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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CEO] "메세나는 문화 선진국 가는 길 초석 놓는 일"
21세기 웰빙시대의 리더 ② 한국메세나협의회 박영주 회장
모든 장르 즐기는 예술 마니아… 기업 경영에도 일찌감치 문화 요소 접목
"문화예술 후원은 모두가 상생하는 일…기업은 동참, 정부는 뒷받침해야"





김윤현 기자 unyon@hk.co.kr  
사진=임재범 기자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이레빌딩 19층. 한강과 주변 경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에서 5일 박영주(68) 한국메세나협의회 회장을 만났다. 이곳은 그가 일군 종합목재기업 이건산업의 서울사무소가 있는 곳이다.

'기업과 예술의 만남'을 앞장서 주선하는 메세나 전도사답게 그의 사무소는 예술의 향기가 그윽하게 풍겼다. 박 회장은 입구에서부터 집무실, 회의실에 이르는 동선을 따라 벽면에 설치된 그림과 조각상을 손수 소개했는데 그 제스처와 말솜씨가 마치 큐레이터 같았다.

그는 특히 자신의 집무실에 걸려 있는 한 미술작품을 꼼꼼히 설명했다. 그 작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끈끈한 인연의 고리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박 회장은 청록파 시인 고(故) 박두진(1916~1998) 선생과 교분이 두터웠다.

두 사람은 미국인 선교사 박대인(본명 에드워드 W. 포이트라스)과도 자주 어울려 한때 이들은 '3박'으로 불렸다고 한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 또한 있는 게 인연이다. 박대인 선교사가 미국으로 떠날 때가 되어 세 사람은 부부 동반으로 우리나라 최남단의 외로운 섬 마라도를 찾았다.

석별의 정을 달래고 만남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박두진 선생은 마라도에서 용솟음친 감흥을 즉흥적으로 시로 옮겼다. 생전 추지 않던 춤도 덩실덩실 췄다.

그 얼마 뒤 박대인 선교사는 한국을 떠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박두진 선생도 훌쩍 세상을 등졌다. 박두진 선생의 유작과도 같은 시 '마라도'는 화가인 아들 박영하 씨의 손에 의해 동판에 새겨졌다.

그 작품이 바로 박 회장 집무실에 걸려 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떠나도 예술은 영원히 남는다더니, 박 회장은 잠시 옛 시절을 회억하는 듯 엷은 미소를 흘렸다.

타고난 집안 내력이 예인 기질

박 회장은 그야말로 문화예술을 생활화한 인물이다. 음악회나 미술전시, 영화, 연극, 무용 등 거의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즐겨 찾는다. 좋은 작품이 있는 곳엔 어디든 간다는 주의다.

또한 여행이나 출장을 다닐 땐 카메라를 꼭 지참해 풍광을 담아온다. 촬영한 이미지를 포토샵(컴퓨터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직접 매만지기도 한다고.

"아버님이 예술 애호가셨어요. 덕분에 어릴 때 피아노, 가야금 등을 강제로 배우다시피 했지요. 또 그림을 그리는 사촌에게 데생을 배우기도 하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합창반에서 노래도 불렀지요.

그때 은사께서는 제게 성악을 하라고 1년 동안이나 채근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가끔은 선생님 말씀을 들을걸 하는 생각도 든답니다. 허허. 아무래도 집안에 예술적 기질이 넘쳐 흘렀던 덕에 자연스럽게 문화예술과 친해진 게 아닐까 싶어요."

그는 성장기에 가족으로부터 받은 '문화세례'를 몸과 마음으로 흠뻑 받아들였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박물관, 미술관 등 문화공간을 스스로 찾아 다니며 문화적 체험과 지식을 쌓았다. 확실히 문화예술은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에 배워야만 자발적으로 즐기고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박 회장은 20대 후반 무렵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때 박물관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하나 떠올렸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박물관을 찾아 선생님의 지도 하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요.

그 순간 '아, 저렇게 어릴 때부터 예술적 체험을 하고 자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클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입시경쟁의 한 과목으로만 예술을 대하는 우리 현실을 보면 참 안타까운 거죠. 예술적 체험은 삶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발견하며 살아가는 생활 방식인데 말입니다."

그는 예술이 한 인간, 나아가 한 사회를 바꾸는 엄청난 힘을 발현한 사례로 주저 없이 베네수엘라의 저소득층 청소년 음악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El Sistema)를 꼽았다.

1975년 경제학자이자 아마추어 오르간 연주자였던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창시한 엘 시스테마는 단순한 예술교육을 넘어 마약과 범죄에 찌든 빈곤층 아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열어준 혁명적 사회운동으로 평가된다.

"지난해 12월 엘 시스테마가 길러낸 천재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과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가 한국에 왔었죠. 이번 내한공연을 안타깝게 현장에서 보지 못하고 DVD로 봤는데도 너무 감격적이더군요.

한국 메세나의 갈 길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는 계기도 됐고요. 그런 점에서 최근 일부 대기업들이 소외계층 어린이를 대상으로 문화나눔 사업을 펼치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건산업의 대표 메세나 '이건음악회'

박 회장은 메세나협의회를 이끌기 전부터 문화경영을 선구적으로 실천해온 기업인이다. 특히 올해 20주년을 맞는 '이건음악회'는 문화예술을 통한 기업의 사회환원 활동 사례로 매우 유명하다.

외국 유명 음악가들의 멋진 앙상블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이건음악회는 매년 가을 전국을 돌며 일반인들의 문화갈증을 달래주고 있다. 지난해 가을엔 영국의 현악 4중주 그룹 '더 스미스 콰르텟'(The Smith Quartet)이 초청 연주회를 가졌다.

한 달에 3권 이상은 꼭 책을 읽는다는 박 회장은 독서경영의 전도사이기도 하다. 그는 일찍부터 사내 독서클럽 제도를 만들어 임직원들의 독서습관을 북돋우고 있다. 9명이 한 조로 이뤄지는 독서클럽에 그 역시 조장으로 참여한다.

"처음엔 회장과 한 조가 되니까 다들 얼어붙어 말도 못하더니 지금은 열심히 토론을 벌여요.(웃음) 어떤 조직이든 소통이 늘 문제가 아닙니까. 그런데 책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임직원들이 대화하고 토론하고 마침내는 소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흐뭇함을 느낍니다."

박 회장은 해외시장에서도 메세나 활동을 어김없는 원칙으로 삼고 있다. 어떤 지역에 진출하든 반드시 한 가지 문화사업은 한다는 것이다.

문화를 통한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ㆍ세계화와 현지화를 접목한 해외시장 진출 전략)인 셈이다. 특히 칠레에서 개최하고 있는 음악회와 어린이 사생대회는 이건 브랜드를 드높이는 유명한 행사가 됐다고. 박 회장은 2001년 칠레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훈장(Bernardo O'Higgins)을 받기도 했다.

일찌감치 문화경영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실천해온 박 회장. 그는 메세나를 어떻게 규정할까.

"메세나는 기업이 문화예술을 후원함으로써 문화도 발전하고 결국은 기업도 발전하는 선순환 사이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을 후원하게 되면 기업의 품격과 이미지가 높아지기 때문이죠.

앞으로 기업의 화두는 지속가능경영과 창의경영으로 압축되는데,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기업과 문화가 서로 윈윈할 수 있느냐 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장기적 프로그램 마련이 메세나 승부수

최근 수 년간 국내 기업들의 메세나 활동은 외견상 크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반면 일회성, 과시성, 면피성 행사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지적도 엄연히 있다. 그런 터에 박 회장의 제안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메세나 활동을 찔끔찔끔 떡 나눠주듯이 시혜적으로 할 게 아니라 장기적인 계획과 프로그램을 갖고 특정 예술단체를 집중 육성한다든지 해서 어떤 가시적인 결실과 업적을 낳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일부 대기업은 최근 특정 사업에 포커스를 맞추는 쪽으로 메세나 활동을 조정해가고 있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우리 기업들이 장기적인 문화예술 후원 프로그램을 마련하려면 무엇보다 기업 스스로 문화예술에 대한 전사적인 관심을 갖고 기업의 발전동력으로 삼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박 회장은 정부에 대한 바람도 피력했다. 기업들의 메세나 활동이 보다 확산되고 정착되려면 법적,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다. 특히 세제 혜택은 기업들의 메세나 참여를 독려하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정부가 문화예술을 진흥하려면 어차피 국민 세금을 걷어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럴 바에는 기업들이 주도적, 창의적으로 문화예술 투자를 하도록 하고, 그에 상응하는 세제 혜택을 주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박 회장이 '한국의 마에케나스'(메세나의 어원.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은 고대로마 정치가)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가졌던 고(故)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의 타계 이후 메세나협의회 회장직을 승계한 지도 벌써 3년이 넘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새롭게 기획한 프로그램이 하나 둘씩 자리잡는 것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기며 일을 해왔다는 박영주 회장.

"우리나라가 문화선진국으로 가는 데 큰 초석은 아니더라도 작은 디딤돌 하나 놓았다는 자부심은 있습니다. 그저 소박한 바람 하나는 더 많은 기업들이 메세나 활동에 동참하고, 국민들께서도 기업들의 문화예술 투자를 호의적으로 격려해주셨으면 하는 거지요. 언젠가는 다 우리나라의 국가 자산이 될 것들이니까요."

박영주 회장 프로필

1959 경기고 졸업
1963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졸업
1975 광명목재주식회사 대표이사
1978 이건산업주식회사 대표이사
1988 (주)이건창호시스템 대표이사(현)
1993 이건산업(주) 대표이사 회장(현)
1995~1997 세계임업협회 회장
1990~2002 한국합판보드협회 회장
2009 현재 한-중남미협회 부회장
솔로몬아일랜드국 명예영사
예술의전당 후원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태평양경제협의회 한국위원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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