유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대형 쇼칭몰 우후죽순, 수요 공급 불일치

우선 동대문시장이 패션 메카로 뜬 뒤 대형 쇼핑몰이 우후죽순 들어선 게 제살 깎아먹기가 됐다는 지적이다. 제한된 상권에 과도한 점포가 들어서면서 수요 공급의 불일치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상권 외부에서 동대문을 압박해 들어오는 변수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동대문식 쇼핑몰이 지방도시에도 잇달아 들어서면서 물건 떼러 상경하는 지방 소매업자가 크게 줄었다. 그 많던 전세버스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홈쇼핑과 인터넷 쇼핑몰 등 온라인 유통업체들도 저가 판매를 무기로 기존 동대문시장 고객을 대거 흡수해 갔다.

이처럼 동대문시장 특유의 장점이 빛을 잃으면서 상인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웬만한 상가는 대부분 빈 점포 비율(공실률)이 10%를 훌쩍 넘는다. 임대가 되지 않아 개점휴업 상태인 상가도 있을 정도다.

실제 지난해 여름 새로 문을 연 L상가는 1,000개가 넘는 점포를 가진 대형 쇼핑몰임에도 불구하고 들어오려는 상인이 없어 고심 끝에 업태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굿모닝시티, 패션TV 등 새로운 쇼핑몰이 조만간 또 문열 예정이다.

내수 고객뿐 아니라 해외 바이어들의 구매 물량도 크게 줄었다. 전체 물량의 90% 이상을 사가던 일본 바이어들은 납품 단가가 훨씬 싼 중국, 베트남 등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엔화 대비 원화가치가 오르면서 일본 바이어들의 실질 구매력이 줄어든 것도 한 원인이다.

전문가들은 동대문시장이 현재의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한시 바삐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대문 상권이 몰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여러 대안들 중에서도 동대문외국인구매안내소 고동철 소장의 제안은 귀 기울일 만하다. 그는 동대문 고유의 장점을 되살리고 여기에 플러스 알파의 노력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동대문시장은 소량 다품종 생산 방식으로 바이어들의 다양한 요구에 신속한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게 최대 강점입니다. 어차피 대량 생산은 중국 등에 내줬기 때문에 동대문은 본래의 장점에다 고객에 더욱 어필할 수 있는 품질과 디자인을 보탠 아이디어 상품으로 승부해야 살아날 수 입습니다.”

시장 상인들의 자발적 노력 못지않게 정부나 서울시의 지원 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 중에서도 동대문시장이 명실상부한 패션 메카로서 거듭날 수 있도록 주변 인프라를 개선, 확충하는 것이 가장 선결과제로 꼽힌다.

서울시는 지난 2월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 부지 위에 2010년까지 패션쇼장, 전시실 등을 갖춘 ‘디자인 월드 플라자’(가칭)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을 세계 5대 패션도시로 성장시킨다는 전략 아래 나온 패션산업 진흥 정책 중 하나다. 그러나 대구를 세계적 섬유도시로 육성하겠다는 정부의 ‘밀라노 프로젝트’가 말의 유희에 그쳤듯 서울시의 구상도 립스비스에 불과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상인들은 서울시의 정책 청사진이 아직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상당한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한 상인은 “동대문을 단순히 의류시장 차원에서 볼 게 아니라 한국 패션산업의 본산으로 키운다는 복안이 마련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밝혔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