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계 인사들 '지혜의 향연' 등모여 위기 탈출 해법 찾기 위해 '열공'일반 대중은 '작은 대학' 등찾아 세상과 인생에 대한 이해의 폭 넓혀

대다수 인문학 연구가 그렇지만, 고전은 대학의 상아탑 안에 머물러 있었다. 특히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고전 강의와 세미나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이 운영하는 '문예아카데미'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인문학 위기론이 대두된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다시 고전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전을 강의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있다. 다양한 동서양 고전 강의 기관과 프로그램을 소개한다.

# CEO 고전 삼매경

고전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각 기업의 CEO를 비롯한 정재계 인사들이다. 2005년부터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메디치 21'을 시작으로 각 기업의 인문, 예술 강연모임이 늘어났다. 이에 서울대 인문대학에서는 사회지도자를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 프로그램을 2007년부터 신설했다. 정식 명칭은 '최고 지도자 인문학과정(AFP, Ad Fontes Program)'.

메디치 21이 근작을 바탕으로 한 인문, 예술 강연이라면 서울대 인문학 강연은 고전 텍스트를 주로 사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권영민 국문과 교수가 '한국문학과 한국인'을 가르치고, 허남진 철학과 교수가 '퇴계와 율곡'에 관해 설명한다. 이주형 고고미술학과 교수는 '불교미술의 특징'이란 주제로 강연한다.

총 18주 과정의 이 수업은 1,000만 원이 훌쩍 넘는 비싼 강연이지만, 인기가 높다. 이철우 롯데쇼핑 사장, 김낙회 제일기획 사장을 비롯해 이건영 빙그레 사장, 이낙영 SPP조선 회장 등이 이 과정을 들었다. 배철현 최고지도자 과정 부주임 교수(종교학과)는 "올해 봄 40명 모집 인원에 응시자는 두 배를 훌쩍 넘어 47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인기 이유에 대해 배 교수는 "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인문학적 사고가 필수적이다. 고전은 인문학적 사고의 밑바탕이 된다"고 말했다.

최고지도자 과정을 마친 CEO들은 각 기수마다 모임을 만들어 계속 공부한다. 1기 졸업생들은 <논어>를 읽고 2기 CEO들은 주경철 서울대 교수가 쓴 현대정치사상사 <대항해 시대>를 공부한다.

성공회대 인문학습원에서도 사회 지도자를 대상으로 인문, 고전 강연을 한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 교수를 비롯해 노성두 미술사학자,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짐종엽 한신대 교수 등이 강연하는 'CEO를 위한 인문 공부'가 그것. 서울대 인문학 강좌가 원로학자와 석학 중심이라면 성공회대의 경우 진보적 성향의 소장학자들이 강사로 나선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난 해 12월에 끝난 1기 강연에서 신영복 교수는 '고전과 인문공부'란 주제로 강연했다.

1-<길담서원>에서는 중국 고전 원서를 공부한다 2-강남구 역삼동 파이낸스센터에서 열린 제1기 서울대학교 인문학 지도자 과정에 참가한 CEO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1-<길담서원>에서는 중국 고전 원서를 공부한다
2-강남구 역삼동 파이낸스센터에서 열린 제1기 서울대학교 인문학 지도자 과정에 참가한 CEO들이 수업을 듣고 있다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을 비롯해 김연배 한화그룹 부회장, 김태구 넥솔 회장(전 대우자동차 회장),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이병남 LG인화원 원장 등이 1기 '학생'으로 인문 고전 강좌를 들었다. 2년 전 신영복 교수 정년퇴임을 맞아 각계 인사가 신 교수의 후원기금을 발족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인문학 수업을 시작했다는 후문이다.

성공회대 인문학습원 임정아 객원 교수는 "1기 수강생들은 정식 모집을 한 게 아니라 알음알음으로 오신 분들"이라며 "2기 수강생 역시 몇몇 언론 보도를 보고 문의해 기다리신 분이 대부분이다. 공고를 통한 공식 모집은 인문학습원이 구성이 갖춰지는 3기부터"라며 뜨거운 반응을 설명했다.

한국능률협회도 인문, 예술 강연이던 '지혜의 향연'을 지난 해 4월부터 서양고전 강연으로 바꾸었고, 오는 3월에는 동양고전 강연인 '동양고전 오디세이'를 시작한다. 능률협회 회원을 대상으로 매달 한번 조찬 모임으로 진행되는 '지혜의 강연'에는 평균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몰린다. 동양고전 오디세이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등 4서와 손자병법, 도덕경 등을 현대 경영학과 리더십 관점에서 집중하는 독특한 방식의 강연이다. 50명을 대상으로 6개월 간 진행되는 동양고전 오디세이 역시 강의 시작 전부터 문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변설화 연구원은 "지혜의 향연은 이어령 교수가 문화예술에서 창조적 모티프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강연이었다. 이제 문화와 예술에서 찾을 수 없는 창조성을 철학과 인문학, 특히 고전에서 찾고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 일반인 강좌는

지도자들이 위기 해소의 방편으로 고전을 찾는 것과 달리 일반 대중들은 '치유'의 목적이 크다.

1991년 박영신(연세대 사회과), 진덕규(이화여대 정외과) 씨 등 5명의 교수가 의기투합해 문을 연 '작은 대학'은 고전 세미나로 가장 역사가 깊은 대안 교육공간이다. 이곳의 고전 강연 중 하나인 '학사일정'은 1년간의 과정으로 플라톤의 국가론,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노자 <도덕경>, 왕양명 <전습록> 등 동서양 고전을 공부하고 1년 후 논문을 발표해야 '졸업'이 가능하다. 26기를 모집하고 있는 현재, 평균 15~20명이 꾸준히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작은 대학에서 강연을 들었던 대학생 장일호(27) 씨는 "고전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작정하고 책을 잡아도 끝까지 읽기 어렵다. 이곳에서 함께 고전을 읽고 방향을 이끌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끝까지 공부하게 됐다"고 말했다. 장 씨는 이어 "이해의 폭이 커져서 전공 수업 들을 때 도움이 됐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고, 옛사람들의 지혜를 통해 지금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고전 강의 중 일반에 널리 알려진 것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진행하는 고전 강독이다. 동양고전강독에서는 주희의 <근사록>, 왕양명의 <전습록>을 비롯해 연암 박지원의 산문 선독과 조선후기 소품문 등을 강연한다. 수유너머에서는 고전 강독 이외에도 인문 사회과학 강좌를 비롯해 문화예술 전반의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씨는 최근 이곳에서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강연하고 있다. 고 씨는 "<임꺽정>에는 현재 청년 실업에 대한 대안이 모두 들어있다. 강의 공지가 나가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신청했다. 20평에서 시작한 연구실이 400평 규모로 늘어난 것을 볼 때도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고 씨는 이어 "연암 박지원의 산문이나 동의보감 같은 고전을 읽는다면 사람들이 지금처럼 팍팍하게 살지 않을 거라고 본다. 인생에 대해 괴로워할 때 운명적 차원에서 지혜를 나눠주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운영하는 문지문화원 '사이'는 문학·예술과 인문사회과학을 아우르는 복합문화공간. 문학·예술 세미나와 심포지엄, 이벤트, 전시 등 다양한 활동과 함께 동서양 고전을 강연한다. 지난 2007년과 2008년에는 '논어 읽기' 기초 강좌를 비롯해 세계 고전문학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세계문학을 찾아서', 동양 신화를 분석한 '삼국유사와 신화의 세계'를 강연했고, 최근 북유럽 신화와 관자, 노자, 장자, 논어, 대학, 순자, 기타 중국 고전들을 분석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2~3달에 걸쳐 동서양의 고전을 소개하는 이 강좌에는 평균 8~15명의 수강생들이 수업을 듣는다.

경복궁역 근처에 있는 길담서원에서도 매주 중국 고전 수업이 열린다. 성공회대 박성준 교수가 영어 원문 읽기 수업을 하고, 성균관대 김성남 교수가 중국 고전 수업을 진행한다. 10명을 기준으로 선착순으로 희망인원을 받아 진행하는 논어 수업의 회원은 고등학생부터 50세 일반인까지 다양하다. 김 교수가 중국 연수 관계로 고전 수업을 잠시 쉬고 있지만, 돌아온 후 맹자를 강연할 예정이다.

박성준 교수는 "함께 공부하다가 제 발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책을 가르친다. 이 저자의 문체를 파악하면 혼자 읽을 수 있을 때다. 모든 회원이 동의하면 다음 책으로 넘어간다. 이곳은 좋은 책을 추천하고 공부해 스스로 설수 있게 하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서울대 인문대학원 이영목 교수 인터뷰 "IFP는 역사적 인물과 이들이 쓴 고전을 공부"


서울대는 (최고지도자 인문학 과정 AFP, Ad Fontes Program)의 인기에 힘입어 올해 초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미래지도자 인문학 과정(IFP, In Futurm Program)'을 개설했다. 미래지도자 과정은 AFP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규보, 나관중, 두보,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등 역사적 인물과 이들이 쓴 고전을 공부하는 것이 골자다.

미래지도자과정 부주임 교수인 불문과 이영목 교수에게 교육프로그램의 취지와 고전 인기 이유에 질문했다.

- 미래지도자 과정의 대상은 누구인가?

= 중소기업의 이사급이나 대기업의 부장급 인사다. 응시기간에 커리큘럼을 보고 AFP과정을 들어야 할 사회 인사들이 IFP를 응시해서 응시를 제한한 적이 몇 번 있다.

- IFP에는 고전 수업 비중이 훨씬 높다. 18주 수업 과정이 모두 역사인물과 고전텍스트로 이뤄져 있다.

= AFP의 학생들은 인생경험이 풍부한 원로급 인사들이다. 지식을 던져주기 보다 열린 사고와 토론을 하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이다. IFP은 강연 방식이 많다. 인문학 수업이니 자연스럽게 고전을 텍스트로 삼는다. 경험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는 AFP가 더 나을 수 있다.

- 경영과 정치 등 현대 사회생활에서 인문학, 특히 고전이 각광받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 이제까지 교육기관에서 인문학적인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깊이 있는 사고와 통찰력을 얻는데 고전만큼 좋은 텍스트는 없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문학적 창의력이 고전에서 온다. 다만 그 창의력을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기업을 비롯한 사회주체들의 몫이다. 때문에 최고지도자 과정이든, 미래지도자 과정이든 교육의 목적은 고전과 인문학 기초에 충실한 것이다.

-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 중에서 고전을 실생활에 응용하거나 접목시킨 사례를 본적이 있나?

= 고전은 아니지만, 나 같은 경우 AFP 강연에서 '아프리카를 어떻게 볼 것인가?'란 주제로 인문학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당시 수업을 듣던 CEO들은 아프리카 진출에 공세적인 입장이었는데 수업이 끝난 후 그 CEO들이 '아프리카인들을 어떻게 문화적 스승으로 바라볼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었다. 고전에 접목시킨다면 열하일기를 따라 중국을 여행하는 워크숍을 통해 중국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또 AFP 과정을 마친 후 몇몇 대기업에서는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을 인재로 뽑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알고 있다.

- 앞으로 서울대에서 추가로 고전 강연 프로그램을 개설할 계획 있나?

= 2007년부터 논의해온 '동서양고전읽기 과정'이 아직 확정이 안 된 상태다. 이 프로그램이 계획 중에 있고, 서울대 직원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좌를 올해 봄 개설한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