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이 여자라고? 알면서 틀린답 찾는 모순없어야

“수학문제를 모르고 풀면서 깨우치는 것과 알면서 풀어가는 것은 다르다. 문제의 본질은 답이 틀린 것을 알면서도 잘못된 길로 찾아간다는 모순이다.”

<바람의 화원>, <미인도>를 비롯해 연이어 신윤복 왜곡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과 달리 신윤복을 열혈 대장부로 묘사한 반론적인 <소설 신윤복>을 발표한 백금남(61) 작가의 말이다. “힘들더라도 끙끙대며 문제를 푸는 학생이 있다면 오답이 나올 수도 있고 잘못된 풀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학생은 잘못된 풀이법과 오답을 통해 그 문제의 풀이법을 익히고 정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10월 30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한 이정명 <바람의 화원> 작가에 대한 반박인 셈이다. 역사학계가 아닌 문단에서 신윤복 ‘팩션(faction)’에 관한 정면 비판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작가적 상상에도 금도 있어"

2일 서울 서교동 미래인 출판사에서 만난 백금남 작가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현실을 개탄했다.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한 소설은 많았지만 최근에 <바람의 화원>이나 <미인도>가 일으킨 것과 같은 문제는 없었다는 것이다.

백 작가는 “소위 지성인이라 불리는 사람들까지도 무관심보다 왜곡이 낫다는 투로 말하는 것은 매우 무서운 현실”이라며 “세종대왕, 강감찬 장군에게 무관심하다고 그를 여자로 만들 수 있겠나”라고 꼬집는다. 노(老) 작가의 역정은 쉽게 가라 앉지 않았다. 그는“박정희 시대에 인혁당이 죽어가는 것을 희화한다면 그 시대상과 역사를 우스꽝스럽게 하는 것 아니냐”고도 말했다.

‘작가적 상상’에도 금도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백 작가는 “작가적 양심의 문제”라며 “이전의 작가들은 대체역사 소설임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명기할 뿐 아니라 작품을 통해 느낄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백 작가는 실제로 최근에 출간한 <소설 신윤복>의 서문에 “등장인물의 성격은 소설적 개연성을 위해 밝혀둔다”며 “사전에 입장을 일일이 밝히지 못한 점, 후손들의 혜량을 빈다”고 썼다. 그는 <바람의 화원>, <미인도>를 비롯한 최근의 ‘팩션’물이 역사소설이 지켜온 작가적 양심을 깨고 있다는 점을 한탄했다.

■ "신윤복은 비판정신 발휘한 열혈남아"

백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서 신윤복의 성 정체성을 회복시켰다. 백 작가는 작품에서 신윤복을 마을 사또가 강요한 그림 그리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눈을 붓으로 찌른 강골 화가인 최북의 제자, 춘화를 그렸다가 문중에서마저 쫓겨나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열혈남아로 그렸다.

뿐만 아니다. 작품에서 신윤복은 춘화를 그려주고 번 돈으로 투전이나 일삼으며 제멋대로 살다가 어느 고위 관리의 후실인 여인(송이)에게 몸과 마음을 의탁했다 파국을 맞는 남성상으로 그렸다. 신윤복의 걸작 <미인도>의 주인공 역시 극중 송이로 잡고 있다. 백 작가는 신윤복을 “작품을 통해 사대부의 위선을 조롱했던 비판적 화가”로 봤다.

<소설 신윤복> 역시 허구를 담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백 작가는 “최북, 강세황, 김득신과의 관계설정에서 픽션이 있지만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관계에 기반한 것이지 성 정체성을 뒤흔드는 것과 같은 허무맹랑한 설정은 없다”고 설명했다. 백 작가는 “김홍도가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것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라며 “김홍도와 사제관계가 거의 확실한 신윤복과도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본 것”이라고 말했다.

화풍의 유사성 외에 신윤복과 김홍도의 관계 역시 역사적 입증이 거의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반론에 대해서도 백 작가는 “일반적으로 그림을 시작하며 김홍도의 화풍을 모사했던 다른 화원과 달리 신윤복은 후기작으로 갈수록 김홍도 작품과 유사성이 두드러진다는 측면에서 둘이 사제관계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말했다.

1- 이정명 작가
2- 한수련 작가의 소설 '미인도'
3- 이정명 작가의 '바람의 화원'

■ "역사소설 쓰려면 최소한의 고증과 취재 거쳐야"

백 작가는 작가들이 역사소설을 쓰면서도 최소한의 역사적 고찰을 위한 조사와 연구의 노력을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백 작가는 “예술을 위해서는 어떤 짓을 해도 된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며 “역사적 족쇄가 채워져 있는 사실마저 뒤집는 것은 후손에게 패악”이라고 충고했다.

백 작가는 작가들이 작은 노력을 기울여도 정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신윤복은 오세창(1864~1953)의 <근역서화징>에 자(字)를 실었던 명백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백 작가는 새로운 기록적 근거를 대기도 했다. 고려대 중앙도서관이 소장한 <성원록>에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은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申末舟. 1439~?)의 10대손으로 기록돼 있으며, 신윤복의 이름도 올라있다. 신말주는 대사간(조선시대 간쟁 ·논박을 맡았던 사간원(司諫院)의 으뜸벼슬)까지 지낸 인물이다.

신 작가는 “고령 신 씨 족보에 여자는 오를 수 없었다”며 “아들의 경우 자 밑에 이름을 쓰고 여자는 이름을 올리지 않고 사위의 이름을 올린다”고 설명했다.

역사 기록은 더 있었다. 백 작가에 따르면 이맹휴(1713~?)의 <청구화사>에 윤복은 “동가숙 서가숙 하면서 지냈다”라고 써있다. 문일평(1888~1939)은 “혜원 신윤복이 너무 비속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수련 <미인도> 작가는 지난달 12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삿갓 쓴 남자를 이르는 미칭인 ‘입보(笠夫)’라는 자로 남자임을 강조한 것은 오히려 남자가 아님을 숨기기 위한 것 일 수 있다”고 추측한 바 있다. 이를 두고 백 작가는 “자를 보면 신윤복이 대단한 미남이었음을 알 수 있다”며 “여인들이 많이 따라, 그 폐해를 생각해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라는 뜻으로 자를 그렇게 지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백 작가는 <근역서화징>에 신윤복의 벼슬이 ‘첨사’라고 돼있는 것 역시 다시 강조했다. 백 작가는 “조선시대 여자는 결코 첨사 벼슬을 할 수 없었다”며 “가까운 큰 서점에 있는 근역서화징도 뒤져보지 않고 소설을 쓴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백 작가는 <소설 신윤복>을 쓰기 위한 취재와 고증, 집필 과정에 2년여를 투자했다.



김청환기자 ch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