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박재승 공천 쌍끌이… 호남 텃밭 물갈이로 당 개편민주당 정동영계·옛민주당 세력 약화로 손학규당 전환될듯

“손학규 대표의 응어리진 반격이다. 지난 대선에서 당한데 대한 보복으로 볼 수 있다.”

13일 공천심사에서 탈락한 통합민주당의 친(親)정동영계 호남 의원은 민주당 물갈이행태를 그렇게 규정했다. 손 대표가 지난 대선 경선에서 패한 것이 정동영 후보의 조직표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4ㆍ9 총선 공천 물갈이를 통해 손학규 조직을 키우고 나아가 ‘손학규당’을 만들려고 한다는 해석이다.

“합당하지 말았어야 했다. 철저하게 옛민주당 사람을 쳐내고 있지 않나. ‘개혁 공천’이 아니라 ‘공천 학살’이다.”

옛민주당 출신 공천 탈락자는 “무소속 출마”운운하며 박재승 공천심사위의 공천행태를 비판했다.

반면 손학규 대표와 공심위는 “쇄신이 없으면 총선은 희망이 없다. 민주당이 사는 길은 개혁 공천뿐”이라며 그간의 공천을 정당화했다.

민주당의 공천 물갈이를 놓고 한쪽에서는 ‘혁명’이라는 칭송을 붙이는데 반해 피해를 입은 탈락자 진영은 혁명을 가장한 ‘숙청’이라고 불만을 토로한다.

사실 이번 민주당 공천은 전술한 비난과 지지, 칭송과 불만이 혼재하는 복선이 깔려 있다.

단순히 4월 총선을 향한 총선용 공천에 그치지 않고 향후 민주당내 역학관계, 그리고 차기 대선까지 염두에 둔 그룹의 파워게임이 복잡하게 얽힌 ‘소리없는 전쟁’의 현장이다.

그러한 전선의 포문은 박재승 곰심위원장이 열었고, 각 계파 간 국지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번 민주당 공천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 그러면서도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박재승 위원장의 칼날 공천이 손학규 대표측의 지원에 힘입어 광폭적인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민주당 공천을 두고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니 ‘손학규-박재승 합작품’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다.

6일 오후 국회 통합민주당 대표실에서 손학규, 박상천 공동대표가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으로부터 제18대 국회 당 후보자 1차 명단을 전달받고 있다./ 오대근기자

사실 민주당 공천의 파격은 지난 1월 29일 박재승 전 대한변협회장을 공심위원장으로 임명할 때부터 예고됐었다. 박재승 위원장으로 삼고초려해 중책을 맡긴 손학규 대표는 “공천에 관한 한 공심위의 결정이 당의 최종 결정”이라며 ‘박재승 공심위’에 무한 전권을 부여했다. 그에 화답하듯 박재승 위원장은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듯 공천 물갈이를 결행해갔다.

3월 5일, 부정ㆍ비리로 금고 이상 형을 확정받은 자는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방침으로 ‘공천 쿠데타’의 신호탄을 올린 박재승 위원장은 ‘호남 현역의원 30% 물갈이’를 단행에 민주당을 초토화시켰다.

3ㆍ5 쿠데타로 공천 배제 대상에 오른 인물은 박지원 DJ(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장(전남 목포)과 김홍업 의원(전남 무안·신안),신계륜 사무총장(서울 성북을),안희정씨(충남 논산ㆍ계룡ㆍ금산),이용희 국회 부의장(충북 보은ㆍ옥천ㆍ영동),신건 전 국정원장(전주 덕진),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서울 중랑갑),이호웅(인천 남동을)·김민석(서울 영등포을)·이정일(전남 해남ㆍ진도ㆍ완도)·설훈(서울 도봉을) 전 의원 등 11명이었다.

이에 앞서 2월 25일 구민주당측 김충조, 황태연 위원이 “비리 부문에서 당을 위해서 한 것과 개인 비리 문제는 분리해서 심사해야 한다”고 했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공천 배제는 단순히 11명이라는 숫자와 부정ㆍ비리 연루자 배제라는 개혁공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DJ계인 박지원ㆍ김홍업ㆍ신건, 구민주계 신계륜ㆍ김민석ㆍ이정일ㆍ설훈, 친노그룹인 안희정ㆍ이상수, 정동영계인 이용희, 열리우리당 출신 이호웅 등 통합민주당의 주축세력을 제거한 것이다. 이는 민주당내에 손학규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신주류가 터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기도 하다.

민주당 세력구도를 재단하는 박재승 위원장의 공천 칼바람은 계속 이어졌다. 3월 13일에는 호언했던 ‘호남 현역의원 30% 물갈이’를 단행, 전북에서 한병도(익산갑), 이광철(완산을), 채수찬(전주 덕진) 의원 3명, 전남에서 이상열(목포), 신중식(고흥 보성), 채일병(해남 진도), 김홍업(무안 신안) 의원 4명, 광주에서 정동채(서을), 김태홍(북을) 의원 2명 등 모두 9명을 탈락시켰다. .

주목되는 것은 친노(親盧)계인 한병도ㆍ이광철ㆍ정동채 의원과 정동영계 채수찬 의원, 구민주당 이상렬ㆍ신중식ㆍ채일병ㆍ김홍업 의원 등이 공천에서 배제된 점이다. 3ㆍ5 쿠데타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주당 주축세력의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주당 최대 계파인 정동영계 일부에서 ‘음모론’을 제기했다. 이용희 국회부의장을 숙청대상에 포함시키고 정동영 전 당의장 텃밭인 전북지역 의원을 상당수 물갈이 한 것은 ‘숨은 의도’가 있다는 주장이다.

정동영 전 당의장.

즉 손학규 대표가 민주당 최대 주주인 정동영계의 수족을 잘라내고 공심위를 앞세워 자파 세력을 부식하려 한다는 것이다. 공심위를 주도하는 박재승 위원장과 재야파 외부인사들이 손 대표와 가까운 점도 ‘음모론’의 단초로 풀이된다.

공천과정에서 탈락자가 속출하고 있는 구민주계도 “손학규 대표와 박재승 위원장 간에 ‘묵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나타낸다. 한 구민주계 인사는 "결국 우리가 물갈이 표적이 된 것 아니냐"며 "박재승 위원장이 (구)민주당 손발을 잘라가며 쇄신 생색을 내고 있다"고 반발했다.

또다른 구민주계 관계자는 “공심위에서 박상천을 찍어내려고 지금 전남 고흥에서 장성민 전 의원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며 “박재승(위원장)이 손학규(대표)와 손잡고 구민주당 세력 털어내려고 작심하고 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손학규 대표나 박재승 위원장 측은 “터무니 없는 음해”라며 “국민의 지지가 공천이 개혁적으로 되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정치권의 시각은 민주당 공천이 손학규 대표 쪽에 힘이 실리는 방향으로 진행됐다고 분석한다. 눈치빠른 정치인들은 이미 손 대표에게 줄을 대거나 손을 내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실제 지난해 대선 경선 과정에서 한나라당 출신인 손 대표의 정체성을 문제삼았던 한 중진은 최근 “손 대표의 정체성은 해소됐다”고 말해 이미 높아진 손 대표의 위상을 실감케 했다.

그렇다고 손 대표의 앞날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그가 4월 총선에서 살아남느냐 하는 것과 민주당이 어느정도의 의석을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이번 공천 과정에서 나타났듯 민주당이 손학규당으로 탈바꿈하느냐 여부와 손 대표가 당의 맹주가 될 수 있는 지가 4월 총선에 달렸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