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배경 완벽 재현·200여점 진작 영화에 담아

미술은 언어이다. 하지만 너무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까닭에 우리는 그들의 언어의 독해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미술작품이 지닌 뜻을 헤아리고 그 작품을 통해 영화를 이끌어 가는 계기로 삼거나 영화의 반전을 암시하는 장치로 사용해 왔다. 이렇게 영화 속에 미술은 영화의 또 다른 은유나 비유로 활용되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왔다. 영화 속의 미술이야기를 통해 영화의 미술의 통섭의 세계를 만나보았으면 한다.

2. <노팅 힐>(1999)/샤갈(Marc Chagall) '결혼' 등 3. <바닐라 스카이>(2001)/모네(Monet) 그림 4. <종횡사해>(1991) <화가 모딜리아니>(2004)/모딜리아니(Amedo Modigliani) 그림 5. <퐁네프의 연인들> / 렘브란트(Rembrandt) 그림 6. <미스터 빈>(1998)/제임스 에보트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의 ‘화가의 어머니’

아마도 화가로서 픽션과 논픽션을 합해 그와 관련한 책이 가장 많은 작가는 아마도 고흐(Vicent Van Gogh, 1853-1890)가 아닐까. 하지만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로버트 올트먼 감독의 1990년작<빈센트와 테오>부터 폴 콕스 감독의 만화영화 <빈센트>까지 10여 편을 헤아릴 정도이다.

이중에서도 고흐의 아를시절을 다루고 있는 영화 <열정의 랩소디(원제 Lust for Life, 1956년작, 122분)>는 지금은 중년을 훌쩍 넘겨버린 이들에게는 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반 했을 미남 커크 더글러스(Kirk Douglas(1916~ )가 고흐 역을 맡고, 말년에 화가로, 조각가로도 활동했던 앤터니 퀸(Antonio Rudolfo Oaxaca Quinn, 1915~2001)이 고갱으로 분한 영화로 빈센트 미넬리(Vincente Minnelli, 1910~1986)가 감독한 1956년도 영화이다.

영화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선교사가 되고자했지만 결국 전도사 자격을 얻지 못한 고흐는 결국 오지의 탄광지대의 선교사로 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이곳에서 사목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전도사 자격증을 얻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하지만 그곳에서 열정적으로 그들과 함께하고 아픔을 같이하며 전도 사업을 벌이던 중 탄광에서 혹독한 노동조건과 열악한 임금으로 노동자를 착취하는 실정을 보면서 고민한다. 그 와중에 검열 나온 복음 선교위원회위원들의 고압적인 관료적 태도 때문에 선교사의 꿈을 접고 만다.

고향으로 돌아와 화가로서 인생을 살아가기로 맘먹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즈음 과부가 된 사촌 케이(Kay: 쟈넷 스테크 분)가 돌아오고 그녀를 사랑하게 된 고흐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는 완고한 성격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고 이에 고흐는 결국 마음의 상처만 입게 된다.

그러다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와 살림을 차리지만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헤어지고 동생 테오(Theo Van Gogh: 제임스 도날드 분)가 있는 파리로 나간다.

여기서 그는 화랑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인상파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그려 그들의 일원이 된다. 당시 인상파는 사람들과 주류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그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호는 나름의 세계에 몰입하면서 그의 화풍을 이해해 주는 폴 고갱을 만나 친하게 된다. 파리의 생활고를 이겨내고 자연 속에서 좋아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고 싶었던 고흐는 화가공동체를 꾸리는 것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남 프로방스 지방의 아를로 떠난다. 그러나 아를에서 합류하기로 했던 화가들은 오지 않고, 오겠다는 답을 준 화가는 오직 고갱뿐이었다. 그는 고갱을 기다리며 오늘날 고흐의 대표적인 작품이 된 많은 그림을 그렸다. 고갱이 합류하자 의기소침했던 고흐는 다시 열정적으로 그와 함께 황금빛 들판과 태양이 작열하는 자연 속에서 작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시절의 그의 대표작으로 간주되는 작품들을 완성한다. 유명한 <반 고흐의 침실>(1888년, 73X91.5cm, 유화)과 <해바라기>(1888년, 95X73cm, 유화), <밤의 카페 테라스>(1888년, 81X65cm,유화)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 영화에서 야외 스케치를 나갔다 폭풍우를 만나 둘이 허겁지겁 화구를 챙겨 돌아오는 장면이나 고흐의 그 유명한 자신의 귀를 자르는 장면이 나온다.

게다가 고흐와 고갱과의 성격과 미술에 대한 견해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불행했던 천재 고흐의 삶과 예술을 통해 화가들은 하늘나라에서 천형을 받고 이 땅에 귀향을 온 천사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어빙스톤이 1934년에 발표한 소설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Lust for Life)-국내에서는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최승자 옮김, 까치)라는 제목으로 나왔다-를 토대로 만든 빈센트 반 고흐의 전기 영화인 <열정의 랩소디>는 광기와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되는 불운한 천재 화가 고흐의 인생을 연대기 순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예술 영화에 천착했던 빈센트 미넬리 감독은 고흐가 살았던 벨기에의 보르나쥬, 네덜란드의 누넨, 프랑스의 아를에서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작품의 배경을 완벽하게 재현함으로서 영화의 밀도를 더했다.

여기에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고흐의 작품을 소장한 이들로부터 촬영허가를 받아 관객들에게 200여점에 달하는 진작을 영화에 담았다.

6- 커크 더글러스(고흐 역), 앤터니 퀸(고갱 역) 주연의 영화 <열정의 랩소디> 1956 <밤의 카페테라스> 1888 빈센트 반 고흐
7-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 폴 고갱. 아를의 '노란집'에서 함께 지냈던 고갱과 고흐의 관계는 충돌의 연속이었지만, 고갱은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사를 보냈다.
8- <열두 송이의 해바라기> 1888. 빈센트 반고흐 따뜻한 햇볕이 있는 남부 프랑스에서고흐는 고갱과 함께 쓸 작업실을 장식하기 위해 해바라기를 그리기 시작했다. 고흐는 강렬한 색채 대비가 돋보이는 해바라기 그림을 열정적으로 그려냈다.
9- <노란집> 1888.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아를에서 가장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했는데 이 시기 작품의 주조는 노란색이다. 고흐는 이 노란색을 통해 자연스럽고 고요하면서도 꿈틀대는 자연의 생명력을 담아내고 있다.

사실 원작을 영화에 담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의 색채와 질감의 미묘한 차이를 영화를 통해 재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미술관에서 조차 조명에서 나오는 열기와 여러 가지 유해물질로 인해 작품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상황에서 감독은 소장가들의 집과 미술관을 직접 방문하고 설득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영화는 ‘배우들의 조련사’로 불리는 조지 쿠커(George Cukor, 1899~1983)감독의 도움을 받았다. 특히 작품을 고흐와 고갱의 설전이 커크 더글러스와 앤터니 퀸의 열연으로 3분간 커트 없이 이어지는데, 이 영화로 커크 더글러스는 1956 뉴욕비평가협회 최우수 남우상을 수상했고 당시 앤터니 퀸은 고갱의 역할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는 평을 얻으며, 단 12분 출연해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아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짧은 출연으로 아카데미를 수상한 배우가 되기도 했다.

사실 고흐와 고갱의 만남은 그리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갱이 고흐가 있는 아를에 합류한 것은 생활고 때문이기도 했다.

풍류객으로 자신의 예술혼이 내키면 어느 곳이건 무엇이든 아랑곳하지 않고 홀연히 뿌리치고 내 달았던 고갱은 사실 의기투합 할 줄 아는 둘도 없는 친구인 동시에 라이벌이었다. 나이도 좀 차이가 나고 미술에 대한 생각마저 달랐던 그들 두 사람은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접고 오직 인생을 예술에 걸었다는 점에서 친구일 수 밖에 없다.

영화는 1888년 크리스마스이브 전날 밤 자신의 자화상을 보고 가차없이 지적하는 고갱을 향해 고흐는 면도칼을 들고 덤벼드는 장면으로 절정에 이른다. 빈센트는 고갱대신 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내고 만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2개월 만에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2개월은 다른 이들의 20년에 맞먹을 정도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후기 인상주의라는 외형적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다른 점과 다른 생각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으며, 고집스럽게 살아온 마지막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한층 곧추세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고흐에게는 어려서 병으로 죽은 형이 하나 있었다. 그 형의 이름이 바로 ‘고흐' 였고 그가 태어나자 부모는 장남의 의무와 함께 그 부담스런 이름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고흐의 아버지는 무척 엄격했다고 하는데 고흐는 아버지를 어려워하면서도 내심으로 무척 존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갱은 그런 아버지를 너무 닮았고 그래서 고흐는 고갱을 친구이면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안식처로 생각을 했던 것 같고 그래서 더욱 더 강한 집착을 보였다.

흔히 ‘절규하는 야만인’ 또는 ‘슬픈 열대’라고 불리는 고갱은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그는 수백 년 동안 다져진 서양미술의 원칙을 거부했다.

고흐는 아를에 정착할 즈음 몇몇 동네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중 한사람이 라가르 카페의 주인 지누 부인이었다. 지누 부인은 반 고흐가 이곳에 안착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고 고흐는 이를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반 고흐는 지누 부인에게 아를 지방의 전통 민속 옷을 입도록 부탁했고 그녀는 손님이 없는 오전시간을 택해 모델 서는 것을 허락했다. 반 고흐는 책을 몇 권 들고 와서 한권은 부인의 앞에 펴 놓고 나머지는 그 옆에 놓아 매우 지적인 느낌이 나는 여성으로 연출을 했고 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약 45분 만에 완성한 이 초상화가 “아를의 지누부인”이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고갱은 매우 못마땅해 했다. 왜냐하면 술집 여주인을 그리는데 왜 그 옆에 책을 갖다 놓는가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흐는 평소 책에는 영원과 연결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좋아하고 신세를 진 지누 부인을 아무것도 없는 탁자에서 자세를 취하게 하기 보다는 비록 낡은 책이라도 옆에 둔다면 평상시와는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갱은 지누 부인을 스케치 하면서 구도만을 고민했다.

따라서 그의 지누 부인은 고흐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 되었다. 그는 카페의 여주인 지누 부인을 <아를의 밤의 카페>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놓았다. 고갱은 지누 부인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책이 아니라 술병을 놓았다.

그것도 싸구려 독주 압생트의 술병과 술잔이다. 지누 부인 뒤에는 반 고흐가 가까워서 모델로 삼았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고갱은 이 사람들을 좀 무시하고 있는 듯 하다. 지누 부인은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뚜쟁이처럼 보인다.

또 창녀들과 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고흐가 좋아하는 우체부 조셉 룰랭이다. 고흐는 룰랭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인간성을 때문에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 고호가 존경하는 룰랭을 창녀들과 희희낙락 하는 호색한처럼 그린 것은 고흐가 아버지처럼 여겼던 룰랭을 깎아 내린 것이다.

또 술에 취해 옆 탁자에 쓰러져 자고 있는 사람은 반 고흐의 친구인 군인 밀리에 였다. 이렇게 고갱은 카페안의 사람들을 모두 타락한 인물로 묘사하면서 고흐가 아끼는 사람들을 모독함으로써 인간의 은닉된 욕망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여기서 고흐와 고갱의 갈등은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고흐와 고갱은 사이가 더욱 벌어지게 되었고. 급기야 고흐가 고갱에게 술잔을 던지기도 한다. 바로 다음날 고갱은 아를을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고갱을 설득해 보지만 사이가 회복되지는 못했다. 이 당시를 고갱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발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면도칼을 든 고흐가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내가 노려보니 그는 행동을 멈추고 달아났다." 이렇게 하여 달아난 고흐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귀를 자르고 만다.

‘고통의 사제, 끊임없이 자신의 고통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서야 자신이 물리적으로 살아있음을 정신적으로 느끼는 사람.’이었던 고흐는 그렇게 갔다. 하지만 영원히 지지 않는 아를의 해바라기를 통해 삶은 그래도 한번쯤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 정준모는…

중앙대를 졸업, 홍익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동숭아트센터를 거쳐 토탈미술관 큐레이터로 10여년을 근무했다.

이후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 겸 전문위원, 대변인으로 활동했으며, 1996년부터 2006년 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과 학예연구실장 그리고 덕수궁미술관장을 지냈으며 1996년 제 1회 후쿠오카 아시아 트리엔날레의 커미셔너로 일한바 있다.

현재 재단법인 고양문화재단의 전시감독으로 큐레이터로, 미술행정, 문화정책과 관련하여 일하고 있으며, 홍익대ㆍ중앙대ㆍ고려대ㆍ국민대 대학원 등에 출강하고 있고 한국미술품 감정연구소 감정위원으로 활동중이다.



글/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