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윤리헌장 제정 논의철학적, 윤리적 문제 얽히고 설켜 전문가들도 입장 상반돼지능형 로봇 개발 기술 탄력, 인간과 로봇 관계 설정 화두로

때는 서기 2035년. 인류는 지능을 가진 로봇 ‘NS-4’를 가사 도우미로 부리며 편리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로봇들은 요리, 청소, 아이 돌보기 등 웬만한 집안일을 모두 척척 해내며 인류의 착한 동반자로 자리잡았다.

그러던 어느날 불길한 징후를 드러내는 사건이 벌어진다. 기존 로봇보다 더욱 진일보한 로봇 ‘NS-5’의 개발 책임자인 래닝 박사가 자신의 연구실에서 투신 자살한 것.

사건 현장을 살펴보던 시카고 경찰청 소속 델 스프너 형사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하고 자살이 아닌 타살 사건으로 심증을 굳혀간다. 더구나 그가 지목한 범인은 다름아닌 로봇이었다.

2004년 국내 영화팬들을 찾았던 할리우드 SF 대작영화 <아이, 로봇(I, Robot)>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과학소설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의 1950년 원작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인간과 로봇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지능 로봇들의 ‘반란’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냈다.

현대 로봇 공학자들에게 무한한 상상의 원천을 제공하기도 한 아시모프는 단순한 SF소설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과 로봇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해 이른바 ‘로봇 3원칙’으로 불리는 윤리규범을 제정하기도 했다.

로봇 3원칙은 ▲로봇은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며, 인간이 다치도록 방관해서도 안 된다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1,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등 3가지 조항으로 이뤄져 있다. <아이, 로봇>은 바로 이 로봇 3원칙이 깨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재앙을 다룬 작품이다.

■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 재조명

아시모프가 로봇 3원칙을 주창한 것은 거의 60년 전의 오랜 과거다. 그의 제안은 존재와 관계에 대한 철학적, 윤리적 고찰에서 나온 매우 단순하면서도 정교한 규범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별로 쓸모가 없는 허구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 시절 과학기술 수준으로 보면 로봇 이야기 자체가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상상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갑자의 세월이 흐른 지금, 로봇은 상상 속에서 걸어 나와 현실 속으로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다. 눈부신 과학발전에 힘입어 인간의 형상에 점차 가까워지는 로봇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지각 능력을 갖추고 두 발로 사뿐사뿐 걷는 일본 혼다 사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시모’(Asimo)나 우리나라 카이스트에서 개발한 ‘휴보’(Hubo)는 몸체 구조나 움직임이 인간과 흡사할 뿐 아니라 계속 진화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스스로 말을 하며 얼굴까지 사람을 빼다 박은 로봇들도 속속 탄생하고 있다.

최근 캐나다의 한 30대 과학자는 적적함을 달래줄 미모의 ‘여자친구 로봇’을 직접 만들어 화제를 뿌렸다. 자신의 이상형을 조합한 외모를 가진 ‘아이코’(Aiko)란 이름의 이 로봇은 더욱이 영어, 일어 등 2개 언어 1만3,000여 개의 단어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데다 신문까지 읽을 수 있는 고도의 지능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정도 로봇이라면 비록 감정이 없다는 점 외에는 웬만한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실제 아이코를 탄생시킨 리 트룽은 “아이코의 외모와 느낌, 행동 등을 가능한 한 사람과 닮게 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아이코는 매우 현명하며 불평이 없다. 나를 도와 음식을 하거나 청소를 할 수도 있다. 그녀는 완벽한 여성”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 인간은 천부인권, 그렇다면 로봇은?

이쯤 되면 근원적인 질문들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로봇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단지 인간 외양을 흉내낸 값비싼 인형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동반자인가.

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천부인권을 가졌듯이 인간의 피조물인 로봇도 일정한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 로봇을 제조하고 사용하는 사람은 어떤 의무를 지켜야 하는가. 바로 이런 난감한 질문들이 현실적 문제로 다가오면서 로봇에 대한 윤리규범을 정립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로봇산업을 차세대 성장동력산업으로 육성 중인 우리나라는 로봇 윤리규범 제정에 관한 한 앞서가고 있는 국가 중 하나다. 지난해 8월 산업자원부(현 지식경제부)는 로봇과 사용자, 제조자 등이 지켜야 할 기본적 윤리규정을 7장에 걸쳐 담은 이른바 ‘로봇윤리헌장’ 초안을 발표했다.

초안의 골자는 인간과 로봇이 선한 협력을 통해 공존공영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원칙에 따라 인간과 로봇 상호간의 생명의 존엄성 인정 등 세부조항이 마련됐다.

지난해 발표된 로봇윤리헌장 초안은 정부 차원에서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규정한 세계 최초의 사례라는 평가도 받는다. 물론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계를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초안 내용이 로봇보다는 인간의 관점과 이해관계에 치우친 데다 산업적ㆍ공학적 입장을 상대적으로 많이 반영했다는 지적이다.

이런 지적에 따라 정부는 로봇윤리헌장 제정 속도를 조금 늦추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매우 복잡하고 예민한 성찰적 문제들을 다수 내포하고 있는 사안인 만큼 전문가 집단의 폭넓은 검토와 논의를 거쳐 그야말로 헌장다운 헌장을 내놓겠다는 계획이다.

■ 국내 첫 로봇윤리 워크숍 열려

지난 12월 중순 지식경제부는 국내 최초의 ‘지능형 로봇 윤리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날 워크숍에는 로봇 공학자들은 물론 철학, 윤리, 종교 전문가들까지 대거 참석해 열띤 논의를 벌였다. 특히 지능형 로봇을 자율성을 가진 새로운 종(種)으로 볼 수 있는지, 또한 로봇이 인간처럼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는지 등의 어려운 주제가 많은 관심을 끌었다.

‘로봇윤리 로드맵’ 제정을 추진 중인 유럽로봇연구네트워크(EURON) 소속 전문가들은 로봇을 4가지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첫째는 단순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윤리적 특성의 담지자(擔持者), 셋째는 도덕적 대리인, 넷째는 진화된 새로운 종이라는 시각이다.

윤리적 특성을 담지한 존재라는 것은 로봇이 인간의 선천적 능력을 개선하고 강화하는 ‘상징적 장치’로서 좋은 의도가 개입돼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도덕적 대리인은 로봇이 자유의지나 정신,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선 혹은 악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진화된 새로운 종으로 보는 관점은 로봇이 인간처럼 자율성과 의식을 지녔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지적 능력 등은 훨씬 뛰어난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로봇이 ‘포스트 휴먼’(Post-Human) 시대에 ‘로보 사피엔스’(Robo-Sapiensㆍ지혜로운 로봇)라는 새로운 종으로 발전해 새로운 형태의 권리와 가치관, 행동양식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과 공생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이와 관련, 2998년을 무대로 로봇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 <애틋함의 로마>를 집필한 바 있는 소설가 복거일 씨는 ‘지능형 로봇 윤리 워크숍’에서 초대강연을 통해 미래 인류와 로봇의 ‘공진화’(Co-evolution)를 전망해 관심을 모았다.

■ 인간과 로봇의 '공진화' 시대 올까

그는 로봇이 앞으로 인류에게 호의적이고 도움이 되는 존재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점친다. 복 씨의 논거는 사람들이 로봇을 만들고 발전시키기 때문에 인류에게 좋은 특질은 선택되고 해로운 특질은 제거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과정은 사람들이 가축을 길들이고 개량해온 과정과 본질적으로 같다. 사람이 맨 먼저 길들여서 가장 오래 공존해온 개의 진화는 로봇의 진화가 나아갈 모습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복 씨는 또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 로봇 진화를 인도하는 원리로 작용하면 인류에게 충실한 로봇이 탄생할 것이며, 이는 곧 인류와 로봇이 함께 살면서 공진화할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내다봤다.

반면 현재의 로봇관(觀)이 상당히 오도된 까닭에 로봇윤리 논의의 초점 자체에 대해 신중한 접근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입장은 로봇의 정체성을 단지 인간의 도구이자 인공물로 보는 데서 비롯된다. 즉 로봇은 생명체가 아닌데 어떻게 윤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고인석 인하대 교수(과학기술철학)는 “로봇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그 도구적 적합성에 부합하는 것이며, 로봇윤리는 로봇 기획자, 제작자, 관리자, 사용자를 타깃으로 범주화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한다.

로봇을 인간과 닮은 존재로 보는 데서 출발한 로봇윤리 논쟁은 아직 때이른 감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 로봇 공학의 자존심인 ‘휴보’를 만든 카이스트 오준호 교수가 그런 경우다. 그는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지능과 감정을 지닌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드는 것은 매우 먼 미래에도 가능할지 불투명한 일이며, 따라서 로봇 인격화에 따른 여러 가지 우려는 한마디로 기우라는 입장이다.

■ 사용 안전성 확보가 현실적 과제

그 연장선상에서 일부 전문가들은 로봇윤리 논의를 사용상의 안전성 확보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향후 로봇 시장은 대부분 서비스 로봇 분야에서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로봇윤리가 곧 ‘로봇 사용 안전지침’인 셈이다.

실제 로봇강국 일본의 경우, 2007년 발표한 ‘차세대 로봇의 안전보장 지침서’에 로봇에 의한 안전사고를 대비하기 위한 각종 규정을 주로 담고 있다. 가령 로봇은 중앙 서버에 로그인을 한 후 교신해야 하고, 로봇에 의해 발생한 사고는 모두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며, 모든 로봇 제조업체는 여기에 접속할 수 있도록 한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로봇 이야기를 그린 할리우드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는 가사 로봇 앤드류가 제조공정의 ‘아주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지능과 호기심을 갖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과학기술의 획기적 진보는 우연과 필연의 만남으로 이뤄져 왔다. 현 단계에서 지능과 감정을 가진 휴머노이드 로봇은 먼 미래에 속해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을 닮은 로봇을 창조하려는 인류의 꿈이 지속되는 한, ‘필연적인 우연’을 통해 그 시기가 어느날 갑자기 닥쳐올 지도 모를 일이다.

◇ 로봇윤리헌장 초안 요약



1장(목표)= 로봇윤리헌장의 목표는 인간과 로봇의 공존공영을 위해 인간중심의 윤리규범을 확인하는 데 있다.

2장(인간, 로봇의 공동원칙)= 인간과 로봇은 상호간 생명의 존엄성과 정보, 공학적 윤리를 지켜야 한다.

3장(인간 윤리)= 인간은 로봇을 제조하고 사용할 때 항상 선한 방법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4장(로봇 윤리)=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순종하는 친구ㆍ도우미ㆍ동반자로서 인간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5장(제조자 윤리)= 로봇 제조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로봇을 제조하고 로봇 재활용, 정보보호 의무를 진다.

6장(사용자 윤리)= 로봇 사용자는 로봇을 인간의 친구로 존중해야 하며 불법개조나 로봇남용을 금한다.

7장(실행의 약속)= 정부와 지자체는 헌장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유효한 조치를 시행해야 한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