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경쟁 속 스트레스 팍팍 받는 변호사·스타강사 등 건강 빨간불'월화수목금금금' 주말도 없이 야근 시달리기도… "돈버는 만큼 긴장·피로 감수" 안전의식은 바닥

번듯한 사무실,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는 전문직 화이트칼라는 직무성격상 ‘산업안전’에 전혀 신경 쓸 일이 없는 직종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사정은 다르다.

근로시간의 개념 없이 야근과 주말근무가 다반사인데다 과도한 경쟁과 책무, 구조조정의 일상화에 대한 불안감이 겹친 스트레스가 건강을 소리소문없이 갉아먹는다.

그래서 전문직 화이트칼러 사무실에서는 의외로 심근경색과 같은 중병에 걸리거나 사망에 이르는 ‘산업안전’의 문제가 많이 발생한다. 그런데도 마냥 책상머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고소득에 사회적 명예까지 얻는 전문직 화이트칼라는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직업. 때문에 그들은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더 심하다. 전문직이라는 이름 아래 자신들 스스로가 과다 업무나 스트레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다른 직종에 비해 월등히 강하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제한적인 근로시간에 있다.

대형 로펌에서 근무하고 있는 6년차 변호사 A씨(36세)는 입사 이래 지금까지 매일 밤 12시를 넘겨 퇴근하고 있다. 입사 3~4년차까지만 해도 새벽 3~4시 퇴근이 보통이었고, 주말에 쉬는 일도 거의 없었다.

현재도 주말을 쉬지 못할 때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A씨는 한번도 불평해본 적이 없다. 자기가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이 정도 부담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이 너무 많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출퇴근시간 생각하면서 일하는 변호사가 어디 있냐? 일에만 신경 써도 모자랄 지경이다”고 답한다.

강남의 유명 학원에서 스타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B씨(43). 그의 연간 수입은 수십 억원에 이른다.

그의 하루 평균수면시간은 2시간. 만만치 않은 일정을 소화해내느라 늘 목이 아프고 눈이 충혈돼 있지만 그 역시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다. 자신의 소득을 생각하면 일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주변 강사들이 성대결절로 말을 못하게 되거나 과로사하는 경우를 왕왕 보아왔음에도 B씨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 하루 두시간 자면서 일에만 몰두

전문직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정해진 근로시간을 초과하거나 업무로드가 많다는 이유로 이의를 제기하는 전문직 종사자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라톤 근무 못지않게 스트레스도 심각한 문제다. 광고대행사 중역으로 일하는 디자이너 C씨. 그에게 야근보다 더 힘든 것은 주어진 시간 내 창의적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이다.

C씨는 “1박2일 일정으로 해외출장을 떠나 광고촬영을 완벽히 끝내야 할 때도 많다. 그럴 때는 해외출장을 떠나기 전 너무 긴장된다. 또, 대부분의 프로젝트를 굉장히 빡빡한 일정 내에 마쳐야 하기 때문에 긴장과 피로의 연속”이라며 고충을 털어 놓는다.

광고대행사는 대부분 업무량이 많고 스트레스도 심해 직원 과로사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몇 년 전 모 광고대행사에서 직원들이 연달아 숨진 사건이 있었다.

일주일 중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서 밤샘 작업하던 한 광고 프로덕션 직원은 뇌출혈을 일으켜 사망하기도 했다. 업계관계자들은 이처럼 과로사가 빈번한 것에 대해 “항상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놓아야 하는 등 업무에 대한 강박감이 크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경영컨설턴트도 격무와 프로젝트에 대한 부담감에 시달리는 직종이다.

아더앤더슨 등 글로벌 컨설팅회사에서 일하다 직접 컨설팅회사를 차린 D씨. 그는 올해 초 컨설팅세계의 부조리와 병폐를 폭로한 책 ‘컨설팅 절대 받지 마라’를 펴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책에서 그는 밤 10시를 넘겨 퇴근하는 경우가 다반사에다, ‘월화수목금금금’ 형태로 주말휴식 없이 일하는 컨설팅사의 과도한 업무 행태를 비난했다.

그는 “컨설턴트들은 체력 때문에 40대 이전에 은퇴하는 경우가 많다”며 “회사에서 건강검진을 실시하면 위나 간 등에 이상이 없는 직원이 없을 정도로 컨설턴트들은 과로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있다”고 말했다. 육체적인 과로뿐이 아니다.

빠듯한 기간 안에 고객사가 흡족할 만한 연구성과를 내야 하고, 무리한 요구를 받아도 싫은 내색 없이 수용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다. 한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몇 달 동안 밤낮없는 강행군이 계속된다.

D씨에 따르면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컨설턴트에게 재충전의 시간을 줘야 하지만 대부분 곧바로 다른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심지어 한 프로젝트가 다 끝나기도 전에 다른 프로젝트까지 겹치기로 맡거나, 주말에는 새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 제안서 작성업무까지 해야 한다.

■ '퇴출' 두려움에 불평 한마디 못해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았는데도 회사에서 퇴출될 두려움으로 모든 스트레스를 참고 지내던 대기업 임원 E씨. 어느 날 야근을 하던 중에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의식을 잃어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사망원인은 심근경색이었다.

전문직 세계에서는 ‘모든 것은 내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몫’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광고대행사 중역 C씨는 회사 선배들로부터 “체력도 능력이다.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견뎌내지 못하면 너의 책임이고 전문가의 자격이 없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고, 지금도 이 말에 동의하고 있다.

높은 연봉이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를 보상한다는 인식도 널리 퍼져있다. 전문직 종사자 가운데는 “그만큼 돈을 받기 때문에 이 정도는 감내하는 게 당연하다”고 답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업무량이나 일정을 조절할 수 있는 경우에도 대부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전문직 화이트칼라의 산업안전에 대한 인식은 거의 바닥 수준이다. 그들 스스로 과로와 스트레스가 심각한 질병이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경각심이 없다. 산업안전보건원에서 실시하는 직업안전교육을 실시하는 직장도 거의 전무하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 259조에는 ‘직무스트레스에 의한 건강장해 예방조치’라는 조항이 있다.

‘신체적 피로 및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장해 예방을 위해, 장시간 근로 및 야간 작업 등 직무스트레스가 높은 작업을 할 때에는 근로시간 단축 및 장단기 순환작업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항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직장인이 대부분이다.

● "한국 직장인 과로·스트레스 심각하다"
피상순 인천중앙병원 신경정신과 과장

인천중앙병원 신경정신과 피상순 과장은 업무스트레스 및 과로와 관련해 중병에 걸리거나 사망에 이르는 환자가 외환위기 이후 날로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피 과장은 “직무스트레스학회가 수년 전 직장 스트레스 보유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 직장인의 스트레스 보유율은 95%로, 미국(40%), 일본(61%)보다 크게 앞서고 있어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성과주의로 인한 스트레스가 위장 장애, 간기능 장애, 당뇨, 췌장염, 탈모 등의 신체적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만성적 불면, 극도의 피로감 및 두통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과로는 뇌, 심혈관계 질환을 일으킨다.

피 과장은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며 살아가고 있는 도시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스트레스와 과로는 주의를 요하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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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화 기자 cand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