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권 만화 '쩐의 전쟁' 원작자주인공 '금나라' 통해 끔찍한 사채의 세계 고발… 현장취재로 사실감 더해

“드라마를 보니 원작과 50% 정도만 비슷한 것 같더군요. 금나라는 여자조차 멀리하는 냉철한 인물인데 멜로에다 삼각관계 설정까지…. (시청률에 연연하는) 드라마라서 그렇겠지만 원작의 의도와 취지에서 벗어난 각색은 좀 아쉬운 대목입니다.”

사채업계라는 초유의 소재를 다루며 장안에 화제를 뿌리고 있는 SBS 드라마 <쩐의 전쟁>은 이미 지면으로 많은 독자들을 매료시킨 같은 제목의 만화가 원작이다. 30년 경력의 중견 만화가 박인권(53) 작가가 금나라(박신양 분)를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금나라는 사채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덩달아 자신도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그 사채를 무기로 다시 세상에 일어서는 인물이다. 드라마에서도 박신양이 폭발적인 연기력으로 그 캐릭터를 잘 표현했지만, 원작 만화의 금나라는 최악의 밑바닥 인생을 딛고 재기한 극중 설정에 맞게 훨씬 철저하고 냉정하다. 돈의 쓴맛을 본 경험은 결코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법이니까.

만화 속 금나라는 채권회수의 달인으로 그려진다. 도저히 돈을 받아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기발하고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회수한다. 그렇다고 공갈과 협박, 폭력을 손쉬운 수단으로 삼는 악덕 사채업자는 아니다. 오히려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소시민들에게 담보도 없이 돈을 빌려주거나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도 하는 휴머니티를 지닌 독특한 인물이다.

과연 현실에서도 금나라 같은 사채업자가 존재할까. 이에 대해 박 작가는 “금나라의 캐릭터는 극적 재미를 부여하기 위해 픽션으로 가공된 것이다. 실제로 이런 사채업자가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웃으며 답했다.

■ "희망을 애기한 것"

박 작가는 <쩐의 전쟁>에서 잘못 쓰면 패가망신하는 끔찍한 사채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그 안에 담고자 한 메시지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금나라라는 정의로운 사채업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왜 희망일까. 언뜻 모순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대리만족을 구하는 독자들에게 절망을 안겨줄 수는 없지 않은가.

박 작가는 외환위기 이후 서민경제가 도탄에 빠진 가운데 이자제한법이 폐지되고 신용카드가 남발되면서 사채에 허덕이는 서민들이 양산되는 모습을 보면서 <쩐의 전쟁>을 구상했다고 한다. 평소 사회성 짙은 소재를 선호해 왔던 그에게 사채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슈였던 것.

“사채에 시달리다 나자빠지는 서민들을 보면서 너무 안타까웠고, 그래서 그런 현실을 꼭 한번 작품에 담아보자고 마음먹게 된 거죠. 처음 집필을 시작한 2002년 무렵 과중채무자는 400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 때문에 작품을 쓰는 내내 마음이 무겁다 못해 비장감이 들기까지 하더군요.”

박 작가는 사채업계의 실상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취재에 많은 공을 들였다. 보통 작품을 집필할 때는 1~2년의 기간을 준비작업에 쓰는데, <쩐의 전쟁>은 실체에 접근하기 까다로운 사채업계를 소재로 한 까닭에 더욱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신분을 밝히고 취재 요청을 하니까 거의 모든 사채업자들이 거절을 하더군요. 뭔가 떳떳치 못한 구석이 있으니 그렇게 나오겠죠. 하는 수 없이 인맥이 넓은 주변 지인들을 활용해 업자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인터넷의 신용불량자 카페를 통해 만난 피해자들로부터 얻은 정보도 큰 도움이 됐죠.”

그는 소문난 악덕 사채업자에게 직접 돈을 빌려 어떤 방법으로 채무자를 괴롭히는지 체험을 해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 업자는 일부러 연체를 유도해 빚을 불리거나 고객의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등 보통 악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공무원은 그 업자에게 100만원을 빌린 뒤 억대의 빚더미로 내몰린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 사정을 알고는 자칫 덫에 걸리겠다 싶어 돈을 빌려 쓰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그는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사채업자들의 섬뜩한 영업 방식에 대해서 몇 가지 사례를 더 들려주었다.

■ 비상식적 빚 독촉으로 가족파괴

대부분 사채업자들은 기본적으로 ‘인적 보증’을 요구하는데 많게는 5명까지 세운다. 담보가 없는 고객이 연체하거나 사라질 경우에 채무상환을 옥죄는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채무자의 가족이 A급 보증인이며, 가족은 다시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부모, 형 또는 누나, 동생 등의 순서로 등급이 매겨진다.

이후 연체가 발생하면 당사자 대신 가족에게 전화로 위협을 가한다. “당신 아들이 돈을 빌려갔는데 안 갚는다. 보거든 ‘밤길 조심해라’고 전해라”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당사자는 물론 가족 모두가 강한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실제 물리적 폭력을 행사해 채무자를 공포에 떨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그럴 때라도 하수인들을 활용해 자신들이 연루됐다는 증거는 남기지 않는 게 보통이다. 이 때문에 채무자들은 아무리 비상식적인 빚 독촉을 받아도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사채는 자루가 없는 피 묻은 칼입니다.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상책이죠.” 박 작가는 사채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많은 서민들은 이를 모른 채 당장의 궁핍을 모면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노리는 그 칼을 잡는다.

그런데 사채를 쓸 수밖에 없는 서민들은 과연 어떤 사연들을 갖고 있을까. 박 작가는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반 년 동안 직접 사채업체를 운영하기도 했단다. 물론 자신은 뒤로 물러나 있고 사채업자 출신의 대리인을 내세웠다. 돈벌이가 목적이 아닌 이상 아주 싼 이자로 돈을 빌려줬다고 한다. 자연히 다양한 부류의 고객들이 많이 찾아왔고 그 덕분에 사채에 얽힌 서민들의 생생하고 아픈 이야기들을 충분히 취재할 수 있었다.

“사실 내 뜻과 달리 엉뚱하게 소문이 나지나 않을까 무척 조심스러웠죠. 박 아무개가 만화 그만두고 돈 장사 나섰다고 소문이 돌아봐요. 그 길로 펜대는 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 사회적 안전망 구축해야

이런 노력 덕택에 <쩐의 전쟁>은 사실적인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사채시장에서 직접 취재한 팩트를 바탕으로 그럴 듯한 픽션이 적절히 조화를 이뤘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을 나타내고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박 작가는 작품의 성공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듯했다. 그가 안타깝게 생각했던 현실이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당국에 쓴 소리도 내뱉었다.

“지금 경제활동 인구 중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과중채무자들이 상당수입니다. 그만큼 사채가 기승을 부릴 여지가 큰 거죠.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사채를 쓰는 사람들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대부분 생계형 자금 수요자들입니다. 국가가 나서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은행에 서민 대출 비중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제도권 금융기관의 문턱을 낮추거나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처럼 빈민들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 기관을 도입하는 등의 제도적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힘없는 서민들이 생계 때문에 벼랑 끝으로 내몰려 사채라는 최악의 동아줄을 붙잡지 않아도 되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돈은 갚으면 된다지만 그로 인해 생긴 상처는 가족을 파괴하고 제2, 제3의 피해자를 낳습니다. 사채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바로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 박인권 작가는

22세에 만화계에 입문해 1978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무명 시절이 꽤 길었는데 이에 대해 박 작가는 “내가 그리고 싶은 작품만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는 대중작가는 결국 대중과 호흡해야 한다는 진리를 15년의 무명 생활을 거치며 깨달았다고 한다.

그가 히트작을 내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중반부터. 이때부터 이름을 서서히 알려온 그는 2000년대 들어 <쩐의 전쟁>(60권), <대물>(200권) 등 대작을 통해 인기작가 반열에 올랐다.

박 작가는 타고난 그림 솜씨에 자신이 있어 작품의 7할을 글에 비중을 둔다고 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책을 읽고 수첩에 메모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스타일이다. 지금 그는 다음 작품 준비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100년에 걸친 현대 한국 제약산업의 성장사를 그릴 것이라고 살짝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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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