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쓰고 해외작품 번역, 춤·연기 배워 직접 공연도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중략) 테니스선수였던 나의 인생이 무용가로 바뀌려는 순간이었다. (중략) 나는 오랜 고민 끝에 무용을 내 일생의 업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 '춤'지 창간호 '나의 춤 반 세기의 영욕'에서 조택원의 술회

오늘날 최승희와 함께 한국 신무용의 대가로 꼽히는 조택원. 그가 원래 운동선수였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그 이전에 춤을 좋아했다는 흥미롭다. 위의 고백에서 보여지듯 그는 일본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춤을 보다 감동을 받고 '전업'을 결심한다. 전혀 다른 분야의 종사자가 수준 높은 춤의 마력을 포착할 수 있었던 건, 평소 딜레탕트로서의 소양을 충실히 쌓아온 결과다.

오늘날 무대 위 세계의 매력에 빠진 애호가들은 조택원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활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 물론 무대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땀냄새와 거친 숨소리의 매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새로운 애호가들을 양산하고 있다.

청출어람 청어람, 연극과 뮤지컬 딜레탕트

1990년대 중반,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PC통신 시대에는 예술 장르별로 대단위의 동호회들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공연예술 분야에서는 가장 큰 세를 자랑하던 연극동호회는 이제 뮤지컬에 많은 회원들을 내주고 특정 작품별, 극단별 동호회로 세분화되고 있다. 때문에 이전과 같이 수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모임은 찾기 어려운 상태다.

일주일에 한 편 정도의 연극을 관람한다는 대학원생 신혜진 씨(32)는 PC통신 시절부터 연극동호회에서 활동해오다 지금은 개인적으로 공연장을 찾고 있다. 다른 회원들이 뮤지컬이나 춤 관련 동호회로 옮겨갈 때도 그는 끝까지 연극에의 애정을 과시하며 공연장을 지켜왔다.

그가 꼽는 연극의 매력은 역시 현실을 대변하는 풍자와 진단에 있다. "재치있고 가벼운 공연들도 재미있긴 하지만 보고 나면 남는 게 없거든요. 모든 게 다 쉽고 환타지만을 좇는 세상에서 현실을 말해주는 무게감 있는 작품들이 연극의 매력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는 공연 감상평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며 이웃 블로거들과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생활의 즐거움이다.

뮤지컬은 한때 연극동호회의 한 분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반대로 거대한 뮤지컬동호회에서 연극 관람 소모임을 추진하고 있을 정도로 그 위상이 변했다. 뮤지컬 딜레탕트는 영화팬과 함께, 어쩌면 영화팬보다 더 급속도로 늘어난 수를 자랑한다. 라이센스 뮤지컬들이 잇따라 들어오면서 그 티켓값도 고가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지만, 그럼에도 뮤지컬 애호가들은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중이다.

뮤지컬계에서 가장 많은 골수팬들을 보유한 송앤댄스(http://cafe.naver.com/songndance)는 단체관람과 할인율을 위해 존재하는 여느 동호회와 차원을 달리 한다. 이들이 특별한 이유는 말 그대로 한 장르에 대한 '애호'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준다는 점.

이들은 직접 전문가로부터 노래와 연기를 배우고, 연말 공연도 하며, 공연을 위해 따로 춤을 배우기도 한다. 장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스터디도 한다.

영어 실력이 좋은 사람들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을 번역해 자막을 만드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엔 자체적으로 웹진까지 제작해 인터뷰도 하고, 기사도 쓴다. 이들의 삶 자체가 뮤지컬의, 뮤지컬을 위한, 뮤지컬에 의한 라이프 스타일인 셈이다.

송앤댄스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구현영 씨(34)는 3년 전 이 모임에 가입할 당시만 해도 '얕은 지식'만을 가진 초보 관객이었지만, 지금은 최고의 뮤지컬 애호가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를 뮤지컬 딜레탕트로 이끈 것은 역시 뮤지컬 본연의 매력이다.

"연극이나 음악도 좋아했지만 뮤지컬은 음악과 대사를 통한 메시지 전달과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들어있는 장르여서 더 매력적이에요. 제 직업이 IT 쪽인데 일의 성격상 활동적이거나 감성적인 부분이 결여되어 있거든요. 뮤지컬은 그런 부족한 점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장르입니다."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표현한다, 춤 딜레탕트

현실의 이야기를 대사나 노래로 풀어내는 연극이나 뮤지컬과 달리 춤은 여전히 대중에게 쉽지 않은 장르. 한국에서 춤 특히 발레는 그 정도와 무관하게 '애호'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딜레탕트로서 인정받는 정서가 있다.

그 정도로 춤에 대한 애호가의 저변은 타 장르에 비해 그리 넓지 않은 편이어서, 기본적인 공연 에티켓만 알아도 딜레탕트로서의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정도다. 가령 이들 애호가들은 '백조의 호수'나 '돈 키호테'에 등장하는 32회전 푸에테(제자리에서 한 다리를 축으로 연속으로 회전하는 기술) 장면에서 다른 관객들처럼 장단을 맞춰 박수를 치지 않는다.

푸에테 도중의 박수가 무용수의 집중력을 방해하는 잘못된 매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기본적인 에티켓은 오랫동안 교양을 쌓아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발레 자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기간에 비례하는 것이다.

국립발레단의 동호회 '정익는 발레마을'의 운영을 맡고 있는 이슬기 씨(29)는 어릴 적부터 EBS의 예술 관련 프로그램을 접하며 이런 교양을 체득한 경우다. 다양한 문화 예술 프로그램에서 비롯된 다방면의 관심과 애정은 곧 발레단 서포터스 활동과 문화재단, 화랑에서의 인턴 경험 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많은 관심 분야 중에서도 발레에 애착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그는 "다른 장르에 비해 고전적인 레퍼토리와 스토리텔링이 색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직장인으로서 현실의 고달픔을 해소할 수 있는 발레 공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물 같아요."

오늘날의 애호가들은 단순히 '보는 자'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들은 공연을 보고 예리한 평을 써 공연관계자들을 긴장시키고, 해외 작품을 번역하며 이론적으로 무장하기도 하고, 또는 춤과 연기를 배워 직접 공연을 하는 등 새로운 딜레탕트의 모습을 개척하고 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