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키호테' 원작 '돈 큐'등 기존 작품 현대적 재해석 관객 유혹

<예술의 종말>의 저자 아서 단토는 이제 생활의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고, 동시에 (기존의) 예술은 종말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너무나도 유명한 마르셀 뒤샹의 ‘샘’이나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는 기존의 예술관과는 다른 인식을 요구한다.

우리가 쉽게 ‘예술’이라고 단정지었던 것에 대해 고민을 하게 한다. 저 비누 박스나 변기를 보고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럼에도 이것을 실제 생활용품과 병치해놓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과연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경계는 무엇인가.

이 문제를 다시 정리한 <예술의 종말 이후>에서 단토는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가 왔기 때문에 예술의 영역과 정의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설명한다. 한 마디로 예술의 종말은 예술가들의 해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해방된 예술가들은 더 이상 자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오히려 기존의 영역에서만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치기에는 한계가 왔을 뿐더러, 타 장르에서 영감을 주는 소스를 차용해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얼마든지 재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혼돈을 넘어 끊임없이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춤은 이런 양상에서 가장 진보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태생부터가 매체종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만큼 춤에서의 소재 활용은 모든 예술 장르 중 가장 탄력성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다.

춤과 문학의 만남은 그런 점에서 역사가 길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많은 춤 작품은 문학 작품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춤 작품이 오랫동안 기존의 내용을 답습하고 있고, 이것이 시대적 공감이나 관객의 기호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 춤 안에서 재탄생하는 문학의 매력

이에 따라 기존의 문학 작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문학 작품을 무대화하는 작업이 최근 이어지고 있다. 아예 ‘춤의 대중화’라는 모토가 저변에 깔려 있는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는 올해도 어김없이 이러한 장르간 경계 넘기의 시도로 관객들을 유혹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 키호테’에서 영감을 받은 <돈 큐(DON Q)>는 원작의 플롯을 따르기보다 과거와 환상을 쫓는 초로의 남자와 그의 젊은 친구의 편안하고도 비극적인 관계를 그렸다. 춤에서의 돈 키호테는 오랫동안 발레의 전유물이었지만, 현대극으로 풀어낸 두 남자의 에피소드는 ‘뻔한 이야기’를 뛰어넘는 예리한 현실의 풍자로 관객을 공감시키는 힘을 보여줬다.

서울세계무용축제의 폐막작인 <엘렉트라, 가해자>는 고대 문학에 빚을 지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 ‘엘렉트라’를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트로이 전쟁 이야기에 나오는 아가멤논 가족의 살해사건을 다룬다.

이 작품의 안무가인 소피아 스피라투는 엘렉트라가 이 사건의 직접적인 가해자이자 피해자라는 인식으로 이 작품을 재해석하고 있다. 엘렉트라 신화에 대한 에우리피데스(고대 그리스의 시인)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이 작품은 현대춤에 합창과 독백 등의 형식을 접목해 총체극 형식으로 풀어내 평단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춤과 소설의 만남은 이미 그 기획에서부터 대중성을 담보할 수 있다. 소설을 아는 사람들을 잠재 관객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적 요소의 경우는 다르다. 여전히 순수예술적 인식이 강한 춤 예술과 시의 만남은 오히려 대중에게 먼저 다가가는 태도보다는 그 자신만의 톡특한 세계로 관객을 이끈다.

일본의 부토(舞踏)가 그런 경우이다. 소설을 차용한 춤의 경우는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가 있다는 면에서 공통적인 면이 있지만, 부토의 경우는 그런 서사성을 발견하기 어렵다.

부토에서 인간의 몸은 시의 언어처럼 함축적이며 독립적이다. 부토 무용수들의 느린 몸짓과 폭발하기 직전의 에너지는 시의 언어가 운율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예술이 자본의 논리와 결부되어 문화상품으로서의 가치를 따지는 시대, 숭고하기까지 한 이들의 몸짓에선 시인의 고집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로에스 댄스 시어터의 <엘렉트라, 가해자>(위)
무용극 <돈 큐(Don Q)>의 한 장면(아래)

■ 손을 내밀기 시작한 한국 춤과 문학

한국 ‘문학-춤’에서는 사무엘 베케트가 인기를 끌어왔다. 1960년대 뉴욕에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극으로 본 전위예술가 홍신자는 지난 7월 이를 다시 댄스드라마 <고도를 기다리며>로 풀어냈다.

‘김윤정 댄스 프로젝트’를 이끄는 김윤정 역시 2007년 ‘자유 젊은 무용’을 통해 첫 선을 보인 <베케트의 방>이 호응을 얻어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다시 앵콜 무대를 가졌다. 죽는 순간까지 기다려야 하는 고도와 두 주인공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설정은 수많은 연극 무대에서 이미 검증된 매력을 가진 바, 춤에서도 접근하기 용이한 까닭이 장점으로 풀이된다.

<베케트의 방>과 함께 공연된 김윤정의 또 다른 작품 은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하루키는 그 폭발적인 소구력만큼 다른 매체에서도 계속해서 관심을 두고 있는 텍스트다. 안무가 이기영의 <소년, 카프카>는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작품이다. 하루키에 대한 무한 애정을 보여주는 젊은 세대의 관심은 무대화된 하루키에도 여전했다.

최근 현대무용가 김복희는 자신의 무용단과 함께 두 문학작품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슬픈 바람이 머문 집’을 공연했다. 이 작품은 스페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과 함께 우리 소설인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바탕으로 안무됐다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두 작품은 다섯 딸들이 겪는 운명의 격정을 다뤘다는 공통점으로 한데 묶였다. 김복희는 이 작품 외에도 저항시인 신경림의 시 ‘우리시대의 새’를 동명의 춤 작품으로 재해석하는 등 우리 문학과 춤의 지평을 공히 넓히는 작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문학 텍스트를 차용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문학의 춤으로의 차용-각색이 원작만큼의 혹은 원작 이상의 작품성을 보여주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원작의 매력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춤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융합시키려는 노력이 전제될 때, 이러한 경계 넘기의 시도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