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저가 공세·자동차 보급으로 추락했던 사양산업시대적 웰빙 흐름·업계 체질개선 노력으로 '부활의 노래'

자전거 시장이 되살아 나고 있다. 자동차의 보급과 ‘저가 중국산 공세’에 밀려 사양산업으로 추락했던 자전거 산업이 다시 뜨고 있는 것이다.

보통의 한국 중년층에게 추억의 이름인 삼천리자전거의 발자취는 국내 자전거 역사의 성쇠를 잘 대변하기도 한다.

1944년 경성정공의 자전거 사업부로 출발한 삼천리자전거는, 69년에는 대미 수출액 100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러한 결과 79년 기아자동차에서 완전 분리 독립, 대량생산 능력을 갖추기 시작해 87년 연산 100만대를 돌파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삼천리 자전거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경제성장에 따른 인건비 상승으로 국산 자전거는 경쟁력을 급격히 잃어갔고, 대신 값싼 중국과 대만산 자전거가 그 자리를 야금야금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국 삼천리자전거는 2001년 양산공장을 폐쇄했다. 구조조정도 했다. 대신 대만과 중국 업체에서 OEM 납품을 받거나 중국 공장에 지분 투자하는 아웃소싱 체제로 돌아섰다.

이러한 세계 시장의 흐름에 따른 적응 성공으로 삼천리자전거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보다 6% 증가한 651억원을 기록했다. 2000년 이후 매년 5~10%의 성장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중이다.

국내 자전거 업체로는 2위 자리에 점하고 있는 알톤스포츠의 성장률도 두드러지는 추세다. 1994년 설립한 알톤스포츠는 수출 위주로 성장한 기업이다. 96년 일본에 100만 달러 수출을 달성했고, 미국ㆍ중남미로도 수출 시장을 넓혀 가고 있다.

국내 시장에서의 전과도 혁혁하다. 2001년에는 국내에 자전거 18만대를 팔아 코렉스를 제치고, 업계 2위 자리를 당당히 꿰찼다. 2003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략 60%에 이르는 고속 성장을 기록하는 중이다.

83년 부도 이후 겨우 명맥만 유지해온 대영자전거도 최근 재기에 나섰다. 이 업체는 70~80년대에는 삼천리자전거와 더불어 연 300억 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대형 자전거 업체였지만, 자동차의 대중화와 적절한 수출 활로 개척에 실패해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까지 치달았다. 하지만 89년 당시 직원이던 육종령 대표가 회사를 인수하면서 신제품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외환 위기 당시 중국산 자전거에 80% 가까이 시장을 잠식 당하며 벼랑 끝에 몰렸던 국내 자전거 산업이 다시 힘찬 날갯짓을 시작한 것이다.

삼천리자전거의 김환익 홍보팀장은 “과거에는 돈 없는 사람이 자전거를 타는 것으로 낮춰 보는 경향이 있었지만, 선진국일수록 환경과 건강을 중시하기 때문에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많이 타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일본이나 네덜란드 등의 선진국처럼 자전거가 다시 주요 교통수단이 되는 시대가 머지 않아 도래할 것”이라고 향후 자전거 시장의 전망을 낙관했다.

최근 국내 자전거 시장이 다시 일어서고 있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 외에도 업체들의 ‘체질 개선’ 노력이 적합하게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업계는 진단한다.

김 팀장은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생산 단가를 낮춰 돌아오는 이윤으로 다시 제품 개발에 투자하여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는 긍정적인 순환 체제를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알톤스포츠 김병학 이사는 “알톤스포츠의 경우 출범 당시부터 중국 선전에 공장을 두고 유리한 단가 경쟁력을 갖고 출발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들이 위기를 겪었던 외환위기에 연 100%가 넘는 성장을 기록할 수 있었다”고 중국 공장 체제를 경쟁력 확보의 으뜸 비결로 꼽았다.

김 이사는 또한 “어차피 한국에 공장이 있다 해도 자전거 부품을 중국에서 들여와야 하는 국내 현실에선 ‘메이드 인 코리아’에 집착하기보단 경쟁력을 높여 세계에 한국 기업의 명성을 떨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국내 자전거 시장에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없다는 일부 씁쓸한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 팀장은 “이제 업종을 불문하고 기업이 글로벌화 하면서 ‘메이드 인’보다는 ‘메이드 바이’가 중요한 시대가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최근 고급 자전거 시장이 조금씩 형성되고 있는 것도 업계로서는 반길 만한 긍정적인 신호다. 아직까지는 미국이나 유럽 브랜드가 고급 자전거 시장의 80% 이상을 점하고 있지만, 삼천리자전거 등도 최근 수백만 원 대의 고급 브랜드 ‘첼로’의 경쟁력 향상에 박차를 가하면서 조금씩 마니아층을 흡수하고 있다.

바야흐로 자전거 시장은 교통정책, 환경문제, 국민소득 등의 맞물려 상당기간 호황을 누릴 것으로 업계 관계자들은 내다보고 있다.

특별한 비수기가 없고, 해마다 전체적으로 5~10%씩 성장하는 시장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에선 공급 과잉 현상에 따른 부작용을 걱정하는 시각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자전거 수요자가 느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데 반해, 판매점들까지 외국에서 무분별하게 제품을 들여오는 등 공급과잉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어 품질 저하와 경쟁 과열로 자칫 자전계 업계 전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 '괴물차' '나르는 새' 누가 처음 탔을까?

우리나라에서 자전거가 언제 처음으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개화기였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고희성이 1896년에 장안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다닌 것이 처음이라고도 하고, 같은 해 서재필 박사가 독립문 신축 현장에 갈 때 처음으로 탔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은 자전거를 ‘괴물차’ 혹은 ‘나르는 새’라느니 하며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후 약 2년이 지난 1898년에 윤치호가 하와이로부터 도입해왔는데 이것이 두 번째이다. 통 타이어를 사용한 이 자전거는 매우 엉성하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 굴곡이 많은 길을 종횡 무진으로 달리는 이 자전거는 심지어 ‘자행차’ 또는 ‘축지차’라는 별명까지 생겨 큰 화젯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자전거가 차츰차츰 한 대 씩 늘게 되었고 1903년 가을에는 조정의 관리들을 위해 100대의 자전거를 도입했다고 한다. 이후 자전거는 교통 수단으로, 그리고 운반 수단으로 그 사용이 크게 늘어났다.

우리나라의 자전거 제조는 수리용을 주로 한 부품의 생산에서 시작되어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생산이 본격화되었고, 1994년에는 118만 6,400대를 생산하여 세계 주요 자전거 생산국으로 명실상부하게 등극했다.

(자료참조: ‘자! 이제 자전거로 갑시다’ 박성득 외 2인 공저, 글사랑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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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정 기자 hjba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