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맛·향 유지하며 전혀 다른 모양과 질감에 미식가 유혹

(위)테이스티 블루바드의 '4가지 장미 소스를 얹은 바닷가재'
(아래)1. 바닷가재를 그릴에 익힌다. 2. 장미 소스로 캐비어를 만들기 위해 주사기를 이용해 칼슘 용액에 떨어뜨린다.3. 장미 소스의 알긴산과 칼슘이 만나 캐비어 처럼 응고된 모습. 4. 장미 겔을 만드는 과정. 역시 칼슘과 알긴산의 응고 작용을 이용했다.


"알긴산 농도가 왜 이렇게 묽어?" "주사기 더 큰 걸로 가져와"

화학 실험실에서 서투른 조교를 혼내는 노교수의 목소리가 아니다. 스테이크로 압구정동을 평정한 '테이스티 블루바드'의 조리실에서 나는 소리다. 수석 쉐프가 주사기 안에 집어 넣은 장미 소스를 칼슘 용액이 담긴 통에 방울방울 떨어뜨린다. 장미 소스 방울은 그 자리에서 굳어 곧 캐비어로 변신한다. 장미 소스로 만들어진 가짜 캐비어는 그릴에 살짝 구운 바닷 가재 위에 곱게 세팅 된다.

나머지 살점들 위에는 각각 젤리와 거품이 올려졌다. 어떤 것은 입에서 사르르 녹고, 어떤 것은 톡톡 터지지만 모두 장미 소스로 만들어졌으니 같은 맛과 향이 난다. 한 가지 재료를 가지고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전혀 다른 모양과 질감으로 표현해 내는 것, 이것이 바로 분자 요리다.

정어리로 만든 셔벗, 망고로 만든 계란 프라이

분자 요리는 참 재미있다. 틀림없이 맥주인 줄 알고 마셨는데 요구르트고, 성게 알을 먹었는데 석류 맛이 난다. 파스타 면인 줄 알았는데 파마산 치즈고, 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는데 딸기 아이스크림이다. 분자 요리를 젊은 여성 고객에게 내면 몇 분 지나지 않아 십중팔구 "어머나" 소리와 함께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 같은 기막힌 환골탈태의 원동력은 과학의 힘이다. 그 시작도 요리사가 아닌 프랑스의 한 화학자로부터 였다. 물론 모든 요리에는 과학의 원리가 적용되기 때문에 분자 요리에만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실례다.

스테이크를 구울 때 소금의 삼투압을 이용해 육즙을 가두는 것이나 김치의 발효, 빵의 부풀음에 모두 과학이 숨어 있다. 하지만 분자 요리의 과학은 조금 특별하다. 아니 유별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이제껏 해왔던 썰기, 굽기, 튀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더 새로운 것이 없을까' 하는 목마름 가운데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급속 냉각이라든지 응고, 겔(gel)화 등 주방보다는 실험실에서 더 자주 쓰일 법한 기법들이 등장했다. 음식의 온도와 양에 예민해지기 시작했고 레시틴, 알긴산, 질소 가스 등 생소한 재료들이 투입됐다. 하지만 이렇게 기묘하고 골치 아픈 방식을 통해 태어난 음식들은 그 형태나 질감이 기존의 상식을 뒤엎을 만큼 신선하고 재미있어서 식탁에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하나 더 늘려주었다.

정어리로 만든 셔벗이나 망고로 만든 계란 프라이를 생각해 보라.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공략하기 위해 데이트에서 무슨 이야기를 준비할까 고민하는 남자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요리들을 보고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여자는 없을 테니까.

분자 요리, 배부른 사람들의 사치?

분자 요리의 시작은 프랑스였지만 대중화 시킨 것은 스페인이다. 새로운 조리 기법에 개방적인 스페인 사람들은 늘 먹던 음식도 어떻게 다르게 먹어볼까를 구상했고 이런 고민은 '엘불리'의 천재 요리사인 페란 아드리아를 낳았다.

콧대 높은 미식가들을 "예약만 돼도 행복하다"며 겸손하게 만든 레스토랑 '엘불리'는 현재 분자 조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대두 레시틴으로 거품 내기, 액화 질소를 사용해 영하 196℃에서 순식간에 얼리기 등의 기법을 전 세계로 퍼뜨렸다.

물론 이 분자 조리 기법을 사용하는 곳은 많지 않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뭔가 더 새로운 것을 향한 집착에서 태어난 기법인 만큼, 어지간히 배부르지 않고는 꿈도 꿀 수 없는 발상이다. 가령 푸아그라(살진 거위간)를 늘 먹던 대로 구워 먹지 않고 질소 가스를 주입시켜 가벼운 크림으로 만들어 먹을 생각을 했다면, 평소에 푸아그라를 질리도록 맛 본 사람이어야 한다.

때문에 현재 분자 조리 기법은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을 표방하는 일류 레스토랑에서만 사용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7년 세계 3대 레스토랑으로 뽑힌 스페인의 엘불리와 프랑스의 피에르 가니에르, 그리고 영국의 팻 덕이 모두 분자 조리 기법을 시행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분자 요리와 한식이 만나면?

한국인들보다 새로운 것에 열광적인 사람들이 있을까? 지난 해 피에르 가니에르가 롯데 호텔에 한국 지점을 내면서 분자 요리를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흡사 마술 쇼를 보는 것처럼 환호했다. 어떻게 하면 분자 요리를 배울 수 있냐고 문의하는 초보 요리사들도 줄을 이었다. 하지만 베테랑 요리사들의 눈에는 웃지 못할 촌극이다.

"그냥 한식의 돌려 깎기 같은 거에요"

한 국내 정상급 쉐프는 분자 조리가 수많은 기법 중 하나일 뿐 음식의 종류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림으로 치면 수묵화나 유화가 아니라 파스텔이라는 말이다. 이것 없이도 얼마든지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다만, 전에 없이 화려하고 특이해 눈에 띄는 도구임에는 확실하다. 그렇다고 "파스텔을 사용하는 화가가 되고 싶어요"라는 꿈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슨 그림을 그릴 지 결정하는 것이 먼저고, 그 다음에 도구를 결정하는 것이 순서니까. 세계의 요리 명장들이 '분자 조리 전문'이라는 타이틀에 유독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요리에서 자신의 독창성과 그 안에 녹아 있는 연륜을 읽어주기를 바랐건만, 마치 한 가지 조리 기법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니 쉐프의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레스토랑에서는 분자 조리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 미식가들이 예쁘고 신기한 거품 소스에 익숙해지면서 소스를 액체 상태로 내는 것이 더 이상 '트렌디하지 않다'는 인식이 생기자, 인기 레스토랑이라고 자처하는 곳이라면 간단하게나마 분자 조리를 보여 준다.

시간이나 비용이 더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특히 모양이 예쁘기 때문에 디저트에 자주 활용된다. 동부 이촌동에 새로 문을 연 디저트 카페 '저스트 어 모먼트'에서는 프랑스 식의 밀?유나 스페인 식 토스트 등 다양한 디저트를 판매하는 데 그 중 분자 조리 기법을 사용한 디저트도 있다.

몸에 좋은 7가지 재료를 일주일 간 숙성 시킨 에센스에 코코넛 무스, 석류 등을 담고 그 위에 탄산을 주입시킨 패션 프룻 폼을 얹었다. 이름은 디어 피에르(Dear Pierre). 분자 요리의 대가인 피에르 가니에르의 정찬을 먹고 감동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홍대에 문을 연 '피치 키친'에서도 디저트에만 분자 조리 기법을 살짝 선보이고 있다. 이전 분자 요리로 이름을 떨치다가 문을 닫은 '슈밍화' 출신의 쉐프가 볼 안에 든 가루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준다. 가격은 6000원. 저렴하게 맛볼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분자 조리에 대해 넓게 해석하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이왕에 분자 요리의 의미가 '음식의 맛과 향은 유지하면서 전혀 다른 모양과 질감을 내는 것'이라면 굳이 질소나 알긴산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지난 1월 강남에 문을 연 '정식당'의 코스 중에는 '대지'라는 이름을 가진 요리가 있다. 버섯을 말려서 가루로 만든 것과 빵 가루, 흑미를 섞어서 흙을 표현하고 그 속에서 인삼 뿌리가 뻗어 나오는 모습인데 척 보기에는 영락 없이 흙 밭이다.

스페인에서 분자 요리를 접한 임정식 쉐프는 "분자 요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한식에 접목하려는 움직임도 있어 흥미롭다. 일산의 한식당 '초록 바구니'에서는 김치 젤리와 된장국 겔, 당근 스펀지 등 한식의 재료에 분자 조리를 접목한 음식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아직까지 쉽지 않다.

맵고 아삭한 김치를 기대한 손님들에게 김치 젤리를 내놓았을 때 처음부터 흔쾌히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때문에 현재는 가장 비싼 코스에서 가니쉬(곁들여 먹는 음식) 정도로만 보여주고 있다.

1-푸아그라를 거품으로 만든 '푸아그라 딸기 에스푸마'
2-저스트 어 모먼트의 '디어 피에르'
3-정식당의 '대지'
4-피치키친의 '스노우 볼'



맛 있게, 예쁘게, 즐겁게 먹자

분자 요리를 집에서도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조금 힘들다. 거품을 내는 것 정도야 믹서를 이용해 쉽게 할 수 있지만 알긴산이라든지 액화 질소는 사용하면서 부상을 입을 수도 있고 구하기도 어렵다. 거품을 낼 때 사용하는 레시틴에도 식품 첨가물이 있고 대두 추출물이 있는데 분자 조리에 쓰이는 것은 후자다.

이런 화학적 지식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못 먹을 음식을 만들 수도 있다. 분자 요리를 한다고 전면에 내세우는 식당도 일단은 의심해 봐야 한다. 내공이 검증된 쉐프가 더 예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한다면 상관 없지만 초보 쉐프의 깜짝 쇼를 위한 것이라면 실망할 것이 뻔하다.

영국의 레스토랑 '팻 덕'에서는 매 코스마다 아이팟이 따라 나온다. 음식과 어울리는 음악을 함께 즐기라는 뜻이다. 맛은 기본이고 그 이상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분자 요리는 파인 다이닝의 총아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그런 사람에게는 솜사탕 대신 설탕을 한 사발 퍼주는 것이 좋겠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