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모티 프'제주 걷기여행'등 속속 출간

길 위에 한 걸음 내딛는다.

세상 밖으로 나간 발걸음은 세상과의 소통의 시작이자 내면과의 대화의 출발이기도 하다. 사방이 꽉 막힌 답답함을 마주했을 때, 타박타박 길을 걷다보면 마음 속엔 한 줄기 바람이 자리할 공간이 생기곤 한다. 걷기가 마음에 선물한 치유의 능력이다. 이제 ‘걷기’는 선택적 행위다.

살을 빼기 위해서든, 건강 유지를 위해서든, 걷기가 주는 마음의 선물을 위해서든, 혹은 저항의 뜻을 알리기 위해서든, 걷기는 걷는 자의 몫이다. 작가 폴 오스터의 소설 <뉴욕 3부작> 중 ‘유리의 도시’의 주인공 퀸에게는 걷기가 위로와 망각을 위한 행위로 묘사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움직임, 한 발을 다른 발 앞으로 내밀어 자신의 표류하는 육체를 따라가도록 하는 행위였다. 그렇게 정처없이 배회하다 보면 모든 장소들이 똑같아져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산보가 가장 잘될 때면 그는 자기가 아무 데도 아닌 곳에 있다는 기분까지 느낄 수 있었다.’ 일상 속 도시에서의 걷기가 이런 모습이라면, 여행 안에서의 보행은 다소 다르게 보여진다. 걷고 있는 길 위의 풍경은 새로운 체험이 되고 길 위의 사람들을 향한 마음은 열려 있다. 걷는 자와 걷는 행위에 머물던 시야는 길 위의 풍경과 사람으로까지 확장된다.

요즘 서점가는 이처럼 ‘걷기’의 확장된 시야를 반영한다. 물론 이전에도 없지 않았지만 그 수는 여행서적의 붐과 함께 크게 늘고 있다.

스페인에서 ‘산티아고’는 ‘산티아고 테 콤포스텔라’(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곳)의 줄임말로 예루살렘, 로마와 함께 기독교 3대 성지의 하나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야고보가 걸었던 길이다.

천 년전 순례자들이 걸었던 길 위를 이젠 하루에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걷고 있다. 성별, 나이, 직업, 심지어 종교까지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산티아고로 가는 가장 유명한 루트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되는 프랑스 길로 약 800km에 이른다.

생장피드포르에서 발급받는 증명서는 ‘알베르게’라 불리는 순례자 숙소에 머물기 위한 신분증이고 이곳에서 찍어주는 도장은 곧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확인서가 된다. 보통 30일에서 50일 정도 걸려 산티아고에 도착한 이들은 90km 떨어진 피니스테레까지 걸어가 신었던 신발을 태우는 것으로 순례를 마감한다.

산책이 아닌 꼬박 한 달을 넘겨 걷기에 몰입해야 하는 길, 그래서 열 켤레 이상의 신발을 갈아 신어야 하고 발에는 고름잡힌 물집이 터질 사이 없지만 이곳을 다녀온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노라고, 진정한 자아를 찾았노라고 말이다.

<연금술사>로 세계적인 작가가 된 파울로 코엘료의 삶이 이 길을 통해 바뀌었듯이, 많은 이들이 길 위에서의 경험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있다. 8년 전부터 도보여행가로 글을 써온 여행작가 김남희 씨는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과 문명 전체가 나아가는 방향에 등 돌릴 힘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고 말했고 대중가수 박기영 씨는 ‘산티아고를 걷고난 후에야 진정한 자아를 만났다’고 책을 통해 이야기한다.

50대의 평범한 중년여성이었던 김효선 씨는 50여일간 머물렀던 산티아고 길을 ‘웅장하고 아름다운 길, 고통의 길, 온전히 몸으로만 걷고 또 걷는 길, 용기가 충전되는 길’이라고 묘사한다.

그리고 도보여행의 끝에서 ‘이제껏 길 위에서, 나와 길은 조화로웠어. 내가 길을 걷는 건지, 길이 나를 따르는 건지 모를 정도였지. 길 위에서 생면부지의 누군가와 마주쳐도 우리는 반가웠어.

제주 올레길의 바닷길 / 출처: '제주걷기여행'
제주 올레길의 강정천 징검다리 / 출처: '제주걷기여행'

길 위에서, 길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로 맺어졌고, 서로에게 낯선 타인도 희한한 이방인도 아니었어’라며 희열을 감추지 못한다.

사우스웨스트 미네소타 주립대학의 명예교수 조지프 A.아마토는 걷기의 역사를 다룬 저서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에서 현대의 도보여행에 대해 ‘뭔가를 발견하기 위해서나 어딘가 특별한 곳에 가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용기와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다’라고 적고 있는데, 산티아고 길을 찾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 않다.

지난 9월 <제주걷기여행>을 출간한 ‘시사IN’의 서명숙 편집위원은 산티아고 길에서 받은 감동을 자신의 고향 제주에 옮겨 놓았다. 7개 코스(101.91Km)의 제주 올레길은 차가 진입할 수 없는 길로, 끊어진 길은 잇고 사라진 길을 되살리면서 만들어냈다.

오름과 해안이 어우러지는 1코스, 화가 이중섭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2코스 등 7개의 코스에 고유의 자연과 문화적 환경이 담겨 있다.

뒤늦게 걷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는 그녀는 ‘걸어서 다녀보지 않고서는 그곳을 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음을. 두 발로 발도장을 찍은 곳만이 온전한 내 것이 된다는 것을’이라고 걷기의 묘미를 집어낸다.

<제주걷기여행>(북하우스)의 기획자 변경혜 씨는 “2~3년 전부터 걷기가 건강 차원을 넘어 개인의 정신적, 육체적 여유의 유형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부제인 ‘놀멍 쉬멍 걸으멍’은 걷기에 대한 현대인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면서 출판계가 포착한 걷기의 흐름을 설명했다. 제주올레길을 찾아 장기로 머무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택시로 불과 몇시간이면 다 구경한다던 제주도의 기존 여행에서와는 전혀 다른 제주도를 느낄 수 있겠다는 건, 걸어본 사람들은 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사회학 교수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기예찬>을 통해 ‘걷기는 미친 듯한 리듬을 타고 돌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질러가는 지름길이요, 거리를 유지하기에 알맞은 방식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 템포 쉬어가는 삶이 점점 줄어들수록, 여유, 사색으로서의 걷기의 즐거움과 그 안에서 나오는 치유력의 영험함은 점점 더 빛을 발하지 않을까.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