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2009, 한국만화 새로운 100년을 위해단순 오락 판타지 역할서 일상을 그리고 사회를 말하며 시대에 부응

'신의 물방울' / 맛의 달인 / '갤러리 페이크'



인터넷 매체가 발달하고 다른 매체와 결합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만화도 새로운 장르에서 새로운 역할을 하고 있다. '웹툰(Webtoon)'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만화는 이제 '만화'라는 단어만큼이나 익숙하게 들린다. 하지만 웹툰은 한국 만화에 양날의 칼로 작용하고 있다.

만화가 지망생들에게는 많은 기회를 제공하지만 결국 출판만화가 쇠퇴하는 계기도 됐기 때문이다. 인기작가와 '그외 작가'의 양극화도 심해졌다. 또 매체의 특성상 언어유희나 가벼운 유머에 그치는 한계도 있다.

그래서 현재 웹툰과 출판만화를 포함해 꾸준한 인기를 받고 있는 만화들의 공통점은 읽고 나도 '남는 것이 있는' 내용을 담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판타지나 초현실 세계보다는 대체로 우리 주변의 일상에 관한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 같은 변화는 만화가들의 인식을 자연스레 사회참여적인 방향으로 옮겨오게 하고 있다. 이제 만화는 더 이상 단순한 오락이나 판타지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세상을 품고 현실과 함께 하기를 요구받고 있다. 일상을 담고, 사회에 발언하고, 때로는 예술이 되는 새로운 시대의 만화인 것이다.

보편성과 상상력을 담는다

출판만화가 침체에 빠져 있다고 해도 일본 만화에 대한 독자의 관심은 식을 줄을 모른다. 그림 실력은 한국 만화도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문제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이다. 꾸준한 인기를 자랑하는 몇몇 일본 만화들은 그 안에 양질의 교양과 고급정보를 담아내, 이미 단순한 만화의 경지를 뛰어넘었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신의 물방울'이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키며 한국의 와인산업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사례는 이제 너무 유명하다. 책 속에 담긴 '신의 물방울'은 두 주인공 캐릭터의 대결을 통해 '와인'이라는 낯설었던 술을 대중에 친근하게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우리 만화 '식객'과도 여러 차례 비교가 됐던 요리만화 '미스터 초밥왕'은 초밥을 비롯한 일본 요리를 다양한 상식으로 풀어내며 일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지난 1983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최고의 음식만화 '맛의 달인'은 어느새 100권을 돌파해 지난해 102권까지 나온 상태.

미술만화도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은 큐레이터였으나 지금은 모조품만을 취급하며 미술계를 조롱하듯 사는 주인공의 이야기 '갤러리 페이크'가 그것이다. 이 만화들은 다른 일본 만화와는 달리 그림체가 화려하거나 깔끔하지도 않지만, 탄탄한 이야기와 캐릭터 구축으로 전집을 소장하는 마니아층까지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다.

이들의 저력은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감히 시도조차 어려운 소재를 충분히 활용해 진정한 문화콘텐츠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의 운영위원을 맡고 있는 김우정 풍류일가 대표는 일본 만화의 인기 비결에 대해 소재 선택과 상상력에 있다고 진단한다.

"보편적인 소재를 십분 활용하는 일본에 비해 국내에서만 통하는 소재와 정서로 승부하는 우리 만화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그는 기업형으로 분화되어 운영되는 일본의 작업환경에 비해, 아직도 작업실에서 소수가 여러 역할을 하는 한국적 시스템에서 제대로 된 상상력이 나오기란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김 대표는 만화의 가치와 사회적 인식이 올라갈 때 우리 만화도 여유를 가지고 더 뛰어난 창작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제는 만화가 문학과 거의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만화가들의 창작 과정을 높이 평가하고, 작가들도 창작을 위한 노력을 더 한다면 우리 만화도 더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그림 밖으로 나와 사회에 외치다

만화가 대중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은 곧 만화가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을 말해준다. 이제까지 만화가는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독자에게 보이면 됐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사회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소리내어 말할 수 없었던 독자들의 심정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지난 1월 중순 강풀, 곽백수, 최규석, 석정현 등 인기 만화가 13명은 'MB악법 반대 릴레이 카툰'을 전개해 네티즌의 반향을 일으켰다.

과거 탄핵 정국이나 광우병 사태 때에서도 자유발언 형식의 릴레이 만화가 이어진 적은 있지만, 이번 시도는 처음부터 출판 기획자들이 참여하고 작가들이 주제별로 배분을 해 '원소스 멀티유스(one source multi-use)'를 모색한 점이 다른 점. 아울러 법적인 문제는 민변 등의 감수를 받아 체계까지 갖춘 점이 진일보한 시도였다.

릴레이 연재 주자 중 의료법 개악을 테마로 그림을 그렸던 석정현 작가는 "그림으로 말을 할 줄 아는 '기술'을 가졌고 또 그런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만화가를 표현한다. 그는 만화가는 더 이상 '광대'의 역할에만 머무를 게 아니라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한다.

단행본으로도 출간될 예정인 이 만화는 참여 작가와 기획자들이 인세를 자진 포기하며 원가 부담까지 줄여서 책값까지 낮게 책정됐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한다는 의도이다.

한편 인기만화 '트라우마'로 웹툰 1세대를 이끌었던 곽백수 작가는 현재 웹툰의 고료 체계를 지적하며 어린 작가들이 이 세계에서 오래 '버틸'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다. "인기작가들은 직장인에 비해서도 나은 대우를 받으니 걱정이 없지만, 한 달에 50만 원 남짓한 고료를 받는 신인 작가들은 지금은 겨우 연명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가정까지 꾸리게 되면 더 이상 이 일을 못하게 되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는 보다 성숙한 만화가 나오기 위해서는 '만화만 그려도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화가가 젊을 때 한 번 거쳐가는 직업이 아니라 안정적인 직업군이 되려면 우선 작가에 대한 비현실적인 처우부터 개선되어야 할 겁니다."

석정현 작가는 한국 만화를 바라보는 독자와 작가들의 인식이 모두 바뀌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독자들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요. 작가들의 낯선 시도에 대해서 참신하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주기보다는 일종의 '죄'처럼 여기며 공격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럴 때는 작가들도 솔직히 위축이 되죠." 하지만 그는 작가들의 자세가 적극적으로 바뀌어져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이제 작가들도 '들이대야' 합니다. 이번 릴레이 만화에 대한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가벼운 유머에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작가들도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고 발언할 때 독자들도 다양한 시도들을 이해해주고, 그러면서 만화에 대한 인식도 좋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출판만화의 시대에서 웹툰의 시대로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았듯이, '새로운 만화'에 대한 인식도 여전히 유동적이다. 새로운 한국 만화의 정체성이라는 것도 아직 없는 지금, 그래서 대중과 소통하며 네모 칸 안에 글과 말을 그려넣는 새로운 작가 세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1-석정현 작가 / 2-아메바피쉬 / 3-곽백수 작가 / 4-트라우마



아메바피쉬
만화 가지고 노는 그래픽 아티스트


'아메바피쉬'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박현수 작가는 '만화가'라는 범주에 넣기에는 다소 모호하고 산만한(?) 사람이다. 그만큼 그의 관심사는 만화를 중심으로 한 이미지를 '가지고 노는' 모든 일에 걸쳐 있다.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에 걸렸던 나이키 광고나 SKT '현대생활백서(생활의 중심)'에 쓰였던 복잡한 일러스트레이션에서 그의 흔적은 쉽게 발견된다. 하지만 그는 만화축제에도 불쑥 나타나고 미술 전시회에 등장하기도 하는 무규칙 이종 만화가다.

- 너무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정확히 정체가 뭔가

그냥 그래픽 아티스트라고 해두자.

- 아메바피쉬(AmebaFish)는 어떤 뜻인가

물고기를 좋아하고 아메바처럼 무한번식하며 내 만화를 퍼트리자는 뜻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별 뜻 없다. 생각나는 대로 지은 거다.

- 게시판을 보니 청탁이나 협업 제안이 많다. 자신의 경쟁력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발랄한 이미지가 아닐까. 주로 만화에서 차용한 캐릭터나 말풍선을 활용한다.

- 소위 잘 나가는 카툰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 실상은 어떤가

별로 잘 나가고 있지 못하다(웃음). 요새 대세가 웹툰인데 포탈사이트의 웹매체는 실제로 제대로 활동할 장이 없다. 지면매체는 다 망했고, 그래서 나는 만화를 업으로 삼고 있진 않다. 만화보다 일러스트로 버는 부분이 더 많다.

- 왜 이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됐나

원래 직업 만화가가 꿈이었지만 현실이 너무 어려웠다. 또 만화계의 시스템이라는 게 원래 꿈꿨던 것과 너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만화를 그리되 그 세계에는 속하지 않는 일러스트나 디자인 일을 하게 됐고, 여기서 번 돈으로 개인작업을 하는 방식을 택했다.

-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

그 옛날의 양철로봇 같은 싸구려 장난감을 좋아한다. 매끈하고 세련되지 않은 구식 냄새, 아날로그 냄새가 좋다. 또 고풍스럽고 클래식한 이미지나 키치적인 느낌의 이미지들도 좋아한다. 아, 외계인도 좋아한다.

- 역시 범상치 않다. 어릴 적 좋아했던 만화는 주로 SF 아니었나

맞다. 애니메이션으로는 '아톰'을 좋아했고, 만화로는 김형배 작가의 '20세기 기사단'이나 '최후의 바탈리언' 등이 기억에 남는다.

- 작품 활동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외뢰인과의 시각 차 아니겠나. 또 그림의 상품성은 트렌드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부침이 심하다는 것도 쉽지 않은 점이다.

- 범 만화인으로서 현재 한국만화에 대해 한 마디 한다면

무엇보다 매체가 다양해져야 한다. 전체 시장은 커졌지만 매체는 한정되어 있고 독자들은 골라볼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다. 지금은 너무 웹툰에만 몰려 있어서 만화의 내용이 트렌드 지향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작가들이 독자적으로, 또는 연대하며 활로를 모색해서 일종의 '작가 무브먼트' 같은 시도를 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